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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룩셈부르크 시티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래서 룩셈부르크에는 외침을 물리치려는 역사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룩셈부르크 요새가 있다.

그 요새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멋진 풍광과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룩셈부르크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의 장소, 룩셈부르크 요새를 찾아 나섰다. 이 요새의 유적은 보크 포대(Casemates du Boke)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괴테가 반한 이곳,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괴테는 룩셈부르크의 보크 요새를 보고 감탄의 명문을 남겼다.
▲ 괴테 석비. 괴테는 룩셈부르크의 보크 요새를 보고 감탄의 명문을 남겼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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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시가의 미카엘 성당(Eglise St. Michel)에서 북쪽의 보크 포대를 향해 답사를 시작했다. 나는 보크 포대를 향해 올라가면서 한 석비를 먼저 찾았다. 그 석비에는 한 인물의 두상이 청동으로 조각돼 있었다.

그의 이름은 괴테(Goethe). 1792년, 괴테는 독일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대공을 따라 제1차 대프랑스 혁명군과의 전쟁에 종군(從軍)해 이곳까지 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세 살.

짧은 시간 동안의 룩셈부르크 여행 경험에 의하면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프랑스어, 영어 모두에 능통했다. 나는 길을 가던 한 청년에게 물어봤다.

"저 석비가 괴테를 기리는 석비 맞아요? 저기 조각돼 있는 게 괴테의 두상인가요? 제가 영어 밖에 읽지 못해서 그러는데 석비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 수 있나요?"

예상대로 이 젊은 청년은 영어가 능숙할 뿐만 아니라 아주 친절했다. 나는 그의 유창한 영어 단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서 들으며 메모했다.

"괴테 기념석비(Goethe Gedankstein)가 맞아요. 괴테가 룩셈부르크를 찬양하는 내용이에요. '마치 잘라낸 듯한 웅장한 공간 속에 거리 전체가 떠 있다, 이 거리에는 고아한 정취와 위대함이, 가련함과 위엄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 사랑스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라는 내용입니다."

중세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가 훌륭한 군사요새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 보크 포대. 중세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가 훌륭한 군사요새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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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이 절경에 감탄해 보크 요새의 그림 다섯 점까지 그렸다고 한다. 200년도 더 된 과거의 시간에 이 요새를 방문했던 대문호 괴테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그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석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대문호가 남긴 문장들마저 이리도 아름다울까.

나는 보크 포대를 찾아오면서 보크 포대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라는 찬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여행을 즐기는 여행 망상가들의 과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그 찬사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내 망막에 그 풍경을 넣어보고 싶었다.

포대 위에 오른 여행자들이 요새 아래의 절경을 둘러보고 있다.
▲ 보크 포대의 여행자들. 포대 위에 오른 여행자들이 요새 아래의 절경을 둘러보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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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크 포대는 룩셈부르크 구시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아가기 어렵지 않았다.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크 포대를 포함한 요새 유적이기 때문이다. 구도심에서 예상보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나는 여행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유적을 보고도 진짜 이곳이 보크 포대가 맞나 헷갈렸고 포대를 잠시 지나치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경, 믿을 수 없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룬드의 건축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그룬드 마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룬드의 건축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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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크 포대로 돌아와 포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포대 정상에는 주변 지역과 건축물들을 보여주는 그림 설명도가 실사 전경 바로 앞에 그려져 있어 주변을 파악하기가 아주 용이했다. 드디어 내 눈 앞에 보크 포대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들어왔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관조하고 있는 여행자들 사이에 섞여 포대의 아래를 내려다 봤다. 아! 나는 보크 포대 같이 스펙터클한 풍경을 작은 나라 룩셈부르크에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룩셈부르크 구시가가 강을 만나 만들어진 깎아지른 절벽 안에 보크 포대는 만들어져 있었다. 포대의 협곡 아래에는 프랑스까지 물길이 이어지는 알제트(Alzette) 강이 포대를 둘러싸고 아련히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강줄기를 따라 요새의 아랫마을인 그룬드(Grund)의 중세시대 가옥들이 마치 레고블록처럼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포대 아래의 건축물들은 포대의 요새 절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크 포대와 그룬드는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다. 

알제트 강을 가로질러 저지대 성벽을 잇고 있다.
▲ 벤첼 성벽. 알제트 강을 가로질러 저지대 성벽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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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크 포대에서 북쪽을 내려다보니 벤첼(Wenzel) 성벽이 알제트 강 위를 가로질러 연결돼 있다. 15세기에 벤첼 2세(Wenzel Ⅱ)가 룩셈부르크 저지대까지 요새를 확장하기 위해 연결한 성벽이 벤첼 성벽이다. 표지판을 보니 벤첼 성벽은 성벽 아래를 2시간가량 산책하는 벤첼 워크(Wenzel Walk)의 출발점이 돼 있다. 요새와 강이 어우러진 벤첼 성벽 주변은 정말 그림보다 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이 역사의 큰 줄기였던 룩셈부르크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다. 해발고도 300m 위에 자리 잡은 룩셈부르크는 요새를 만들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자연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천년도 더 전인 963년부터 이곳에는 요새가 자리하게 된다.

