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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해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평양 유일의 성당, '장충성당'

평양에 있는 유일한 성당, 장충성당 내부 모습.
 평양에 있는 유일한 성당, 장충성당 내부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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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8일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5년 6월 28일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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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충성당을 찾은 북한 내 가톨릭 신자들.
 평양 장충성당을 찾은 북한 내 가톨릭 신자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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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8일 오늘은 주일이다. 장로교인인 나는 봉수교회로, 그리고 가톨릭 신자인 박세희(가명) 교수는 평양의 유일한 성당인 장충성당으로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박 교수가 내게 이번 주일엔 함께 성당에 갈 수 없겠느냐고 부탁한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어느 교구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성당엔 사제가 없다. 전대협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와 동행한 문규현 신부께서 이곳을 방문해 미사를 집전했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가톨릭을 믿어왔다는 한 청년이, '남북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에는 남측에서 신부님들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셨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성당은 오늘도 신부님이 파견되기만을 기다리며 신부님 없이 미사를 드렸다.

나는 성당에 대해 잘 모른다. 가톨릭 신자인 박 교수가 "신부님 안 계시는 성당은 진정한 성당이라 할 수 없다"라면서 매우 안타까워한다. 하루빨리 민간차원의 남북교류라도 이뤄져 이 성당이 매주 신부님을 모시고 미사를 드릴 수 있길 간절히 바라 본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기 전, 북한의 물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 과일을 사고 싶다고 핑계를 둘러대 상점에 들렀다. 상점의 이름은 '대동강꽃상점'. 그런데 이름처럼 꽃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식료품을 파는 작은 슈퍼마켓 같은 곳이다. 지난번 들렸던 '광복거리상업중심'보다는 물건값이 조금 더 비싼 것 같다.

평양의 '대동강꽃상점'. 이곳은 꽃을 파는 가게가 아니다.
 평양의 '대동강꽃상점'. 이곳은 꽃을 파는 가게가 아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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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관 입구의 남자들, 이들 혹시...

아직 옥류관을 가본 적 없다는 박 교수의 제안으로 우린 점심식사를 옥류관에서 하기로 했다. 옥류관은 대표적인 '인민봉사식당'이다. '인민봉사식당'이란 일종의 배급표와 함께 약간의 돈을 내고 음식 서비스를 받는 국영식당을 말한다. 물론 배급표가 자주 나오진 않을 테지만, 배급표를 들고 가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고 한다. 식당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지방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단체버스에서 내려 우르르 들어간다.

우리 일행은 식당건물 한쪽에 있는 외화식당칸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외국인 관광객이나 해외동포들 또는 배급표가 없는 주민들이 아무 때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누구든 외화로 제값을 치러야 한다. 식당에 들어와 보니 꽤 많은 북한주민들이 앉아있다. 주로 해외동포들과 함께 식사하러 온 그들의 친인척들이다.

평양 옥류관 앞. 옥류관 입장을 기다리는 북한 주민들의 줄이 길다.
 평양 옥류관 앞. 옥류관 입장을 기다리는 북한 주민들의 줄이 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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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관 외화식당의 쟁반국수.
 옥류관 외화식당의 쟁반국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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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대떡과 쟁반국수를 느긋하게 먹은 후, 옥류관 냉면 못지않게 맛있다는 이곳의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한참동안 맛을 음미하면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식당 앞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들어갈 때 분명히 봤던 두세 남성이 아직도 식당 앞을 서성인다. 약속 시각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는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예전 내 어린 시절, 극장 앞에서 암표를 팔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혹시 이들도 배급표를 다른 이들에게 팔려는 심산이 아닌가 생각해봤다.

옥류관의 외화식당칸을 비롯한 여타 외화식당에서 파는 냉면값은 평균 4달러다. 배급되는 쌀 외에 장마당에서 쌀을 살 경우 쌀값은 1킬로그램에 50센트 정도이니, 냉면 한 그릇값이면 쌀을 8킬로그램이나 살 수 있다. 만일 냉면을 싫어한다든가, 아니면 급히 다른 물품을 사야 하는데 돈이 없는 상황에서 배급표를 반값에라도 팔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걸 팔아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게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배급된 식사권을 팔려는 건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설사 배급표를 팔려는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다. 나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공원에서 한반도기를 펼치다

