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진일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기 힘든 깜깜한 시대. 이 시대의 '진실'을 묻는 연극이 설 연휴 기간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작품 이름은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극단 '진일보'(대표 김경익)가 '소극장 오르다' 재개관 기념 첫 작품으로 지난 4일부터 선 보였다.

스페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은 "체제 순응자와 저항자의 관계를 맹인학교라는 상황으로" 풀어냈다고 한다. 그 제목부터 아이러니 하다. 어둠이 타오르다니, 그 의미가 궁금해 지난 6일 오랜만에 서울 대학로에 갔다. 오후 3시, 무대와 객석에 어둠이 가득 찼다.

'최우수 창조 교육기관'에서 일어난 비극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진일보


암전이 '풀렸다'. 음악도 함께 풀리고 무대 뒤 스크린에 매트릭스 부호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무대 바닥은 반듯했다. 질서를 상징하는 직선들이 가로 세로로 엇갈려 있었다. 그 직선들을 따라 '직각 보행'을 하는 배우들. 시각장애인인 그들의 손에 지팡이가 없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숫자는 모두 7명. 그런데 그들에게 낯선 소리가 들린다. 지팡이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그나시오(윤상호 분). 체제 순응자를 대표하는 반장 카를로스(장태민 분)가 "정해진 대로만 이렇게 다니면 아무 문제가 없다"며 "지팡이 좀 치워 버리라"고 요구한다.

이를 거부하는 이그나시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별빛을 보고 싶어하는 저항자다. 저항자와 체제 순응자 간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던 맹인 학교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그나시오와 카를로스의 충돌이 점점 격해지며 등장하는 또 한 사람.

그는 이 학교의 질서를 만든 교장의 사모님(이가을 분).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비장애인이다. 그런데 사모님, 하필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이 학교의 질서는 하필, '철의 정신'이다. 게다가 이 학교는 "3년 째 최우수 창조 교육기관"으로 표창까지 받은 곳이다.

하필 빨간 옷 입고 '철의 정신', 자연스레 떠오른 대통령

 맹인학교 교훈 '철의 정신'이라는 질서를 설계한 사모님 역을 연기한 배우 이가을

맹인학교 교훈 '철의 정신'이라는 질서를 설계한 사모님 역을 연기한 배우 이가을 ⓒ 진일보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떠올랐다. 지난 달 13일, 조속한 테러방지법 국회 통과를 요구하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빨간 옷을 입었다. 노동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작년 8월 대국민담화에서도, 또 그보다 두 달 앞서 국무회의에서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했을 때도 대통령은 빨간 옷을 입었다. CNN 등 해외 언론들이 대통령에게 붙인 별명 또한 '철의 여인' 아닌가.

'철의 정신'은 이 작품에서 원칙과 질서를 의미한다. 이 질서에 저항하는 이그나시오의 대사 또한 의미심장했다.

"여기는, 여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지. 순응하지 않으면 바로 레드카드를 꺼내들고 내부자와 외부자로 갈라 세워. 내부자,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고, 외부자, 더러운 불순물이 되는 거야."

빨간 옷을 입은 사모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저항이다. 그는 "이그나시오에게 철의 정신을 주입 시키라"며 또 이렇게 말한다.

"모두 다 잘못된 교육 때문이에요. 세상을 똑바로 보는 법을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건방을 떠는 거예요. 지 앞가림도 못하는 것들이 뭘 안다고. 이런 학생들한테는 원칙과 질서를 가르쳐야 됩니다."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사의 힘

 연극에서 이그나시오 역을 맡은 배우 윤상호(왼쪽). 카를로스의 연인이지만 이그나시오와 사랑에 빠지는 후아나 역을 맡은 배우 김진이

연극에서 이그나시오 역을 맡은 배우 윤상호(왼쪽). 카를로스의 연인이지만 이그나시오와 사랑에 빠지는 후아나 역을 맡은 배우 김진이 ⓒ 진일보


이렇듯 대통령과 현 시국을 연상하게 만드는 코드를 심어놓긴 했지만, 이 작품, '직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시대에 돌직구만 뿌리기보다는 '국가와 개인', '모난 돌을 대하는 집단의 자세' 그리고 '사회'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진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거짓 행복을 강요하지. 그래야 자기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봤자, 다 장님이야! 장님! 우린 다 눈 먼 장님들."

이그나시오의 외침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서나 유효한 대사다. "사랑, 자유, 꿈처럼 정말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맞서는 카를로스의 대사 또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힘들고 괴롭더라도 삶은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어. 다들 그렇게 각자 자리에서 살아간다고. 모두 삶을 위해 싸우고 있어."

"자신이 선택한 곳을 의심해봐야 무슨 도움이 되니? 현실이 그렇게 만만해?"

그의 대사는 또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작품은 단편적인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보기에 따라 듣기에 따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그나시오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종교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체제 순응자와 저항자와의 이야기, 자칫 뻔한 전개가 예상되는 스토리에 대한 몰입도를 계속 유지시켜주는 대사의 힘이 '세다'.

무대 뒤 연기를 '실캠'으로 상영하는 독특한 방식도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무대 장치의 다양한 효과로 극의 몰입도를 더욱 높인다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무대 장치의 다양한 효과로 극의 몰입도를 더욱 높인다 ⓒ 진일보


출연 배우들의 연기 또한 작품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 중 하나다. 특히 배우들은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 '동공 연기'의 집중력을 1시간 40분 가까이 잃지 않는다. '빨간 옷 사모님'을 연기하는 배우 이가을의 존재감도 크다.

"인간도, 조직도, 이미 존재하던 것들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며 "그걸 깨려면 두 눈을 부릅뜨고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서늘했다. 이그나시오의 죽음에 이어 나타나는 또 다른 비극을 끝으로 닫히는 커튼. 그 커튼 사이로 '저항자'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별빛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연기 또한 결말의 아픔을 더 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대 장치의 다양한 효과도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별빛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한 LED 조명이나 프로젝터를 이용한 스크린 활용이 볼거리를 더한다. 특히 그리그(Edvard Grieg)의 '오제의 죽음'과 함께 무대 뒤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실캠'으로 담아 내보내는 살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다만 극에 대한 긴장감을 잠시 풀 수 있는 유머 코드는 다소 부족한 편. 하지만 그런데도 시간이 아주 잘 간다는 게 이 작품의 힘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김경익 극단 '진일보' 대표는 "일부 현 시국을 연상할 만한 요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열어놓기 위해 노력했다"며 "뭔가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은 희생이 되지만 그 정신은 누구한테 전달되는 것 아닌가, 그 정신이 그렇게 별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포스터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지난 4일 개막하여 오는 14일까지 공연한다. 평일 저녁 7시 30분, 토요일에는 오후 3시와 저녁 6시 두 차례 공연된다. 일요일은 오후 4시. 월요일에는 공연이 없다.

▲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포스터 연극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지난 4일 개막하여 오는 14일까지 공연한다. 평일 저녁 7시 30분, 토요일에는 오후 3시와 저녁 6시 두 차례 공연된다. 일요일은 오후 4시. 월요일에는 공연이 없다. ⓒ 진일보



진일보 김경익 연극 대학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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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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