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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3리 100 소재 '배씨정' 우물.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 부장으로 참여했던 아버지가 전사할 때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딸이 뛰어들어 자진한 우물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3리 100 소재 '배씨정' 우물.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 부장으로 참여했던 아버지가 전사할 때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딸이 뛰어들어 자진한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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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의 어떤 우물은 '배씨정(裵氏井)'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우물이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성주읍 예산3리 100 예동노인회관 뜰에 자리잡고 있는 우물을 찾아 현장의 해설문을 읽어본다.

예동마을은 당초 사례동(沙禮洞)이라 불리우다가 전와(傳訛)되어 지금은 예동(禮洞)이라고 부르는 마을로서 경산지(京山誌)와 배씨세적(裵氏世蹟)에 의하면 고려 희종 조 때 봉열대부(奉烈大夫)를 지낸 배현보(裵賢輔)와 공민왕 때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배극명(裵克明)이 살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배씨정(裵氏井)은 임진왜란 시 충의교위(忠毅校尉)의 벼슬로 나라를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바쳐 순절한 백헌(栢軒) 배현복(裵玄福)의 장녀(長女) 배랑(裵娘)이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왜병의 포로가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투신 순절한 애달픈 사연이 깃든 우물로서 세칭 "배씨정"이라 부르고 있다.

후세(後世) 임인년(壬寅年)에 목사(牧使) 김우집(金宇集)과 진사(進士) 곽헌(郭憲)이 이 부녀(父女)의 묘전(墓前)에 제문(祭文)을 지어서 그 충절(忠節)을 기리는 후한 제사(祭祀)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 1996년 11월 가야석물 김종순(金鍾淳) 씀

68세 고령의 의병장 배덕문 성주서 창의

배씨정(왼쪽 사진)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해설 빗돌을 성산배씨 후손인 배한경 씨가 지켜보고 있다.
 배씨정(왼쪽 사진)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해설 빗돌을 성산배씨 후손인 배한경 씨가 지켜보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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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27일 일본군이 성주를 침탈한다. 부왜승(附倭僧) 찬희 등이 적들에게 빌붙어 갖은 횡포를 일삼는다. 물론 성주에서만 이렇게 적들에게 붙은 반역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선조실록>에는 김성일이 선조에게 '영남 사람의 절반이 반(反)하였다' 하고 보고한 내용도 실려 있다.

성주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장 배덕문은 찬희가 본래 거처했던 적산사(積山寺) 아래에 군사들을 매복한 후 그를 유인한다. 사전에 '찬희가 왜적들에게 붙어 성주 사람들을 핍박하므로 적산사를 불태워 없애려 하니 불자(佛子)들은 헤아려 주시라' 하는 내용의 거짓 격문을 공개적으로 뿌려 두었다. 격문을 본 찬희가 멋모르는 채 절을 구하려는 일편단심으로 달려왔다. 일본군에 붙어 잠시 성주목사의 권세를 누렸던 찬희는 그날 적산사 아래에서 목이 떨어졌다.

기세를 몰아 배덕문 의병군은 성주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무기와 병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배덕문 의병군은 성주성 탈환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 전투에서 배덕문 의병장의 제자이자 일가인 배현복(1552-1592)이 전사한다. 배현복은 과거에 급제한 선비였지만 형조낭관, 언양군수 등을 역임한 68세 고령의 스승 배덕문이 창의하자 분연히 칼을 들었다.

스승 따라 칼을 든 선비, 장렬하게 전사

아버지 배현복이 전사할 때 의병군 진영에서 허드렛일을 거들고 있던 그의 딸 배랑도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제가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이럴 때 칼과 창을 들고 천추의 원수를 갚을 것이오나 약한 계집아이로 출생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원통합니다, 아버지— " 하며 눈물을 쏟고 있다가 왜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왜적들은 그녀가 의병장수 배현복의 딸인 것을 알아보았다. 적들은 '좋아라!' 하고 배랑을 자신들의 본진으로 압송했다. 그 때에도 성주향교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예동마을 앞 길가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우물 근처에 당도했을 때 그녀가 왜적들에게 "너무 목이 마르니 물 한 모금만 먹게 해주시오" 하고 말했다. 

배씨정 해설 빗돌, 현장에 간 답사자도 글자들이 잘 보이지 않아 읽기가 어렵다.
 배씨정 해설 빗돌, 현장에 간 답사자도 글자들이 잘 보이지 않아 읽기가 어렵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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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들은 배랑을 우물가로 데려갔다. 배랑은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왜적들은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뿜은 다음, 붉은 선혈로 우물가 돌에 표식을 남겼다. 왜적들에게 끌려가 치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한많은 맹세였다.

눈깜짝할 찰나였다. 몇 발짝 떨어져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왜적들이 미처 팔을 뻗치기 전에 그녀는 우물 안으로 몸을 날렸다. 낭자한 혈서의 흔적만 돌 위에 남긴 채 그녀는 앞서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 우물을 "배씨정"이라 불렀다. 배씨의 딸이 목숨을 던진 우물이라는 뜻이다. 거제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은 <삼강행실도>의 '열녀도'를 게시하면서 "일본군의 만행에 죽기를 결심한 여성들은 강, 절벽, 언덕, 바위 등에서 뛰어내리거나 패도(佩刀, 노리개에 차는 작은 칼)를 사용하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결하였다"고 해설하였는데, 배랑 또한 그런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 와라!"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 귀무덤) 사진(경남 거제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 게시물)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 귀무덤) 사진(경남 거제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 게시물)
ⓒ 칠천량해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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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때 출병하는 왜군들에게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라'고 지시한다. 코를 베어와 자신의 전공을 증명하라는 뜻이다.

<난중잡록>은 또 '요사히로 등의 군사는 금오산과 노량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중략) 적병 50여 명이 운봉현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히데이에와 유키나가 등의 군대가 임실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 원평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여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의 기록만 그런 것이 아니다. 7년전쟁에 참전했던 일본인의 증언도 예외가 아니다. 케이넨은 <조선일 일기>를 통해 '들도 산도 섬도 죄 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 줄과 대나무 통으로 묶어서 끌고 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갈라놓는다. 성내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고 증언한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인 인간 소외 행위

전쟁은 상대를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남는 비인간화의 극단적 현상이다. 전쟁의 비인간성이 빚어낸 비극이 배씨정에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곳을 찾아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배씨정은 찾는 이가 별로 없다. 심지어 성주 읍민들에게 물어도 위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배랑은 죽어갈 때, 21세기의 후손들이 임진왜란과 경술국치를 망각하고, 분단 조국의 고통도 잊어가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배씨정 빗돌에 새겨진 글자가 너무 흐리다.    

<삼강행실도>의 '열녀도' 중 한 부분(거제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게시물 촬영)
 <삼강행실도>의 '열녀도' 중 한 부분(거제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게시물 촬영)
ⓒ 칠천량해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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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배씨정, #임진왜란, #배덕문, #배현복, #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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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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