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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인 유스호스텔 가는 길, 보크 포대에서 바라본 룩셈부르크 시내의 야경. 가파른 절벽 위아래로 선 옛 건물들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 요새도시 룩셈부르크의 야경 숙소인 유스호스텔 가는 길, 보크 포대에서 바라본 룩셈부르크 시내의 야경. 가파른 절벽 위아래로 선 옛 건물들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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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예정대로 7시 50분에 정확히 도착했지만, 룩셈부르크 중앙역에서 나오는 순간 내 시계를 의심했다. 명색이 룩셈부르크로 통하는 유일하다시피한 관문인데, 새벽 어시장의 파장 분위기처럼 썰렁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할 요량으로 들른 역 구내 식당은 의자가 탁자 위에 뒤집힌 채 놓여 있었고, 주전부리를 파는 매점도 종업원이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다는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동안 어떻게든 요깃거리라도 챙겨둘 걸 그랬다. 기차엔 우리나라처럼 객실을 오가며 승객들에게 주전부리를 판매하는 사람이 있긴 했다. 우리처럼 이동식 카트에 담아 끌고 다니지 않고 큼지막한 꾸러미를 허리춤에 찬 모습이 언뜻 우스꽝스러웠는데, 과자와 음료 정도를 담아 팔고 있었다.

거기엔 놀랍게도 뜨거운 커피를 담은 온장고와 캔 맥주 등을 보관하는 아이스박스까지 달려있다고 했다. 설마 싶어 캔 맥주를 시켜봤는데, 꺼내자 캔 표면에 물방울이 살짝 맺힐 만큼 차가웠다. 아무튼 그저 재밌는 볼거리로만 여겼는데, 그가 아이에게 다가가 정말 싸고 맛있는 거라며 자랑해댄 와플 몇 개 사두지 않은 게 후회된다.

"숙소 가려면 9번 버스 타야 하는데..." 당혹스러웠다

이동식 카트가 아니라, 간식과 음료를 가득 담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찬 모습이 이채롭다.
▲ 룩셈부르크 가는 기차 안 이동식 카트가 아니라, 간식과 음료를 가득 담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찬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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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나오니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도로 위를 이따금 오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버스 정류장의 운행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역 광장을 에워싼 모든 상가의 불이 꺼져버렸다. 그 흔한 카페 하나쯤은 보일 법하건만 아무리 둘러봐도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할 초저녁인데 말이다.

허기를 채우기 전에 당장 숙소 찾아가는 게 급선무가 됐다. 기우일 테지만, 이러다 버스까지 끊기면 어쩌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곧장 역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여행 계획을 짠 중1 아이는 마치 음성 안내를 하는 기계처럼 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읊었다. 지금껏 교통편에 관한한 어느 곳을 가든 그는 늘 그렇게 우리를 안내하고 이끌었다.

"숙소에 가려면 역에서 나와 오른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타고 룩셈부르크 유스호스텔 정류장에서 하차 후 계단 길로 100미터 내려가면 되요. 버스 요금은 어른이 2유로인데, 청소년이나 어린이 요금은 적혀 있지 않아서 몰라요."

사실 그의 머릿속엔 여행안내서에 수록된 정보가 빠짐없이 담겨있다. 몇 달 전부터 표지가 너덜거릴 정도로 반복해 읽고 또 읽어서 내용을 속속들이 암기할 정도가 됐다. 그런 자신감에선지 책이 부피도 크고 무겁다면서 배낭에 넣어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돌발 상황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가 일러준 대로 버스 정류장에 섰으나 9번 버스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시내버스라면 배차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을 텐데 싶어, 노선별 전광판을 일일이 확인해보았는데 그 어디에도 숫자 9는 보이지 않았다. 출발 대기 중인 다른 버스 기사들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알아듣지 못할 말만 건네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시간은 오후 9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 숫자 9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버스가 정류장 너머 도로에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서 있었다. 부리나케 뛰어가 일단 올라탔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심정으로 룩셈부르크 유스호스텔에 가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기사는 다짜고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 탔다는 건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아이의 말에 선뜻 내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고, 기사도 어쩔 줄 몰라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버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통역을 자처했다. 버스엔 영어로 된 안내방송이 없을 뿐더러 기사들 중에는 영어에 익숙한 분들이 많지 않다면서, 외려 여행에 불편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기사와의 프랑스어 대화가 끝난 후, 그는 자상하게 그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우선 기차역에서 유스호스텔 가는 버스 노선은 9번과 14번, 두 개이며 10여 분 간격으로 자주 있다고 했다. 또, 기사에게 유스호스텔이라고 말하면 잘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알트문스터'에 내려달라고 해야 한다고도 했다. 기사 또한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고맙다는 뜻일 게다.

그녀는 당장 밤길이 어두워 이름이 보이지 않을 테니, 자신이 내리고 나서 두 정거장 뒤에 내리라는 깨알 같은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밤늦도록 기차역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서 하마터면 그녀를 따라 내릴 뻔했다. 그녀는 내려서까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Enjoy!"

