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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애앵~으애액~"


오전 3시 47분. 딸은 잠들지 못했다. 아내는 1시 30분부터 탈진했고 아빠가 홀로 버티고 있다. 지난주처럼 해 뜨는 장면을 볼지도 모른다. 무능감이 밀려온다. 임신하기 전부터 우리 부부는 육아서적을 읽었다. <임신출산대백과>, <부모로 산다는 것>, <엄마 냄새>... 정확하게 23권이다.



누가 선생들 아니랄까봐 책부터 사서 봤다. 10권을 독파할 즈음에는 야릇한 우월감도 느꼈다. 훌륭한 부모가 되어 간다는 착각이었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육아는 전쟁이었다. 전문가의 조언이랍시고 밑줄 쳐가며 외웠는데 현실은 아가 얼굴에 로션 바르기도 힘들었다.


저자마다 의견이 다른 점도 골치 아팠다. 목욕을 시키면서 세수와 머리 감기 중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천 기저귀와 종이 기저귀, 아기전용 세탁기와 냄비 삶기, 아기띠와 포대기. 시간이 갈수록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단 하나의 절대적으로 옳은 육아법이 존재한다면 편하련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무작정 종잇장만 뒤지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때 필요한 건 약간의 정보와 일단 해보는 용기였다.


'아, 옆돌기라도 해야 하나.'


갑자기 웬 옆돌기 타령일까? 그만한 사연이 있다. 충만이. 이름만큼이나 에너지가 가득한 남학생이었다. 의도는 순수한데 동작이 커 오해받는 경우가 흔했다. 이런 식이다. 앞자리에 앉은 현이 등에 지우개 가루가 묻어 있었다.



무시하거나. 몰래 떼주거나, 양해를 구하고 털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목표물을 일단 콱 집었다. 아앗! 영문도 모르고 꼬집힌 여자애가 소리를 지르며 따졌다. 여기서 일반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피해자에게 사과하겠지만 충만이는 적반하장이다.


"내가 니 도와주는데 왜 그러는데!"


선의를 거절당한 남자는 가슴이 쓰리다. 콧구멍이 커지고 입은 꼭 다문다. 이 표정도 5분이면 풀어진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면 다른 곳에서 선행을 베풀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거칠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나이에게 유일한 약점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수학. 주지 교과라는 권위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좌절하게 하는 존재인가. 학급에 수학을 어려워하는 어린이들이 여럿 있었으나 유독 충만이는 눈에 띄었다.


귀여운 꼬맹이는 광고 회사에서 학업 스트레스라는 주제로 영상을 찍는다면 꼭 들어맞을 장면을 표현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앉아서 수학익힘책을 바라보고 있다. 왼 팔꿈치는 책상에 올려져 있고 손가락은 앞머리를 쓸고 있다.



담임 입장에서는 끝까지 붙들고 앉아 해결하려는 모습이 가상하다. 그런데 문제는 수업이 끝나고 하교 인사를 해도 두 자리 수 곱셈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충만이는 단원평가를 치면 수학 평균이 60점 초반을 기록했다. 70점을 성취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주 낮은 단계는 아니지만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중학교에 가면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들이 수두룩하다는데 제자를  그중 한 명으로 만들 수 없었다. 학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어머님, 나머지 공부를 시켜야 될 것 같아요. 학원 따로 안 보내시면 제가 데리고 해볼게요."


기분 나쁘지 않게 말씀드렸더니 바로 동의해주셨다. 학교에서는 교재비를 지원해줬다. 사칙연산 훈련에 효과가 있다는 '기탄수학'을 구입했다. 100쪽으로 되어 있는 이 문제집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순 문항들만 나열되어 있다.



무한반복을 통해 숫자와 계산에 익숙하게 만든다는 취지였다. 나머지 공부 첫 달은 순조로웠다. 과제 난이도도 낮았고 사소한 개선에도 엄청난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다. 질문만 해도 열정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줬다. 그러나 영광의 기간은 짧았다. 

 
충만이의 빨대 거북선. 주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자. 매우 정교하게 잘 만들었다.
 충만이의 빨대 거북선. 주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자. 매우 정교하게 잘 만들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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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공부가 두 달째에 접어들었다. 칭찬의 효과가 다한 탓인지 문제 풀이 속도가 떨어졌다. 어떤 날에는 다섯 시까지 정해진 분량을 채우지 못해 숙제가 생기기도 했다. 가르치는 사람도 지쳐갔다. 남은 학교 업무를 퇴근 후에 싸들고 가서 했다.



'얼마나 참교사로 살 거라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솔직히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오기로 석 달을 채웠다. 성적은 60점대 후반. 예전보다 딱 한 문제 더 맞는 점수였다. 자괴감이 들었다.


'고작 5점을 위해 10살 짜리의 황금 같은 오후를 뺐었나?'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오후 9시에 자는 어린이에게 여가 활동은 없었다. 하루 중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등하교 하는 일상들을 빼고 나니 남는 건 학습뿐이었다. 은준이와 하는 축구, 교문 앞 맛나분식의 떡볶이, 투니버스 만화영화처럼 다른 친구들 일기장에 당연하게 등장하는 소재들이 충만이에게 없었다. 삶의 균형이 어긋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다시 전화를 하려는 찰나 어머님이 찾아오셨다.



아들에게 여유를 주고 싶다고 하셨다. 애쓰시는데 미안하다고 덧붙이셨다. 자식 맡긴 부모에게 교실은 어렵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오신 그분의 뜻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죄송스러웠다. 내 욕심에 애를 붙잡아두고 성과도 없이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충만이는 옆돌기 고수다. 각종 덤블링에도 능하다.
 충만이는 옆돌기 고수다. 각종 덤블링에도 능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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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드렸다. 그랬더니 거듭 고개를 숙이시며 미안하다 하셨다. 죄책감에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충만이는 신나서 옆돌기를 했다. 엄마가 와서 자랑하고 싶었는지 사진까지 찍어달라고 하였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찰칵찰칵. 두 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공부를 그만두고 나서도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르지도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덤블링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충만이는 키가 훌쩍 컸다. 합기도 심사를 통과했다. 레고도 조립했다. 일기장 문장이 따사로웠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아이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으니.'
 

태그:#걱정, #불안, #공부,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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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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