조선시대 관서 팔경의 하나라는 대동강변의 누각 련광정. 우리가 닿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조선시대 관서 팔경의 하나라는 대동강변의 누각 련광정. 우리가 닿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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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대동강가.
 텅 빈 대동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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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북녘 동포들.
 대동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북녘 동포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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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재일동포들이 건네준 한반도기를 펼쳐들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먼저 대동강가로 향했다. 일요일이니 강변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조선시대 관서 팔경 중의 하나라는 누각 련광정은 보수 중이고, 강변엔 낚시대를 드리운 사람들만 있다. 낚시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깃발을 함께 펼쳐 들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우리는 모란봉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란봉 공원에서 한반도기를 펼쳐들고.
 모란봉 공원에서 한반도기를 펼쳐들고.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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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북녘의 할머님들.
 우리 일행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북녘의 할머님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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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한반도기를 함께 펼치자고 제안하자 흔쾌히 응한다. 푸르른 한반도기가 펼쳐지자 정자에 모여있던 북녘의 동포들이 환호를 보낸다.

한반도기를 펼쳐 든 감격스러운 상황을 보고 모두들 눈시울을 적신다. 한반도기를 함께 펼쳐 든 할머님들도,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평양의 시민들도, 머나먼 미국에서 온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우리의 한 맺힌 응어리가 툭 하고 터진다. 그리고 이미 떨군 눈물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염원으로 또다시 응어리진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다. 저 멀리 함경북도 산골에서 만난 촌노도, 밭에서 일을 하던 아낙들도, 이곳 평양에서 만난 할머님들도…, 민족의 화합과 통일 이야기만 나오면 이내 눈물을 떨군다. 할머님들께서 내 팔을 당겨 돗자리 위에 앉히고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미국놈들이라면 이가 갈려"

"오데서 왔어?"
"미국서 왔어요."
"아, 재미동포구만. 긴데도 조선말을 오케 기리 잘해?"
"저는 미국서 살고있지만 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어요."

남쪽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남조선에서 태어나 자랐어? 지금은 미국서 살고?"
"네, 할머님."
"미국놈들이 조선 사람이라고 탄압하지는 않아?"
"아녜요, 할머님."

"잘됐구만. 긴데 평양에는 오케 왔어?"
"관광 겸 수양딸을 만나러 왔습니다."
"조선에 양딸이 있다구?"
"네."

"기렇구만. 기래 오늘은 오데를 관람했어?"
"아침에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교회? 예배당 말이야?"
"네."

"피양(평양)에 아직도 예배당이 남아있나?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 때 미국놈들이 비행기루 죄다 폭격해 버렸는데. 나는 미국놈들이라면 이가 갈려. 건물이건 집이건 죄다 폭격을 하는데 피할 데가 없어. 미국사람들은 구리스도(그리스도)를 믿어 예배당은 폭격을 안 한다 기래가지구 기리루 가는데 예배당이구 뭐구 막 폭격을 해, 가다말구 나무 밑에 들어가 겨우 살았어.

비행기가 얼마나 낮게 떠다니는지 내는(나는) 비행사 얼굴도 봤어. 나도 기때 예배당으로 들어갔으면 죽었을 기야. 미국놈들이 피양에 들어왔을 때는 밤마다 마을에 내려와 여자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우리 오마니구 뭐구 모두 숨어다니구 기랬지. 기때 생각만 하면 티(치)가 떨려."
"그러셨군요."

펼쳐든 한반도기를 보고 환호하는 북한동포들.
 펼쳐든 한반도기를 보고 환호하는 북한동포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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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은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두리번 거리시면서 싸가져온 음료수를 권하신다.

"기래, 깃발은 미국서 가져온 거야?"
"아닙니다. 여기 오기 전에 일본에 갔었는데 그곳에 사는 재일동포들이 준 거에요. 조선에 가면 동포들과 함께 펼쳐 보이라구요."
"암, 기래. 기래야지.우리는 한민족이지. 어서 통일이 돼 함께 살아야지."

남과 북이 똑 같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릴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적어도 남녘동포들에 대한 나쁜 감정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늘 일정에 있었던 몇 장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성당, 옥류관, 을밀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머님들과 함께 한반도 깃발을 펼쳐든 사진을. 순식간에 '좋아요'와 '공유' 알림이 연신 울린다. 온라인상의 통일이다.

내일은 수양딸 설경이네 집에 가는 날이다. 설경이 아들이 거의 두 살이 돼 간다. 얼마나 컸을까. 내일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잠을 청한다.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손자 주의성. 의성이가 벌써 두 돌 가까이 됐다니.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손자 주의성. 의성이가 벌써 두 돌 가까이 됐다니.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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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평양, #옥류관, #신은미, #북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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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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