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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타 미쓰루 님이 쓴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사계절,2006)를 읽으면 세 사내가 나옵니다. 먼저 초등학교 일학년인 사내 아이가 나오고, 중학교 일학년인 사내 아이가 나옵니다. 여기에 이 두 사내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가 나와요.

한집에 세 사내만 있는데, 아버지는 바깥일을 하느라 바빠서 집에는 '돌봄이 아줌마'를 둡니다. 두 아이는 어머니 손길이나 따스한 눈길은 하나도 받지 못하면서 마치 세 사람이 '남남'이라도 되는 듯이 지내요. 세 사내는 서로 말을 섞는 일조차 없고, 얼굴을 마주보는 일조차 드문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 집은 반 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마마 보이였던 여섯 살짜리 남동생은 그 충격 때문에 맛이 가서…… 그러니까 문학적으로 말하면 슬픔이 너무 커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어두운 반 년 간을 거쳐 요즘에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11쪽)

겉그림
 겉그림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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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내는 처음부터 남남처럼 지내지는 않았으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이끄는 중학교 일학년 사내 아이 목소리가 밝히듯이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기 앞서'까지는 집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웃음이 흐르며 노래가 감도는 나날이었으리라 생각해요. 어머니가 죽어서 이 집을 떠난 뒤로는 하루아침에 말도 수다도 이야기도 웃음도 노래도 모두 사라졌구나 싶어요.

이 집안에서는 말도 수다도 이야기도 웃음도 노래도 사라진 뒤에 더 크게 사라진 한 가지가 있어요. 바로 막냇동생한테서 거의 모든 말이 사라진 대목입니다. 더욱이 이런 막냇동생을 두고 큰아이나 아버지는 제대로 눈길을 두지 못해요. 마음을 쓰지도 못하고, 선뜻 말을 걸지도 못합니다. 함께 나들이를 다니지도 못하고, 다 같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해요.

"저어, 네 애완동물 용…… 뭐였지? 으응, 포치였던가? 저어,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겠니……?" 스파게티를 입 속으로 밀어넣던 도키오가 얼굴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정반대로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형, 포치를 싫어하지 않았던 거야?" (24쪽)

"그때 말이야, 내가 기운이 쑥 빠져 있으니까 엄마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알을 사두 주셨어. '이건 그냥 알이 아냐. 용의 알이야.' 하면서. 나는 날마다 소중하게 품어 주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알에서 진짜로 아기 용이 나왔어." (30∼31쪽)

아버지는 회사에 오래 머물면서 '곁님 잃은 슬픔하고 아픔'을 달랩니다. 형은 학교에서 노래패(밴드)를 하면서 '어머니 잃은 슬픔하고 아픔'을 다스립니다. 두 사람은 둘 나름대로 슬픔하고 아픔을 달래거나 다스릴 만한 길이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인 막냇동생은 슬픔하고 아픔을 달래거나 다스리는 길을 모릅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형이나 아버지는 이 아이를 달래 주거나 다스려 주지 않습니다. 따스히 품어 줄 겨를이 없을 만큼 두 사내도 슬픔하고 아픔이 커요. 어머니 품을 넉넉히 누려야 할 아이가 어머니 품을 더 누리지 못하는 허전함을 한집 사내들이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중학교 일학년밖에 안 되는 형이 동생을 잘 달래 줄 만큼 슬기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중학교 일학년인 형도 중학생이기 앞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하고 아픔이 크지요. 형도 어머니 사랑을 더 받고 싶었을 테지요.

어버이요 어른이라 할 아버지는 이제껏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맡아 본 적이 없으니 돌봄이를 둡니다. 그렇지만 정작 스스로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생각해 본다면 '죽고 없는 곁님 빈자리'를 더 느낄 수밖에 없어서 괴로우니까 등을 돌리는지 몰라요.

이리하여 어린 막냇동생은 혼자 웅크립니다. 혼자 꿈누리를 헤맵니다. 형한테도 아버지한테도 말을 걸지 않고, 오로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합니다.

