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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갑자기 눈이 내렸습니다
▲ 산골 설경 산골에 갑자기 눈이 내렸습니다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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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부부가 오신다고 한다. 몸이 좋지 않은 처형이 공기 좋은 산골에서 하루 저녁을, 특별히 뜨끈뜨끈한 온돌에서 주무시고 싶다는 전갈이다. 지게를 짊어졌다. 그리고 우리 집 수캐 '부남이'를 앞장 세웠다. 지난 가을, 배낭 한 가득 상수리를 주웠던 뒷산 참나무 군락지를 생각해내고 산을 올랐다. 장화가 잠깐 미끄러웠고, 부남이가 영역표시를 하느라 잠시 해찰을 했다.

이내 산자락에 닿아 옛 축사의 흔적을 감고 돌았다. 어떤 사람이 이 고운 산중에 축사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감나무 몇 그루만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오른 쪽으로 좁은 산길이 보인다. 용암산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여름 아내와 함께 올라갔었다. 그 길은 다니는 사람이 없어 묵었고, 그래서 길 찾기가 어려웠다. 예전에는 뒷산 꼭대기에 마을 분들이 쉬던 정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것이어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조만간 꼭 내 두 발로 그 길을 새롭게 뚫을 것을 다짐한다.

고사목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가져갈 몫으로 부러진 참나무 한 그루를 어림잡았다. 지게를 내려놓고 어떻게 톱질을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톱질은 신중해야 한다. 나무의 하중이 톱질하는 곳으로 몰릴 경우 시작과 달리 중반 이후에는 나무의 무거움으로 톱날이 나무에 박혀 고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남이가 내 주변을 맴돌더니 심심한지 슬그머니 사라졌다. 부러진 나무를 잡아끌어 일하기 좋게 세우고 톱질을 시작했다. 땀이 났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 봤다. 눈은 이미 녹아 거의 흔적이 없고, 고요하기만 하다. 집 뒤란의 대숲에는 온갖 새들이 떠들고 있는데 이 숲은 왜 이리 조용하기만 한 걸까.

오늘 하루도 내 몫의 노동을 챙겼다

눈 위에 발자국을 찍었네요.
▲ 발자국 눈 위에 발자국을 찍었네요.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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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작은 새 몇 마리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재재거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난데없이 부남이가 비호처럼 새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물론 허탕을 치고 말았지만 그 모습이 늑대의 자손으로 손색이 없었다. 신기했다. 다시 톱질을 시작했다. 적막한 산중으로 톱질소리와 함께 톱밥이 흩날렸다. 흩날리는 바람 사이로 언뜻 내 젊은 청춘시절의 꿈과 희망이 궁굴었다. 지난 세월의 사랑과 그리움도 날렸다.

내 삶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꿈결 같은 세월. 그새 정말 많은 날들이 지났다. 그 많은 시간을 헤쳐 오면서 큰 불행과 잘못 없이 잘 살아와 준 내가 대견하고 감사하다. 아내는 진작 느꼈던 그 생각이 나는 왜 이제야 다가오는가. 그럼에도 술떡이 되어 큰소리만 치고 살았던 지난 시절의 어리석음에 스스로를 떠올리고 나니 실소가 밀려온다.

큰 나무 두 둥치를 먼저 얹고 주변의 작은 가지들을 모아 한 짐을 만들었다. 주변을 살피고 부남이가 이겨낼 만한 나무를 찾는다. 적당한 무게를 찾았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목줄에 단단히 묶는다. 부남이는 힘이 좋아 웬만한 무게를 좋이 감당할 수 있다. 지게를 최대한 몸 쪽으로 기울이고 작대기를 짚어 균형을 유지한다. 일어서면서 지게의 무게를 가늠한다. 일어설 만하다. 힘을 불끈 써 일어난다.

부남이를 재촉한다. 뚜벅뚜벅 산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이라도 조심해야한다. 물먹은 풀숲에서 장화가 벗겨지거나 냇가의 물풀에서 미끄러지고, 더러 부남이의 목줄과 엉켜 발걸음이 풀릴 수 있다. 무사히 평지까지 내려왔다. 부남이도 경사로인지라 쉽게 따라온 것 같다. 이제 마지막으로 철책을 우회한 좁은 소로를 지나야 한다.

당초 마을 사람들의 산길이었는데 외지인이 그곳을 사서 개인 소유임을 주장하며 철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곳을 피해 돌아다녀야만 한다. 몹시 좁고 경사져 보행이 불편하다. 사람의 욕심은 이렇게 서로를 옥죄고 있다. 지게에 진 나무들이 울타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건넜다.

끝에 다다라 부남이를 돌아다보니 이 녀석, 쇠 울타리에 나무가 끼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하는 수 없다. 부리고 나면 무게 때문에 다시 일어서기 힘드니 일단 집까지 간다. 짐을 내려놓는다. 시원하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쇠 울타리에 이르니 부남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미안하다. 가슴 속에서 교감이 일렁인다. 녀석이 꼬리를 흔들며 달린다. 대문을 지나 창고에 도착했다. 목덜미를 긁어 격려와 감사를 표시한다. 아, 등허리가 땀으로 적셔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내 몫의 노동을 챙겼다. "노동하지 않은 사람은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지금의 내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삶의 엄숙한 고전이다. 이것을 느끼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삶의 표피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림자 삶의 표피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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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산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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