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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부서진 청도읍성(왼쪽)과, 1909년 이토 히로부미에 끌려 청도를 방문한 순종이 기차를 타고 지나갔던 와인 터널(대구와 청도 사이의 폐쇄된 철로 터널을 재활용하여 2006년 개장)
 임진왜란 때 부서진 청도읍성(왼쪽)과, 1909년 이토 히로부미에 끌려 청도를 방문한 순종이 기차를 타고 지나갔던 와인 터널(대구와 청도 사이의 폐쇄된 철로 터널을 재활용하여 2006년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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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 시험이나 장사 일로 한양에 가야 하는 부산 사람들은 경북 청도, 대구, 새재를 통과하는 '영남 대로(大路)'를 걸었다. 1909년 1월,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을 이끌고 대구, 마산 등지를 돌아다녔을 때, 청도는 그들이 기차에서 내려 민중과 만난 중간 역 역할을 했다. 순종이 오갔던 대구와 청도 사이 기차굴은 2006년 3월 '와인 터널'로 탈바꿈했다.  

과거 보는 선비, 순종, 일본 침략군이 두루 지나다닌 청도

1592년 4월 20일, 청도는 일본 침략군들이 북상하는 통로가 되었다. 고려 시대 이래 존재했던 청도읍성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군수와 관군이 일찌감치 달아나버린 탓에 아무런 무기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버려졌던 백성들은 침략군의 잔혹한 먹잇감 신세로 전락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의병으로 일어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향토를 지켜야 했다. 

청도의 한 가문에서는 14명이 되는 의사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의병으로 활동한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경북 청도 용강서원 전경.
 청도의 한 가문에서는 14명이 되는 의사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의병으로 활동한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경북 청도 용강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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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중략) 거족(巨族)으로 명망있는 사람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의를 부르짖으며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들이 격동하여 응모하였다. (중략) 흩어진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6월 조의 기사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하지만 실록의 기사는 타당한 기술로 인정하기 어렵다. '흩어진 민심과 국가의 명맥이 이(의병)에 힘입어 유지되었다'는 표현은 사실과 일치하지만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의병들이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관군도 조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장이나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기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의병은 자발적 봉기, 조정 지시에 따른 창의로 보기는 어려워

<신편 한국사>는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의병이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자발적인 의병의 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좀 더 읽어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부 용감한 수령은 적은 병력으로 굳세게 저항하였으나 대부분의 수령들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아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중략) 관군이 무너짐에 따라 지방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거족이나 명망가는 지위의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기를 목전에 느꼈다. 이러한 위기감에서 지방의 거족·명망가는 산중에 피란 중인 농민을 위시하여 천민에 이르기까지 의병진 참가를 호소했고 이러한 의병의 부르짖음에 민중들은 자진하여 참가하였다.'

14의사를 기리는 용강서원의 외삼문
 14의사를 기리는 용강서원의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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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이서면 모산길 45-4에 있는 '용강(龍岡)서원 충렬사(忠烈祠) 및 14의사 묘정비(廟廷碑) '는 청도 지역의 창의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129호인 이 유적은 고려 때 예부시랑, 중서령 등을 지내면서 왜구와 여진 토벌에 많은 공을 세우지만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한 밀양박씨 문중의 현조(玄祖) 충숙공 박익(朴翊, 1332∼1398)과 임진왜란 14의사를 제향하고 있다.

한 가문에서 14명이나 되는 의사가 창의, 공신 책봉

용강서원의 첫 인상은 '대단하다!'로 요약된다. 작은 농촌 마을에서 이처럼 규모가 큰 고택 집단과 마주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애초부터 용강서원이 지금처럼 웅장하게 건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용강재(龍岡齋)라는 이름의 재실 건물이 1780년 세워졌다. 그 후 1816년 충열사(忠烈祠)로 개편된 용강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었다가,  1913년 다시 용강서당으로 살아난다. 서당이 용강서원으로 승격, 개명되는 때는 1935년이다.

용강서원 강당
 용강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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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과 용강서원 입구 안내판은 '14의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밀양·청도·경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밀양 박씨 가문의 14분으로 모두 부자, 형제, 사촌 등의 친척들이다.

