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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 단원고등학교 졸업식인 12일 오후 경기도 안산 단원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학년 2반 고 김수정 학생의 어머니가 딸을 그리워하며 책상에 놓인 꽃다발과 선물을 바라보고 있다.
▲ 딸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 단원고등학교 졸업식인 지난 1월 12일 오후 경기도 안산 단원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학년 2반 고 김수정 학생의 어머니가 딸을 그리워하며 책상에 놓인 꽃다발과 선물을 바라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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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 (인권교육센터 '들')

#0.

가족처럼 함께 일할 분을 찾는다는 흔한 구인광고,

이모팬, 삼촌팬을 자처하는 아이돌 팬덤,

영화 국제시장,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또 하나의 가족'을 내세우는 삼성,

경기도 마을 돌봄공동체의 브랜드명인 '온마을 엄마품'…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가족의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여기저기 다 가족이고 누구나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언니, 오빠, 형, 누나가 된다. 우리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일이 뭐 그렇게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성-여성의 젠더 위계, 어른-아이의 나이 위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불평등한 조직이다. 가족은 이런 권력 관계와 역할을 중시하면서 가족 구성원 개인을 지워버린다. 개인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가족이라는 조직 안에서는 하나하나의 개인을 온전히 존중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라는 요구만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권력의 위계질서가 가족이라는 조직을 유지하는 뿌리가 되고 있다.

#1.

딸을 출산한 후, 이 사회는 나에게 엄마/아내로서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같았다. 어디를 가도 가족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편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딸과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엔 특히 그랬다. '아유~ 애기 옷이 너무 얇네, 발목이 다 나왔네, 모자를 씌워야지, 안 그러면 감기 걸리는데'를 시작으로, 괜찮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기어코 사탕을 손에 쥐어주는 사람, 애가 귀엽다며 쓰다듬는 사람, 덥석 아기나 나를 붙잡고 여기 앉으라고 끌어 대는 사람……. 물론 그 이들이 베풀었던 것은 호의였을 테다.

2013년 11월에 진행되었던 밀양희망버스에 나는 아이를 데리고 함께 탔다. 거기서도 숱한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딸이 걷고 뛰며 행렬에 함께 있으면 애기가 힘들겠다거나, 기특하다며 말을 건네고, 내 등에서 딸이 잠들면 아이를 태울 차를 마련해주려던 이들이 많았다.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딸이 힘들건, 지치건, 잠이 들건 간에 '아, 그냥 내버려 두지…….'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세 살 된 여자 어린이와 동행하는, 나 같은 희망버스 탑승자는 연대하러 간 시민이 아니라 그저 엄마로만 여겨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이들이 베풀었던 것도 역시 호의였을 것이다.

그 많은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베풀어준 그들의 호의는 내가 바랐던 것이기보다는 그 이들이 해주고 싶었던 것일 테다.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도와주고 싶거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 아니면 누구 아이든 우리가 함께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말이다. 그저 내가 도움을 요청할 어느 때에 성심껏 대안을 고민해주는 정도의 응답이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었다.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대상이 정말 어떤 필요가 있을지 헤아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궁금했다. 넘치는 관심은 접어두고,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응답하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걸까?

2013년 12월부터 한동안 '안녕들 하십니까' 벽보가 큰 화제를 이루던 어느 날 조그만 벽보가 고대에 붙었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인터넷과 SNS에서는 온통 감동적인 응답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고려대 학생들의 엄마인지, 어떤 세상이든 그것을 왜 당신이 물려주었어야 했는지 말이다. 이런 나의 반응에 몇몇 친구들은 엄마로 산다는 일이 나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며 농담 섞인 걱정을 해 줄 정도다.

#2.

사실 나는 '세월호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냉정함과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써오고 있고,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재난 참사를 대하는 시민의 자세'라는 문서를 토론을 통해 함께 만드는 와중에도 끝없이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는 것과 분노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게다가 세월호 운동에 함께 한 일이 있다면 아주 가끔 집회나 광화문 농성장에 배꼼 다녀오고,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2차 전체회의'에 참여했던 것 정도일 뿐이니 이런 내가 뭔가 말을 보탠다는 것은 사실 염치 없는 일이다.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어떻게 다르겠냐고 말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2014년 7월 15일로 기억되는 국회 앞 세월호 미사에 참여했을 때, 유가족 한 분이 "내 몸 같은 자식을 잃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듯이 자식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뭐가 두렵겠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뒤론 다른 어떤 얘기들도 들리지 않았다.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테지만, 이 슬픔을 '부모들'의 슬픔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친구들의 걱정대로 '엄마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유가족의 절규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부모/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호출하는 것 같았다. 그분의 절규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후 내내 인터넷에 오르는 기사나 SNS의 글들이 대부분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마음으로 슬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고집스럽게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했고 나를 아는 한 지인은 이런 냉정함을 어색해 하며 말했다.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 마.'

