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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보로(Peterborough)를 찾은 건 우연이었다. 지난 6일 2016 미국 대선의 두번째 프라이머리(Primary, 예비선거)가 열리는 뉴햄프셔 시내엔 호텔이 없었다.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된 터라 경선 후보들은 물론 그들의 스텝들과 운동원들, 그리고 전국의 신문 방송사가 모두 모인 듯했다.

큰 도시는 동네 식당이나 술집만 가도 대선 후보들과 악수하고 TV서 보던 유명 앵커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미국에서 가장 '핫'한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평소 몇 배의 웃돈을 줘도 호텔 잡기는 녹록지 않았고, 결국 개인 민박을 찾아 숙소를 정한 곳이 페터보로였다.

전날 내린 폭설을 뚫고 도착한 높은 고도의 이 시골 동네는 우리나라 강원도 산골을 연상시킨다. 동네에 들어서자 휴대폰 GPS는 물론 전화도 먹통이 되어 버린다. 인구밀도가 낮고 노인 비율이 높으며 쌓인 눈을 밟으면 발목까지 빠진다. 날씨까지 추워 '여기서 무슨 선거 유세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기대 없이 버니 샌더스 페터보로 사무실을 찾기까진 말이다.

선거캠프로 '휴가' 오는 사람들

코네티컷에서 뉴햄프셔 페터보로로 자원봉사자 온 학생들
 코네티컷에서 뉴햄프셔 페터보로로 자원봉사자 온 학생들
ⓒ 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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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는 거니?"

사무실 건물을 막 나서는 일군의 학생들을 만났다.

"캔바스(Canvass, 가가호호 방문 유세). 한 500여 집의 주소를 받았는데 저녁까지 해서 갖다 줘야 해."
"이 동네 사니?"
"아니, 우리는 커네티컷에서 자원 봉사하러 왔어."

아침 9시에 마주친 이 학생들은 그날 오후 7시에 선거 사무실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아침과 달리 피곤과 추위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내일 다시 보자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케이트도 그런 사람이었다. 선거 사무실엔 서너 명의 사람밖에 없었는데 주로 젊은 사람들은 외부로 나가고 연세가 있는 분들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티셔츠는 케이트의 손을 거치며 차곡차곡 정리가 됐다. 그는 어제 이곳에 도착해 오늘이 두번째 날이라고 했다.

캐나다에서 퀘벡에서 샌더스를 돕기 위해 달려 온 케이트
 캐나다에서 퀘벡에서 샌더스를 돕기 위해 달려 온 케이트
ⓒ 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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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미국 두 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케이트는 캐나다 퀘벡의 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아무래도 이번 선거가 너무 중요한 듯해서 학교에 휴가를 내고 3시간 반 거리를 달려 왔단다. 자신과 같은 버니 지지자의 집에 묵게 됐는데 그와는 메일로만 인사하다 어제 처음 얼굴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친구처럼 마음이 너무 맞아 편안하게 잘 잤다고 한다. 휴가까지 내서 고생하러 온 이유가 궁금했다.

"여긴 나 같은 사람이 많아. 폴리티컬 베케이션(Political Vacation)이라고 부르는 중이야. 난 버니를  '키스톤 파이프 라인' 반대 시위 때 처음 알게 됐어. 캐나다 북부에서 미국 남부 휴스톤까지 3200km에 달하는 석유 파이프라인 공사를 반대하는 일에 버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앞장서 줬거든. 기업의 경제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가난한 사람과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이런 사람이 미국 같은 강대국의 대통령이 되면 좋겠어."

두 개의 국적이 있는 덕에 작년엔 캐나다에서 쥐르댕 트뤼도를 총리로 뽑았다며 올해는 꼭 버니 샌더스에게 투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농사꾼인 빈스는 전화 유세를 매우 힘들어 했다

"안녕하세요, 헬렌 피터슨인가요? 나는 빈스 마몬이예요. 버니 샌더스 자원봉사자지요. 화요일 투표는 마음의 결정을 하셨나요?"