이들 가운데 11분은 선무(宣武)원종공신 1·2·3등에 각각 봉해지고 한 분은 병자호란 때 진무(振武)원종 1등공신이 되었는데 (이렇게 한 가문에서 14명이 되는 의사가 한꺼번에 창의하여 외적과 싸운 일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경우'라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밀양 박씨의 위국충절은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 상황 상세히 기록된 묘정비, 그러나 읽기는 어렵고

그런가 하면, 1876년에 세워진 14의사 묘정비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고 소개한다. '상세하게'라는 표현에 특별히 관심이 끌린다. 묘정비는 향교나 서원의 뜰에 세워져 있는 빗돌로, 건립 과정 등의 내력과 모시고 있는 인물에 대한 추모의 글 등을 새겨둔다. 하지만 다른 곳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빗돌 또한 사방으로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접근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에 마모된 비명(碑銘)을 일반인이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용강서원 앞 14의사묘정비 비각
 용강서원 앞 14의사묘정비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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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의사묘정비명(十四義士廟庭碑銘)에 새겨져 있는 14의사는 박경신(朴慶新), 박경신의 아들 박지남(智男), 박철남(哲男), 형의 아들 박찬(瓚), 박우(瑀), 박숙(淑), 동생인 박경인(慶因), 박경인의 아들 박선(瑄), 당제(堂弟) 박경전(慶傳), 박경윤(慶胤), 박경윤의 아들 박린(璘), 박구(球), 막내동생 박경선(慶宣), 재종질 박근(瑾)이다.

청도 백성들, 14인 의사 덕분에 안전하게 생업에 종사

14의사들은 청도가 왜적에게 유린되자 의병을 일으킨다. 4월 25일 박경전이 대장군이 되어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고, 각자 임무를 나누어 맡는다. 그 후 10여 일 동안 40여 차례 왜적과 싸운다. 이들은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다. 덕분에 청도 일원 백성들은 들판에서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운룡을 모시는 청도 금호서원
 이운룡을 모시는 청도 금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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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 아닌, 관군으로서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은 금호(琴湖)서원에 모셔진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李雲龍, 1562∼1610)이다. 문화재자료 308호인 금호서원은 청도군 이서면 삼성산길 106-58에 있다.

대월산을 등진 채 풍양지와 학산을 바라보며 북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서원은 대지를 높낮이가 다른 2단으로 조성한 후,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사당 현충사(賢忠祠)를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보여준다.

본래 이운룡을 모시는 상충사(上忠祠)는 그의 출생지인 청도군 매전면 명대마을(현 온막리)에 있었다. 사당이 서원으로 격상된 때는 1814년으로, 유량(柳亮) 등 400여 선비들의 발의로 청도군 이서면 금촌리에 금호서원이 건립되었다.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9호)도 이때 옮겨 모셔진다.

못(풍양지) 너머로 금호서원이 보이는 풍경
 못(풍양지) 너머로 금호서원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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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영세에 걸쳐' '후세에 길이 남'아야 할 이운룡의 영정을 제대로 모시려면 반드시 서원이 건립되어야 한다고 청원했을 것이다. 보물 1212호 '이운룡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 및 관련 고문서(古文書)'에 밝혀져 있는 선조의 말이 선비들의 논거가 되었다.

교서에서 선조는 '(이운룡이) 옥포해전(海戰)에서 왜군과 대적하여 크게 격파하고 승전한 무공을 찬양'하면서 '선무공신(宣武功臣) 삼등으로 책훈하고 포상으로 도상(圖像)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며, 1계급 직위를 올리되, 부모 처자도 1계급 올리며 자식이 없을 경우 생질(조카)이나 여서(여자 조카)를 1계급 올려준다'고 말했다. 선조는 또 '적장(嫡長, 큰아들)이 세습하여 그 녹(祿, 관리의 봉급)을 잃지 않도록 하여 영세(永世, 영원)에 걸쳐 도울 것'을 천명하고 있다.

물론 금호서원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된다. 그 후 1928년 강당만 지금의 대월산 기슭에 이건하여 효충사(孝忠祠)라 한다. 다시 1947년 서원은 중창 과정을 거치고, 2001년에 이르러 강당 건물이 재차 중건된다.