#3.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분리해서 생각하겠다는 내 마음은 세월호 운동에서 참사의 당사자를 청소년으로 설정하고, 그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과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세월호 참사 당사자의 대다수를 청소년이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476명의 탑승자 가운데에는 비청소년 탑승객, 승무원,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세월호 안에 타고 있었고, 304명의 실종/사망자 말고도 170여명의 생존자들이 있다. 게다가 '나도 세월호의 승객'이라며 참사를 함께 경험한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당사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을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로 부르는 일은 최근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여러 아동학대로 인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괴물 같은 나쁜 부모' 탓으로 돌리며 공분하는 것과도 닮아 있다. 계모/계부가 문제라거나, 가르치려고(훈육을 위해)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이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거나,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느냐는 논란, 그래서 부모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논의들은 아동 학대가 그저 약자인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의 문제라서 그 가해자는 친부모, 가족, 형제자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그리고 그런 폭력으로 희생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애도도 쉽게 건너뛰거나 잊어버린다.

비슷하게 가족 동반자살 사건들의 경우도 실상은 자녀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살하는 사건이기 쉬운데, 이때 자녀인 어린이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마저 없는 존재,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같이 논의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온전한 가족구성원은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부모들의 슬픔'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를 고민하면서도 청소년들을 하나의 온전한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게 할 위험을 여전히 안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학교에서 여전히 저지당하고 있으며, 청소년 생존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할 기회를 이제야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

#4.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런 고민은 내 일상 구석구석과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키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존재를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늘 나를 뒤흔든다. 자발적으로(?) 만든 '가족'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에게 부여되는 역할에 대한 억울함이 끝없이 치고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같이 살아야 하니까, 어린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서 돌봄, 육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정말 그날그날의 숙제 같기만 하다.

그런 육아의 고민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라는 듯이 최근 몇 년 동안 회자되고 있는 말이 있으니 바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다. 예전에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서 자연스레 육아의 부담을 온 가족이 나누었지만, 단일 가족이 대부분인 요즘 부모에게만 몰리는 육아 부담을 지역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자는 취지란다. 그래서 마을 돌봄이 중요하고, 내 자녀만 보이는 좁은 시야를 넘어 우리 (동네)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돌보자는 것이다.

"육아라는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만나고 마을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 형성된 이웃 관계망이 다시 내 아이가 살아갈 삶의 공간이 된다. '내 새끼'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새끼'로 나아가고, '동네 아이들'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내 아이도 잘 자랄 것이다. 이렇듯 마을에서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웃과 마을을 재구성함으로써, 종국에는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한다." - <'내 새끼'가 '우리 새끼'로!>, 유창복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장, 2015. 05. 01, 프레시안

마을 공동체를 꾸리자고 아무리 제안을 해도 어느 부모는 그 공동체에 함께 하지 않겠노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좋은 걸 왜 마다하느냐고 타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그 이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선택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동체의 구성원이 온 마을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마을 각 가정의 자녀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묶음으로 움직인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렇게 그 마을의 자녀들은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버리고 동시에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 없이 많은 엄마 아빠들이 생긴다. 아버지, 어머니뻘/ 할아버지뻘/ 언니 오빠뻘 된다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호칭을 정리하는 사회에서 가족 같은 연장자 앞에서 자유롭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일 동등한 관계를 맺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디를 가도 엄마의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들 모두는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고 살 수 있을까.

가족주의의 시선을 담고 있는 이런 '말 잘 듣는 아이'에 대한 '운동사회(?)'의 판타지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드러난다. 게다가 이게 왜 문제인지 아무도 고민하지 않아서 더욱 문제적이다. 강정, 밀양을 위시한 다양한 싸움의 현장,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에 찾아가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속을, 아니 고민할 시간도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온 호의어린 칭찬의 말 한마디를 이제는 고민해보자.

일상적으로는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주체, 동료시민으로 청소년을 대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때에만 '너희들의 의견도 중요하지, 한마디 해줄래?' 하며 말을 걸고는 필요한 말, 듣고 싶은 말만 골라내는 것은 제대로 듣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기억교실 문제에 대한 논란 속에서 청소년의 입장이 없는 게 문제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흔쾌히 맞장구치기 어렵기도 하다.

온 사회, 온 마을이 다 가족이 되는 사회를 넘어서는 것을 세월호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세월호 운동'의 지향으로 고민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글을 써 보낸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라고 다그치는 가족 같은 사회 말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에 대해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논의하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여정은 더 힘들 테지만 말이다. 덧붙여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일상의 삶과 관계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자는 요청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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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5년이 넘었는데도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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