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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메트로
 파리 메트로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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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네(Carnet) 한 묶음을 샀다. 지하철과 버스로 어디든 갈 수 있다. 빳빳한 티켓 열 장과 알록달록한 파리 시내 노선표가 곱게 접혀 담겨진 빨간색 비닐 팩을 받아들었다. 폼 난다. 뿌듯하다.

카르네는, 낱장에 1.75유로인 티켓 10장을 14.1유로에 사는 교통 패스이다. 3유로 남짓, 우리 돈으로 4천 원 쯤 절약하는 셈이다. 여행객은 숫자 앞에 긴장한다. 카르네 말고도 파리 비지트(Paris visite), 모빌리스(Mobilis), 나비고(Nabigo) 등이 더 있다. 체류 기간과 이동 경로에 따라 적당한 유형을 골라야 한다. 현명한 선택에 대한 압박감에 정작 중요한 시간을 버리는 일도 왕왕 벌어진다.

파리 시내 동남부 13구에 있는 파리7대학에 가는 길이다. 연초록색 6번 메트로로 베르시 역까지 열한 개 역을 가고 거기에서 14번 보라색 메트로로 갈아탄 뒤 두 개를 더 가면 된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베르시까지는 15분이 걸린단다.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가라며 굳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을 해댄다.

"저기 저 연초록색을 타라는 거지?"
"응 그래, 맞아. 행운을 빌어."


파리지엔 역무원의 행운을 등에 업고 발걸음도 경쾌하게 한 층을 내려갔다. 티켓을 개찰구에 넣으며 아주 잠깐 심장이 콩닥거린다. '제대로 산 거 맞겠지? 메트로 노선을 잘못 들어선 건 아닐까?' 고개를 들어 머리 위 안내판을 한 번 더 올려다본다. 동그란 원 안에 M 자와 연초록색 숫자 6을 확인한 순간 덜커덩 문이 열리고 내 몸은 이미 안쪽으로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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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를 뺀 파리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서울 면적 6분의 1, 그 작은 도시 파리에 메트로 노선이 14개, 교외 전철이 5개다. 역과 역 사이가 촘촘해서 기껏 지하철을 타고 내려 좁고 긴 통로를 오르락내리락 뚫고 나와 보니 허망하게도 이전 역이 바로 조기 옆에 보이는 경우도 있다. 

런던은 1863년, 뉴욕은 1868년에 개통되었으니, 1900년 만국박람회에 맞춰 개통된 파리 메트로는 채 120년도 안 된 '새것'인 셈이다. 물론 1974년 처음 개통돼 이제 겨우 40년 된 우리 것에 비할 바이겠는가마는.

산업화와 도시 개발이 일찍 있었던 데 반해 메트로 개통이 이리 늦어진 것은 '지상철'이냐 '지하철'이냐의 기본 콘셉트 결정에 20년이나 소모된 까닭이다. 도시의 경관 보호, 옛 건물의 유지와 안전 문제 등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은 만큼 결정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파리의 지하철 건설을 지휘한 엔지니어 풀장스 비앙브뉴(Fulgence Bienvenue, 1852~1936)는 '메트로의 아버지'라 불린다. 1887년 공사를 시작해 1900년 개통한 1호선부터 이후 30여 년간 파리의 지하철은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파리 시 남부 여러 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몽파르나스-비앙브뉴(Montparnasse–Bienvenüe) 역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이름이다. '비앙브뉴(bienvenüe)'는 프랑스어로 '환영'을 뜻하니, 파리를 찾는 이들은 그의 환대를 거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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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에 기여한 또 다른 인물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르누보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가 있다. 파리 16구의 주택가, 특히 라퐁텐 거리와 모차르트 거리에 그가 디자인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메트로의 지상 입구 디자인으로 더 낯익다.

풀과 나무, 나비와 잠자리 등을 모티프로 한 춤추는 듯한 초록색 철제 장식은 파리 메트로의 상징적 조형물이다. 특히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몽마르트르 지역의 아베스(Abbesses) 역과 서쪽 지역 2호선 끝자락 포트 도핀(Porte Dauphine) 역의 구조물은 원형 그대로다. 

어두운 지하로 걸어 내려가는 일이 처음부터 즐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땅 속을 달리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 속에 몸을 싣는 일은 어쩌면 공포였을 수도 있겠다.

이 모든 일이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에 기마르의 디자인이 일조했음에 틀림없다. 개통 첫 날 3만 장으로 시작해 단 5개월 만에 1600만 장이나 메트로 표가 팔렸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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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좁은 통로를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가면 아치형 터널의 천장과 벽면을 덮고 있는 새하얀 타일을 만난다. 어두운 지하의 조도 확보와 청소, 전염병 예방 등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흰색 타일을 사용했던 것인데, 지금은 전염병도 조명도 걱정할 필요 없고 오히려 보수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여전히 옛 디자인을 고수 중이다.

오래된 것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고집은 지하철 문 앞에서도 맞닥뜨린다. 내려야 하는 역인데 문이 열리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옆으로 힘차게 젖혀야만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21세기 신인류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차량의 연결도 심란하다. 이쪽 차량과 저쪽 차량은 까만 고무 패킹 같은 것으로 이어져 있는데, 굴곡이 심한 터널 속을 달릴 때면 접혔다 펴졌다 하는 모양새가 영 불안하다. 앞 차량이 열을 내서 달리기라도 하면 뒤에 매달려 가고 있는 나를 실은 이쪽 차량은 자칫 툭하고 떨어져 나와 그 컴컴한 지하 터널에 내동댕이쳐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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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METRO' 표지, 노란 바탕에 'METROPOLITAIN'라 쓰여 있는 매혹적인 청동 조형 입구, 미로처럼 얽혀 이어지는 좁은 통로와 계단, 아치형 터널의 새하얀 타일 벽, 파란 직사각형 표지판 위의 낯선 글자들, 꼬불꼬불 굽이치는 철로, 지저분하고 매캐한 오래된 냄새. 

땅속을 달리면서도 늘 열려 있는 창문들, 접거나 펼 수 있는 의자, 빨간 버튼과 스테인리스 레버, 방금 막 버터에 굴린 듯한 안내 방송의 현란한 발음, 악사들의 전자 기타 연주, 여행객들의 발그레한 표정과 무심하고 지친 파리지앵의 얼굴들.

100년도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이곳에 머물렀을까. 많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인 낡고 오래된 이 지하철은 어쩌면 우리를 백 년쯤 전으로 실어다 줄지 모른다. 파리의 메트로는 오늘도 기억을 담고 시간 속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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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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