룩셈부르크 시티를 처음으로 건설한 이는 10세기 당시에 룩셈부르크, 벨기에 동부, 프랑스 북부에 걸친 아르덴(Ardennes)의 고원 삼림 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지그프리트 백작(Count Siegfried)이었다. 그는 로마 시대의 주요한 2개의 도로가 합류하던 지점인 룩셈부르크의 보크 바위산에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

지그프리트 백작의 가족과 부하들이 성 주위에 모여살고, 원래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성 아래의 알제트 계곡에 살면서 점점 도시의 모습이 갖춰졌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40m 높이의 보크 포대 모습은 지그프리트 백작이 처음으로 이곳에 성을 건설한 이후 무려 스무 차례 이상 파괴되고 복구되는 역사를 거친 뒤의 모습이다.

보크 요새는 역사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유네스코 동판. 보크 요새는 역사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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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크 포대를 둘러볼 수 있는 포대의 입구로 내려가 봤다. 입구에서부터 보크 포대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임을 자랑스럽게 알리고 있었다. 1994년에 보크 포대 등 성곽을 포함한 룩셈부르크 구시가는 역사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계속 이어지는 보크 포대의 벽면을 보니 벽면마다 보크 요새의 역사가 상세하게 나열돼 있다.

룩셈부르크는 1948년에 벨기에, 네덜란드와 함께 베네룩스를 결성하고 1949년에 영세중립국을 포기하면서 남아 있던 성루와 요새, 지하통로 등을 계속 철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룩셈부르크 시티의 구시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보크 포대는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 이 훌륭한 문화유산이 허물어지지 않고 살아남게 된 과정은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아슬아슬했다.   

보크 포대의 지하통로 2km가 여행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 보크 포대 입구. 보크 포대의 지하통로 2km가 여행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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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지하에는 지하통로를 통해 여러 개의 포대가 이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미로와 같다. 보크 요새가 스페인에 점령됐을 당시인 1644년에 만들어진 거대한 지하 네트워크 유적이다. 룩셈부르크 시티가 세워진 역사 이래 조금씩 만들어졌던 지하터널을 스페인 지배시절에 모두 연결해서 길이가 무려 23km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경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절벽을 뚫어 만든 포대는 현재에도 볼 수 있듯이 암벽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남아 있다. 요새의 지하에 23km를 뚫고 포대까지 만들었으니 지구 상 어느 곳에 이런 거대한 포대가 있겠는가?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뚫어놓은 포대의 흔적이 절벽에 큰 구멍으로 남아 있다.
▲ 포대 유적.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뚫어놓은 포대의 흔적이 절벽에 큰 구멍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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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프랑스 혁명군이 반 년 동안이나 이 보크 포대를 공격했지만 낭떠러지와 절벽으로 이뤄진 보크 포대는 난공불락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탄약고로 사용되던 보크포대는 방공호로도 사용돼 수천 명의 룩셈부르크 인들이 독일 공군의 폭격을 피했다. 당시 독일군은 지하요새가 너무 거대하게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어서 요새를 폭파하면 시내 전체가 무너질 것 같아서 폭파를 포기했다고 한다.

요새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긴 했지만, 이 요새는 수세기에 걸친 군사 요새의 훌륭한 전형으로 남아있다. 현재는 지하통로의 2km만 여행자들에게 개방돼 그 당시 요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인구 50만 작은 나라의 저력

난공불락의 요새가 룩셈부르크 구시가를 에워싸고 있다.
▲ 구시가와 요새. 난공불락의 요새가 룩셈부르크 구시가를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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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불멸의 공간이요, 요새 밖은 심미주의의 공간이다. 대포의 포구 밖을 보면 계곡과 그룬드 마을의 모습이 일대 절경이다. 전쟁과 외침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됐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포대의 최상부로 다시 오르니 로베르 슈망(Robert Schuman)을 기념하는 기념 두상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난 정치가 로베르 슈망은 유럽 공동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유럽 연합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묘하게도 그의 유럽 통합 업적을 찬양이라도 하듯이 그의 기념 두상 뒤로는 신시가지의 유럽연합 건물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그의 두상을 보자 룩셈부르크 여행을 준비하면서 로베르 슈망에 대해 읽었던 자료가 생각났다. 나는 그의 업적을 읽으면서 비로소 EU의 국제기구들이 룩셈부르크에서 운영되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됐다. 룩셈부르크 출신인 로베르 슈망은 유럽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룩셈부르크를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유럽 통합을 이끌었던 그는 룩셈부르크를 윤택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 로베르 슈망 동판. 유럽 통합을 이끌었던 그는 룩셈부르크를 윤택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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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산업이 나라의 기반인 룩셈부르크는 유럽 통합을 하면서 유럽투자은행 등 유럽의 많은 은행을 유치하며 은행업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됐다. 작은 국가 규모지만 세계적 수준으로 철강업과 은행업을 발달시켜 세계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됐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사법재판소와 같은 큰 국제기구를 유치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정치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이 됐다. 강대국의 침입으로 수많은 피해를 입었던 요새 도시가 이젠 유럽 연합의 중심도시로서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리더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로베르 슈망'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는 강대국과의 균형 잡힌 외교활동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리더에 의한 외교의 힘은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지된 유럽 최고의 요새도 한낱 과거의 일로 만들고, 그 요새를 유럽 최고의 발코니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인구가 50만 명을 조금 넘는다는 룩셈부르크의 저력이 너무나 신기했다. 로베르 슈망의 동판 뒤로 유럽 기구들이 한겨울의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500 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여행, #룩셈부르크 시티, #보크 포대, #보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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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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