농사꾼인 빈스는 전화 유세를 매우 힘들어 했다
 농사꾼인 빈스는 전화 유세를 매우 힘들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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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주민인 빈스는 계속되는 불친절한 반응에 얼굴이 붉어졌다. 토요일 아침에 오는 선거 독려 전화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대표적인 선거 운동 중 하나인 전화 유세 (Phonebanking)는 선관위에서 받아온 유권자 등록부를 이용해 직접 전화를 한다.

투표자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차례 차례 전화를 하는 것이다. 반응에 따라 유권자들을 분류해 결과를 예측해보고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개인 정보이기에 친절하게 받는 이가 별로 없다. 더군다나 미국에서는 받는 사람도 통화료를 내야 하기에 선거 유세 전화가 힘들 수밖에 없다. 빈스가 아침부터 마음이 안 좋은 이유다.

"아무래도 난 전화는 좀 힘든 것 같아. 저쪽에서 불친절하게 나오면 할 말을 잃어. 그냥 화장실 청소나 하는 게 좋겠어."

차로 20분 걸리는 이웃 동네 템플에서 어톰힐이라는 농장을 운영하는 빈스는 평생 지켜온 샌더스의 소신을 존경한다고 했다. 정치로 가면 여러 유혹이 많았을 텐데도 젊었을 때 가졌던 초심을 잃지 않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가 아니냐는 우문에 꼭 그렇지 않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자신은 손주가 다섯 명인 시골 농부이지만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단다. 지금까지 찍은 후보는 랄프 레이다를 비롯해 모두 인디펜던트였고 버니가 민주당 경선에 나오지 않았다면 평생 민주당과는 인연이 없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안드레아와 수잔. 수잔은 이 동네 사람인 <Granny D>의 책을 추천해줬다
 안드레아와 수잔. 수잔은 이 동네 사람인 <Granny D>의 책을 추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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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사무실 곳곳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예쁘게 만들어진 포스터와 현황판들은 모두 수잔의 작품이다. 도서관 사서 겸 그래픽 디자이너로 지난 8월부터 종종 일을 도왔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고.

1988년 남편과 뉴욕에서 뉴햄프셔로 이사 온 수잔은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에 치를 떨었다. 수술을 받아야 했던 자신의 아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서쪽 끝 오레곤까지 가서 치료해야 했던 일은 악몽으로 남아있다. 오바마케어가 도입됐다 해도 여전히 구멍이 많아 은퇴하고 싶어도 못하는 자신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도 했다. 라이베리언답게 교육 문제도 심각하다는 얘기를 했다. 비싼 학비는 가난을 대물림 하는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샌더스를 돕게 된 계기를 말하며 나에게 <그래니 디>(Granny D)라는 책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도리스 하독'이라는 할머니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10분 거리인 더블린 출신 사람이란다. 정부의 재정 개혁을 주장하며 90세 나이에 LA에서 워싱턴DC까지 2800km를 걸었던 여성 혁명가라고 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녀가 샌더스의 정치 인생에 영향을 끼쳤다며 사무실 어딘가에서 그녀의 책을 찾아와 보여주었다. 도서관 사서인 수잔은 버니 샌더스를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한다면서 <그래니 디>를 추천했고 나는 돌아가서 찾아보기로 그녀와 약속했다. 뉴햄프셔 페터부룩 샌더스 사무실에서 도리스 하독 할머니는 매우 유명 인사였다.

"샌더스가 경선에서 지면 기권할거야"

방문유세의 기본은 지도 읽기다. 동선을 잘 짜야 짧은 시간에 많은 집을 방문할 수 있다.
 방문유세의 기본은 지도 읽기다. 동선을 잘 짜야 짧은 시간에 많은 집을 방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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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가 선거 사무실에 처음 찾아왔다. 아침 일찍 코네티컷 집에서 출발했다는 그녀는 눈에 굴러도 끄덕 없을 만한 튼튼한 신발과 두꺼운 파카로 무장하고 방문 유세를 자원했다. 자신의 차가 있으니 활용하라는 얘기였다. 문제는 GPS도 안돼 지도만으로는 동네를 헤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전화 유세를 포기한 빈스가 운전을 하겠다고 한다. 화장실 청소보다는 나을 것 같아 보여 나도 합세해 총 세 명이 빈스의 트럭에 올라탔다.

