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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모두가 떡국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한다. 누군가 덕담을 들을 때 누군가는 손님에게 반말을 듣고, 누군가 세뱃돈 봉투를 잡을 때 누군가는 바코드 찍는 총을 잡아야 하고, 누군가 물건을 사며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때 누군가는 '이 손님이 카운터에 올려놓은 물건들은 얼마일까? 카드일까 현금일까? 카드면 좋겠는데' 따위의생각을 할 것이다. 이처럼 설날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행복을 포기하고 명절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이 싫다

'송곳' 에서 마트 노동자 역을 맡은 박시환이 인사하는 모습
 '송곳' 에서 마트 노동자 역을 맡은 박시환이 인사하는 모습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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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서울 모처에 있는 유기농산물 매장(흔히들 생각하는 생협 매장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에서 일하고 있고,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날, 명절 준비를 위해 오는 손님들을 상대해봤다. 기껏해야 주말에만 일하고 그나마도 연휴에는 쉬지만, 그래도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만만치 않다.

물론 명절이 다가와도 평소처럼 물류에서 매장으로 배송된 물건들을 정리해 매대에 진열하고, 공급장에 적힌 수량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거나, 밀려드는 손님들과 상대하는 일 등 기본적인 업무의 사이클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노동의 강도가 자연스레 상승하게 된다. 일단 입고되는 물품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좁아터진 매장에 진열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리고 선물세트를 비롯해 평소엔 잘 입고되지 않던 물품들도 함께 입고되곤 하는데, 정리하는 입장에선 그 덕분에 명절이 싫어진다. 특히 명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과일 선물세트 같은 경우에는 수량이 많아 매장 현관 앞까지 쌓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손님들이 비교해 본답시고 이거 열어달라, 저거 열어달라 요구하기 시작하면 몇 번을 가지고 와서 확인시켜야 한다. 같은 값에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똑같은 상품을 반복적으로 옮기고 손님에게 확인시키다 보면 '이 손님이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건가?'하는 생각도 들곤 한다.

어느 곳에나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해 2월 18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대 모습.
 지난해 2월 18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대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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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연하게도 명절을 앞두고는 손님이 평소보다 많이 온다. 손님이 사가는 물품들이 많아지고, 자연스레 그들이 요구하는 것 또한 많아지기 마련이다. 매장이 작고, 대형마트처럼 박스 포장하는 부스가 없다 보니 평균 두세 명의 점원이 물품 진열과 계산, 심지어 박스 포장까지 모두 해야 한다.

손님이 많지 않다면 또 모를까, 손님이 말 그대로 '쏟아져'들어오는 상황이라면 물 한 모금은커녕 숨을 크게 몰아쉴 시간도 없이 바삐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손님들이 이것저것 요구하고 재촉하는 등 이른바 '진상'을 부리는 경우에는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고 스트레스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강한 수준이 아니더라도 손님의 하대와 (불필요해 보이는) 요구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받는 것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점원과 손님은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이기에 "네 일이니까 당연히 해야지" 따위의 말은 전혀 당연해질 수 없다. 한 시간 노동의 대가로 많지 않은 돈을 받는 것도 힘 빠지는데, 전혀 비즈니스적이지 않은 뒤치다꺼리들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일말의 것들을 할 의무가 없는 데 말이다.

실제로 나는 농산물이 유기농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농사도 안 지어본 총각이 이게 유기농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나이가 많은 고객에게 "야(혹은 어이), XX 좀 가져와 봐"라는 반말을 흔하게 듣곤 했다. 또 물건을 계산대에 툭툭 던지거나, 계산된 상품을 신문지로 싸 달라고 하거나 박스에 포장해서 테이프로 손잡이까지 만들어 달라는 요구 또한 흔하게 받는다. 자신의 짐을 대로변 택시 타는 곳까지 들어달라고 하는 손님도 부지기수다.

그럴 때마다 나도 반말로 응대하고, 거스름돈 집어 던지고, "손님 물건은 손님이 포장하세요"라고 강하게 나가고 싶지만 '손님이 왕'인 한국 사회에서 그런 반항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웃으며 요구를 들어주고 속으로는 "계산대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뇌까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MBC <무한도전> '극한알바' 특집 당시 멤버 하하가 택배 상ㆍ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숨을 헐떡이고 있다.
 MBC <무한도전> '극한알바' 특집 당시 멤버 하하가 택배 상ㆍ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숨을 헐떡이고 있다.
ⓒ MBC<무한도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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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명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고속도로와 기차역에 몰린다. 하지만 명절에 그 짧은 연휴조차 즐기지 못하고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치더라도. 그들이 반말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들, 혹은 욕설을 듣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사람은 계산대 뒤에도, 전화기 너머에도, 톨게이트 부스 안에도, 택배 박스 뒤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진상'이 되지 않는 법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바로 어디에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번 명절은 뉴스에서 명절 연휴에 감정노동자들의 스트레스가 위험했다는 기사나 노동자가 과로사했다는 기사가 실리지 않는, 모두가 행복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태그:#수기, #아르바이트, #알바, #감정노동,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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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기억하는 정치학도, 사진가. 아나키즘과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자리(Frontier) 라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 사진가 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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