가이드북 정보 100% 신뢰할 수 없었던 여행

룩셈부르크에서의 '첫 경험'은 여행안내서에 실린 정보도 100% 신뢰할 순 없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세계의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유스호스텔행 버스는 노선이 두 개고, 기차역의 오른쪽 정류장이 아니라 정면 좌측에 있는 도로변에 선다는 것.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일지 모르나, 우리처럼 캄캄한 밤에 도착한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정보일 수 있다.

또,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직원을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된 덤이지만, 유레일패스를 소지하고 있는 여행자들에게는 룩셈부르크 시티 내 버스가 무료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물론 이런 내용도 여행안내서에는 없었다. 아이의 말마따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시중에 판매하는 수많은 여행안내서 중 룩셈부르크 관련 부분은 하나같이 똑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서로 보고 베낀 것처럼.

다들 최신 개정판이라고 적었지만, 백 보 양보해서 교통정보가 책이 출간된 직후 달라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출판사마다 입을 맞춘 듯 누락되거나 틀린 정보마저 똑같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지나친 억측일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론리 플래닛>이나 <미슐랭 가이드> 등 외국 책의 내용을 그대로 우리글로만 번역해 놓은 '짝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룩셈부르크 여행의 대표적인 볼거리인 아돌프 다리는 현재 공사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할 뿐더러 가림막을 쳐놓아 실제 모습을 볼 수도 없다.
▲ 2년째 공사중인 아돌프 다리 룩셈부르크 여행의 대표적인 볼거리인 아돌프 다리는 현재 공사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할 뿐더러 가림막을 쳐놓아 실제 모습을 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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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최고의 볼거리라는 아돌프 다리 역시 정확한 정보가 아쉽다. 책마다 완공 당시 석조 아치형 다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며, 다리 위에 서면 요새 도시인 룩셈부르크의 최고 전망을 즐길 수 있다고 추천했지만, 현재 전면 공사 중이라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접근은커녕 높게 가림막을 쳐 놓은 상태여서 다리의 모습조차 구경할 수 없다.

공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게 2014년 3월이라고 하니,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금지된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중요한 정보가 '2015~2016 최신판'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2년도 더 지난 여행 정보조차 수정되지 않은 책을 두고 '최신판'이라며 버젓이 광고하고 판매하는 뻔뻔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룩셈부르크에서 이틀간 머무는 동안, 여행안내서의 부정확한 정보로 괜한 헛심 쓰는 일을 몇 차례 겪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에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도시다. 그중에서도 독일과 국경이 맞닿은 곳에 자리한 비안덴 성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손바닥만한 도시 국가인 룩셈부르크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걸어 오른 후 하릴없이 반나절을 보낸 곳이다.

비안덴 성 입구에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의 작품으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 뒤 산꼭대기에 자리한 성이 바로 비안덴 성이며, 흉상 건너편에는 빅토르 위고가 이곳에서 망명 생활 중 자주 찾았다는 식당이 있다.
▲ 비안덴 성 입구의 빅토르 위고의 흉상 비안덴 성 입구에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의 작품으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 뒤 산꼭대기에 자리한 성이 바로 비안덴 성이며, 흉상 건너편에는 빅토르 위고가 이곳에서 망명 생활 중 자주 찾았다는 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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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랫마을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일흔의 나이에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그가 살았던 집이 성 오르는 길목에 남아있다. 바로 집 건너편 그가 즐겨 찾았다는 식당은 '미슐랭 가이드'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한 맛집이다. 식당 앞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이 만들었다는 그의 흉상이 고개를 떨군 채 마치 죄인처럼 매달려 있다.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갇혀 있을 법한, 빗자루를 탄 마녀가 튀어나올 듯한 중세의 퇴락한 성이지만, 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을 끌어안고 호령하는 듯한 권위가 여전하다. 분명 유서 깊은 유적인데도 성 아랫마을의 일상은 비안덴 성에 기대어 있진 않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이 조금도 요란스럽지 않고, 시간마저 느리게 가는 듯한 예쁜 풍경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성 안 소담한 카페에서 따스한 한줌 햇볕을 쬐며 먹었던 토마토 수프를 잊지 못한다. 또,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식당에서 맛깔스럽게 차려낸 송어구이는 내가 기억하는 한 최고의 점심이었다. 음식을 받아든 순간, 포크를 들기 전에 그 맛과 차림새에 적당한 형용사가 없을까 고민까지 했다. 그야말로 '품위 있는' 음식, 아니 예술이었다. 그것도 가격이 16유로에 불과했다.

비안덴 성을 알게 된 건, 중년의 한 엄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유럽 여행의 추억을 담담하게 풀어낸 어느 여행기를 우연히 읽고서다. 만 두 해 전에 출간된 것이지만, 그 책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직접 다녀와 보니 교통편 등 정보도 나름 정확했다. 비안덴 성은 룩셈부르크를 소개한 그 어떤 여행안내서에서도 읽어보질 못했다며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안덴 성 오르는 길가로 예쁘게 꾸민 집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언뜻 동화 속 풍경 같은데,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 비안덴 성 아랫마을의 풍경 비안덴 성 오르는 길가로 예쁘게 꾸민 집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언뜻 동화 속 풍경 같은데,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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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네룩스, #여행안내서,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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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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