방문 유세의 기본은 지도 읽기다. 동선을 잘 짜야 짧은 시간에 많은 집을 방문할 수 있다.

그런데 역시나…. 동네를 꿰뚫고 있는 농부 빈스 덕에 길 잃고 헤매는 고생 없이 사람들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다 은퇴했다는 데보라는 능숙한 솜씨로 씩씩하게 낯선 동네의 낯선 대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드문드문 떨어진 집들 중 다섯 집에 한 집 정도에만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허탕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에서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오면 그것처럼 힘 빠지는 게 없다. 그것보다 데보라를 더 화나게 하는 상황도 있다.

"우이씨… 글쎄 자기는 트럼프를 찍겠대. 트럼프가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든대나 뭐래나. 이거 미친 거 아냐."

우리는 데보라를 달래며 결과지에 '공화당 지지자'라고 체크했다. 어느 집에선 집주인과 길고 심각하게 얘기를 했는데, 자신은 버니 샌더스가 좋긴 하지만 결선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걱정돼 힐러리를 찍겠다고 했다. 데보라의 신념에 찬 설득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데보라와 빈스 모두 경선에서 샌더스가 떨어지면 '기권'하겠다고 했다. 공화당이 어부지리를 얻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에겐 힐러리는 공화당 주자들과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기득권을 대변하는 똑같은 정치인이라는 느낌이었다. 만약 힐러리가 경선에서 이긴다 해도 데보라와 빈스 같은 열정적인 샌더스 지지자들을 끌어오지 못하면 매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텔리전트(intelligent, 똑똑한)'한 정치인 힐러리에게 상원의원 샌더스와 그 지지자들은 계륵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샌더스톰, 뉴햄프셔 승리를 만들다

뉴햄프셔 페터브룩 선거 사무소의 자원봉사자들
 뉴햄프셔 페터브룩 선거 사무소의 자원봉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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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뉴햄프셔에서 기자 브리핑하던 샌더스는 '쿵' 소리에 움찔했다. 연단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기절한 것이란 걸 알자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한 동영상은 조회 수 10만 이상을 기록했다. 아직 지지율이 1% 미만이던 지난해 5월, MSNBC <레이첼 쇼> 진행자가 "당신의 자원봉사자가 10만 명이라고 하던데"라고 묻자, 샌더스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오늘까지 17만5000명이 됐어."

샌더스에게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두 개의 사건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말해준다. 미국에서 43번째로 작은 주 뉴햄프셔엔 페터브로 같은 버니 샌더스 선거 사무실이 14개가 있었고, 그 곳엔 한 명의 유급 직원을 제외하곤 모두 자원봉사로 꾸려졌다. 돈이 아닌 꿈과 열정으로 움직이는 버니 샌더스의 자원봉사자들을 '샌더스톰(Sanderstorm, 샌더스와 폭풍의 합성어)', '샌더스 폭풍 기병(Sanderstormtroopers)'라고 부르기도 한다.

뉴햄프셔에서 민주당원과 일반 유권자 합쳐 60.40%을 표를 얻은 샌더스의 열풍 뒤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폭풍처럼 애쓰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 국가는 재벌이 아닌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의 갈망이 나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뉴햄프셔 승리 이후 샌더스의 연설처럼, 들불 같은 이 갈망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 2016년 미 대선의 관전 포인트이다.

[이전기사]

① 로봇? 제2의 오바마? 논란에도 공화당 주류가 미는 이 사람
② "조지 부시 찍은 내가 샌더스 지지하는 까닭은..."


태그:#버니샌더스, #뉴햄프셔,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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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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