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표지
 책 표지
ⓒ 창비

관련사진보기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버님의 일을 잇고 있습니다. 아버님도 아직 일선에서 활약 중이시구요. 워낙 정정하셔서 쉽게 물러나실 것 같지도 않아요, 하하.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살만한 정도는 됩니다."(책 <풀빵이 어때서> 중에서)

그러니까 남자는 가업을 잇고 있다고 말하는 중인데, 저는 소개팅 자리에서 다짜고짜 가업을 잇네 마네 하는 남자는 별로일 것 같지만, 소설 속 여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냅니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외모를 보고  한숨짓던 것과는 반대의 모습이 되죠.

여자는 남자에게 가업에 대해 이것저것 묻습니다. 남자는 성심성의껏 대답합니다. 외식업이에요, 유통 쪽과도 관련이 있죠, 장인정신을 중요시하는 일이에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여자는 더, 더,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시는 데요? 타코야키를 구워요. 직접요? 네, 그럼요. 가업을 잇는다며요?

"네, 아버지처럼 저도 풀빵을 굽는데요?"(<풀빵이 어때서> 중에서)

여자 입장에서는 황당할 것 같아요. 차라리 처음부터 가업이니 뭐니 말이나 말지. 남자도 압니다. 아버지가 어느 기업의 회장쯤 되면 모를까, 풀빵 굽는 일을 물려받으면서 가업을 잇는다고 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걸요.

그런데 남자는 진지해요. 여자를 놀려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남자는 정말 가업을 잇는 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남자의 아버지는 붕어빵 장수. 그런데 평범한 붕어빵 장수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붕어빵 좀 먹어봤다는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붕어빵 명인입니다.

아버지따라 풀빵 굽는 남자

남자에게 이런 아버지를 뒀다는 건 축복입니다. 남들 다 취업 걱정할 때 남자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자랑스럽게도 남자에겐 이어받을 가업이 있었으니까요. 아들은 아버지가 풀빵 굽는 모습을 보며 자라납니다. 실습도 물론 했습니다. 마치 재벌가에서 제왕 교육을 받는 것처럼요.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풀빵 굽는 일에 뛰어듭니다.

남자는 학교에서 성적도 좋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도 무난히 들어갈 수 있었어요. 등록금도 문제없었고요. 그런 남자가 풀빵 굽는 일에 뛰어든 이유는 말 그대로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자의 이런 선택을 도통 이해하지 못해요. 사람들이 이해를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풀빵 굽는 일을 평생직업으로 삼습니다. 아버지의 이 말을 명심하면서요.

"붕어 한 마리를 굽더라도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구워야 하는 법이다."(<풀빵이 어때서> 중에서)

책은 유쾌합니다. 킥킥거리며 가볍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에 담긴 내용은 의미 있고 진지했습니다. 더 완벽한 풀빵을 굽기 위해 주인공이 끊임없이 단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묵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소설은 결코 묵직한 분위기의 소설은 아니에요. 저자 김학찬은 "재미있게, 정말 재미있게, 무조건 재미있게"를 목표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타코야키를 더 맛있게 굽는 데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이런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로는 친구 철규와 주인공이 잠시 사랑했던 여인 현지가 있습니다.

철규의 아버지는 뻥튀기 장수. 철규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철구는 본인만이라도 성공하길 열망했어요. 그렇게 사법고시에 합격을 합니다. 하지만 기쁨은 딱 여기까지. 현지는 몇 년째 임용고시에서 낙방 중이에요. 후배들 보기도 부끄럽고 부모님께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기간제 자리라도 얻으려 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죠. 현지를 통해 저자는 지금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줍니다. 현지는 말해요.

"치열하게 경쟁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목적이 비정규직이 되는 거라니. 예전에 대학원 다니는 친구가 사오 년 열심히 공부하면 비정규직 시간강사가 될 수도 있다고, 그 자리 때문에 모함까지 한다고 할 땐 농담인 줄 알았어요."(<풀빵이 어때서> 중에서)

이렇듯 대비되는 인물들로 인해 주인공은 가만히 앉아서 타코야키를 구울뿐인데, 뭔가 엄청나게 올바르며 대단한 의지를 지닌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의 길을 가겠어!'라는 식의 자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보면 이 청년 참  건강하네, 라고 느껴질 만큼의, 딱 그만큼의 평범한 스물아홉 살 청년일 뿐이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그걸 하는 거고,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듣게 되면 그런가 보다, 하는 식이에요. 그런데 그래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 다른 건 다 어떻게든 소유할 수 있어도, 바로 이 '건강한 정신'을 소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압니다.

주인공이 이만큼 건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 덕분일 겁니다. 고집스럽고 괴팍하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삶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고 있는 붕어빵 명인인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주인공이 결혼을 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붕어빵을 굽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아버지는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붕어빵 구우라고 그 오랜 세월 가르쳐 놨더니, 아니 이 배은망덕 한 녀석이 일본 놈들이나 먹을 타코야키를 구운데요. 그 뭣도 아닌 걸 배우러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무려 1년 8개월 동안 사사를 받고 오기까지 합니다. 아버지는 복장이 터집니다.

책에는 이렇듯 아들이 마뜩잖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러거나 말거나 타코야키를 구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본받으려 노력하는 아들의 신경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부자의 말싸움을 보는 걸 거예요. 여기다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재미고요.

저는 책을 덮으며 여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뜨거운 틀을 앞에 두고 붕어빵 하나, 타코야키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을 부자의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절로 입안이 따뜻해지고, 절로 마음도 따뜻해지더라구요. 그래서 더 바라게 됐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풀빵에 신나게 전념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도 곧 찾아오기를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경쟁하느라 각박하게 살 필요는 없을 거에요.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풀빵 하나씩을 건네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겠지요.

덧붙이는 글 | <풀빵이 어때서?>(김학찬/창비/2013년 05월 07일/1만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풀빵이 어때서? - 제6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김학찬 지음, 창비(2013)


태그:#김학찬, #한국소설, #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