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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최근 종영된 <응답하라 1988>의 선풍적 인기 역시 추억이라는 감성이 자극된 게 아닐까? 드라마를 보며 겨울이면 군불로 달궈진 아궁이에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 먹던 추억을 떠올렸다. 시청자들 역시 아련하지만 고향의 향수를 추억하지 않았을까?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를 외치며 누군가에게 1988년 옛 시절의 이야기를 자랑삼아 한 사람들도 있을 게다.

사람들의 추억처럼 동물들도 과거를 회상한다면 1988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2015년 11월 대전환경운동연합은 갑천에서 천연기념물 243호이자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된 흰꼬리수리를 확인했다. 흰꼬리수리는 2월까지 무사히 갑천 유역에서 월동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멸종위기종 흰꼬리수리가 27년 전 갑천을 추억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1988년 갑천을 찾은 흰꼬리수리 눈에 보이는 갑천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풍요롭다. 하천을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와 누치 떼를 쉽게 사냥할 수 있다. 천변에 빼곡하게 자란 갈대와 달뿌리풀은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가림막이 되었다. 커다랗게 자란 수양버들은 먹잇감을 찾는 전망대가 되어 주었다. 하천에 만들어지는 섬 하중도는 천적인 삵과 담비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다. 주변의 넓은 농경지는 동료인 참매와 새매의 먹이터였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간 갑천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지만, 풍요로운 안전하게 겨울을 보낸 갑천으로 기억하며 봄에 시베리아로 떠난다.'

사람을 위해 개발된 하천, 흰꼬리수리는 어쩌나

흰꼬리수리의 비행 모습
▲ 지난 2015년 11월 갑천에 찾아온 흰꼬리수리 흰꼬리수리의 비행 모습
ⓒ 이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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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낮아 오·폐수 방류로 발생했던 수질사고는 줄었다. 하지만 현재 갑천의 하천의 지형은 흰꼬리수리의 생태계에 더 치명적으로 변했다. 88년 약 93만이던 대전의 인구는 약 153만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급격한 도시팽창은 참매와 새매의 먹이터였던 산과 들을 도시로 바꿨다. 넓은 평야 지대였던 둔산과 유성은 수십 층짜리 아파트와 상가들로 변해 참매와 새매는 자취를 감췄다.

흰꼬리수리의 바람막이가 되었던 갈대와 달뿌리풀이 자라던 하천변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축구장과 야구장, 주차장, 심지어는 골프장까지 들어섰다. 하중도는 대형 시멘트 구조물인 보에 수몰되었고, 버드나무는 하천관리를 핑계로 아름드리 나무마저 베어지기 일쑤다. 사람들의 시선에만 맞춰 만들어진 갑천은 이제 흰꼬리수리에게 풍요롭고 안전한 곳이 아니다. 인간의 이기심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일 뿐이다. 그 때문에 흰꼬리수리는 갑천을 수년 간 찾지 않았다.

흰꼬리수리의 사냥터이자 쉼터를 사람들이 점령한 것이다. 하천이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흰꼬리수리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작 새 한 마리'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였을 뿐이다. 갑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하천은 이제 사람들만 편하게 이용하는 공원으로 바꿨다.

사람들의 하천개발로 쫓겨난 흰꼬리수리는 이제 멸종위기에 처했다. 멸종위기에 처하면서 흰꼬리수리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집에서 자식을 내쫓아 놓고 미아 신고를 한 꼴이다.

야생동물에도 관심을

갑천 흰꼬리수리가 비행 중이다.
▲ 2월 확인된 갑천의 흰꼬리수리의 모습 갑천 흰꼬리수리가 비행 중이다.
ⓒ 이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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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의 흰꼬리수리는 1988년의 풍요를 느낄 수 없다. 모든 환경이 흰꼬리수리에게는 불리한 환경으로 변했다. 이대로 갑천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흰꼬리수리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다. 흰꼬리수리가 갑천에서 지내려면 최근 몰아닥친 시베리아 한파와 파괴된 자연으로 인한 고통까지 맨몸으로 감내해야 한다.

하천 주변이 모두 도심으로 개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흰꼬리수리 월동지역 하천 주변이 모두 도심으로 개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온라인 지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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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꼬리수리가 갑천에서 풍요를 느끼려면 한파를 피할 갈대와 달뿌리풀 군락지 생겨야 한다. 또한 대형 보의 수문을 열어 하천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숲과 습지일 일부라도 복원한다면, 흰꼬리수리는 갑천의 기억을 바꿔 갈 것이다.

수문 개방은 실제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하천에 인위적인 간섭을 중단한다면 갑천은 스스로 복원된다. 한파로 고통 받는 이웃에게 가장 많은 손길이 전해지는 시기다. 이런 관심을 자연에도 조금만 나눠달라고 한다면 무리일까?

자연에서 홀로 버티며 살아가는 야생동물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흰꼬리수리에게 1988년의 풍요로운 기억을 물려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중도일보>에 기고한 글의 내용을 추가·보완해서 올립니다.



태그:#갑천, #흰꼬리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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