원균과 이순신의 협조를 이끌어낸 이운룡

문화재청 누리집은 이운룡 영정에 대해 '관복의 가슴에 호랑이 무늬의 흉배를 두고, 금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어 공신의 반열에 오를 당시의 벼슬이 종 2품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설하고 있다. 사진은 청도군 발행 <청도의 지정 문화재>(2012)에 수록된 것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진본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이운룡 영정에 대해 '관복의 가슴에 호랑이 무늬의 흉배를 두고, 금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어 공신의 반열에 오를 당시의 벼슬이 종 2품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설하고 있다. 사진은 청도군 발행 <청도의 지정 문화재>(2012)에 수록된 것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진본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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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이운룡의 약력을 살펴본다. 이운룡은 '1592년 5월 7일 원균의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의 전라도 수군이 합세한 옥포 해전에서 선봉장으로서 아군의 전군을 진두지휘하여 용전 분격'한다.

이때 '적선 50여 척을 분소(焚燒, 태워 없앰)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는데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었다.' 그후에도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웠고,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되었다. (중략) 1605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많은 공적을 남겼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누리집은 평소 가지고 있던 얕은 지식 한 가지를 버리게 해준다. '원균의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의 전라도 수군이 합세한' 옥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을 일구어내었다는 사실이다. 원균은 도망만 쳤고, 전투는 이순신 혼자서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보충 설명을 해준다. 1585년 무과에 급제한 이운룡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89년(선조 22) 1월 옥포만호(萬戶)로 임명'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한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하려는 것을 저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하여 내원(來援, 와서 도움)한 수군과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 50여 척을 격침시켜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 원균과 이순신이 힘을 합쳐 일본 수군과 싸우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이운룡인 것이다.

율강서원 전경(가운데)과, 서원 뜰 좌우에 세워져 있는 '독석암(獨石庵)예선생(芮先生)포장비(褒狀碑)'와 '상충사(尙忠祠)묘정비(廟庭碑)'
 율강서원 전경(가운데)과, 서원 뜰 좌우에 세워져 있는 '독석암(獨石庵)예선생(芮先生)포장비(褒狀碑)'와 '상충사(尙忠祠)묘정비(廟庭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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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564 율강(栗崗)서원도 청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임진왜란 유적이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 예인상(芮仁祥)을 기리고 있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예인상은 주부(主薄) 벼슬에 있던 1592년 임진왜란 발발을 맞이한다. 그는 전란 내내 선조의 어가(御駕)를 호위하며 고달픈 7년을 보낸다.

종전이 되자 선조가 그를 직접 불러 노고를 치하한 후 "예(芮)는 보기드문 성씨이니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채씨(蔡氏)로 하라" 하고 말한다. 선조가 성씨 채(蔡)에 예(芮)의 초두(草頭)를 남겨둔 것은 근본(조상)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인상이 엎드려 절하며 "신이 조상의 성을 물려받은 지 10여 세(世, 대)를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어 세상의 공인을 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삼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성씨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선조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어모장군 훈련원 판관(禦侮將軍 訓練院 判官)에 제수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기록했다.

예인상은 이곳 율리(栗里)에 든 때는 1626년으로 추정된다. 그는 스스로 독석암(獨石庵)이라 부르면서 세상 일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래서 그런가, 율강서원 앞의 빈 터에 서면 '홀로 돌이 되어 도를 닦는 집'이라는 그의 호가 새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담장 둘레에 집 한 채 거느리지 않은 채 홀로 서 있는 서원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 때문이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조선민사령(民事令)'을 개정하여 1940년 8월 10일까지 창시개명(創氏改名)할 것을 강요한다. 시한이 되자 조선인 80%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꾼다. 왕명에 복종하면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고, 일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런저런 피해가 발생하는데, 임진왜란 공신 예인상은 왕을 거부했지만, 80%의 조선인이 순순히 일제의 지시를 따랐던 것이다.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앞두고 흔히 "내가 그런 짓을 하면 성을 바꾸겠다!" 하고 공언한다.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위 중 한 가지가 바로 창씨개명이다. 그렇다면 80%의 조선인들은 우리 역사에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은 예인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것일까! 임진왜란의 한많은 역사를 기억에서 다들 지워버린 것일까! 예인상을 기리는 사당 상충사(尙忠祠) 뒤에 무성히 자란 대나무들이 들판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다.

예인상을 기리는 사당 상충사 뒤로 대숲이 자라 있다.
 예인상을 기리는 사당 상충사 뒤로 대숲이 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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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진왜란, #용강서원, #율강서원, #예인상, #이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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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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