내가 먼저 가자고 해 놓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뭣하지만, 형제끼리 단둘이 외출한 것은 난생 처음이어서 꽤나 거북했다. (42쪽)

나는 그제야 내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답지 못했는지도 몰라,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니까. (56∼57쪽)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무엇을 누릴까 하고 생각하며 '종이버스'를 오립니다. 버스랑 자동차를 몹시 좋아하는 작은아이는 '종이인형'보다는 '종이자동차'를 한결 좋아하겠다고 문득 깨닫고는 비로소 종이버스를 그려서, 작은아이하고 함께 가위질을 하며 놉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무엇을 누릴까 하고 생각하며 '종이버스'를 오립니다. 버스랑 자동차를 몹시 좋아하는 작은아이는 '종이인형'보다는 '종이자동차'를 한결 좋아하겠다고 문득 깨닫고는 비로소 종이버스를 그려서, 작은아이하고 함께 가위질을 하며 놉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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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없는 사람을 그리느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서로서로 모릅니다. 형은 동생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는 작은아이 마음을 모릅니다. 게다가 동생도 형이나 아버지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는 큰아이 마음마저 몰라요. 세 사내는 서로서로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지냅니다. 한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이입니다만, 밥과 잠을 빼고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사이예요. 따스함도 즐거움도 웃음도 노래도 없으니, 먹고 자기는 하지만, 집이 집다울 수 없는 흐름이요 얼거리입니다.

막냇동생은 꿈속에서 어머니가 저한테 주었다는 '용 알'을 품어서 '새끼 용'이 태어나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용이 곁에서 늘 함께 있다고 여깁니다. 막냇동생은 용한테 '포치'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형은 이런 동생을 바보스럽게 여기지만, 시나브로 동생 마음을 느낍니다. 동생한테 한 걸음씩 다가서려 합니다. 동생도 저한테 다가서려는 형을 느끼고는, 동생 나름대로 형한테 한 걸음씩 다가서려 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큰아이한테도 작은아이한테도 다가서지 못합니다. 작은아이한테 '정신병(비정상)'이 생겼다고 여겨서 시설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아이하고 말을 섞거나 마음을 나눌 생각은 안 하는 채, 아버지다움이나 어버이다움이나 어른다움 모두 놓치거나 잊고 말아요.

아버지가 눈길을 돌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얘기는 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화를 내고 있다.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진작에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중요하다니…… 포치에 대해서보다 그런 것이 더 중요할까. (76쪽)

"그 얼굴은 뭐냐? 잠깐이라고 했잖아, 잠깐이라고……. 저 녀석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나에게서 눈길을 돌린다. '정상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정상이?' 나는 나 자신에게 묻교 있다. "저 녀석은 충분히 정상이잖아요. 엄마가 죽은 충격 때문에 이상해진 건, 충분히 정상적인 반응이잖아요." (88∼89쪽)

'어머니·곁님·여자' 없는 집에서 세 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머니가 없으니, 곁님이 없으니, 여자가 없으니, 그저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다가 나중에는 얼굴조차 안 보고 살아도 될까요? 조금씩 마음을 열 실마리를 스스로 찾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를 읽으면, 막냇동생은 '늘 곁에 있는 용'을 따라서 하늘로 뛰어오르려 합니다. 건물 옥상에서 '용이 부르는 손짓'을 따라서 참말로 하늘로 뛰어오르려 하지요.

아버지는 이때까지 작은아이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채 '어른으로서 느끼는 슬픔하고 아픔'만 생각하느라 넋이 나갔는데, 이 모습을 보고는 머릿속이 와장창 무너집니다. 이제 보아야 하는 줄 알아차리지요. 이제 작은아이를 바라보아야 하는 줄 깨닫지요. 곁님이 없는 자리에 작은아이까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비로소 느끼지요. 떠나서 없는 사람만 생각하느라 막상 바로 옆에서 사랑을 바라면서 기다리는 아이를 안 쳐다보면 어떻게 되는가를 온몸으로 찌릿찌릿 배우지요.

갑작스레 떠나고 만 사람을 그리는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떠난 사람만 있지 않아요. 곁에 있는 사람도 있어요. 아이들은 곁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기다려요. 아버지요 어버이인 자리에서는 '떠난 사람 생각'에만 얽매일 틈이 없습니다. 아버지요 어버이인 자리에서도 슬픔과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이 느낄 슬픔하고 아픔을 헤아릴 몫이 바로 아버지요 어버이인 사람한테 있습니다.

마음이 다친 아이를 달랠 사람은 바로 어버이입니다. 마음이 아픈 아이를 어루만질 사람은 바로 어버이예요. 어린이문학 <용과 함께>는 세 사내가 한집에서 어떻게 새로 일어서면서 씩씩하게 살림을 가꿀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을 수 없는 삶을 그리고, 아이도 자라며 어른도 함께 자라면서 생채기를 돌보는 삶을 그려요.

덧붙이는 글 | <용과 함께>(하나가타 미쓰루 글 / 이선민 그림 / 고향옥 옮김 / 사계절 펴냄 / 2006.1.18. / 75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용과 함께

하나가타 미쓰루 지음, 고향옥 옮김, 이선민 그림, 사계절(2006)


태그:#용과 함께, #하나가타 미쓰루, #어린이문학, #어린이책, #아이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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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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