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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에 열린 세월호 희생자 추모를 위한 청소년 촛불집회 현장 모습
 2014년 5월에 열린 세월호 희생자 추모를 위한 청소년 촛불집회 현장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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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운동은 세월호 참사에 관한 운동(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 기획 연재 앞머리에서 이를 "세월호 운동"이라 불렀으니 이 표현을 따르겠다)에 함께해왔다.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했고, <4.16 인권선언>을 만드는 특별위원회에도 몇 명이 참여했다.

청소년운동의 여러 참여자들은 학교 등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세월호 운동을 했고 이에 대한 탄압에는 저항했다.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등의 단체들은 세월호특별법 입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청소년 추모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청소년운동은 세월호 운동에 함께하지 않았다. 청소년운동은 세월호 참사를 청소년운동의 문제로 재해석하거나 청소년운동의 요구나 언어를 제안하지 않았다. '청소년', '미성년자'라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존재들의 관점에서 운동을 만들지 않았다. 세월호 운동에 함께한 청소년들이나 청소년활동가들은 많지만 그들이 '청소년'이자 '청소년활동가'로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청소년운동이 단지 세월호 운동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세월호와 청소년"을 말하려 한다면 먼저 세월호 운동은 왜 청소년운동이 아닌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운동과 청소년운동 사이의 거리감 또는 긴장관계에 대해서 짚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세월호 운동이란 청소년운동에게 어떤 것인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너무 많은 말들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지난해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추모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지난해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추모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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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로, 이에 관해 참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우리 사회가 사건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말도 있었을 것이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사람들 각자가 사건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 필요한 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관한 그 수많은 말들 중에서도 유독 많았던 얘기들은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너무 지나치게 많았다. "세월호 참사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다"라는 규정, 유가족이나 희생자에 대한 묘사들, 그리고 1년 뒤 수능시험일이 다가왔을 때 이를 세월호 참사와 연관 지어서 재현하던 퍼포먼스, 유가족을 '자식 잃은 부모'로 그리는 모습, 1년 뒤 수능시험일이 오자 나오는 여러 말들 등.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중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사회는 청소년-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기에, 청소년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레 교육체제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는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라는 분석이라든지, "교육은 어른의 말이다"라고 하며 세월호 참사를 교육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어느 대학 교수진의 스승의 날 성명 등.

참사로 죽은 것 대다수가 비청소년들이었다면 아마도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교육 관련 활동가로부터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살아남은 학생들은 대개 모범생/우등생이 아니라고 하더라, 어른들 말을 잘 안 듣는 학생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같은 묘한 카더라 분석(?)마저 들은 적이 있다.

이토록 과잉되어 있는 청소년에 대한 말들이 정점을 찍은 사례는 교육청들이 '4.16 교육체제' 같은 것을 진지하게 꺼내든 일이 아닐까 싶다. 4.16 교육체제란, 곧 5.31 교육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교육체제이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교육체제라는 이야기였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교육"이라는 등의 수사들도 따라왔다.

서울시교육청(조희연 교육감)은 4.16 교육체제를 '일등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꽃피우는 교육이라고 했으며 고교서열화 극복, 학교혁신, 학교민주주의 등을 과제로 열거했다.

경기도교육청이 연 4.16 교육체제에 대한 토론회 자료집 서두에서 이재정 교육감은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한 교육>,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참사를 잊지 않는 일이고, 또 교육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한 발제자는 4.16 교육체제의 모델학교는 혁신학교이며 핵심 가치는 협력과 협동이라고 했다.

다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그게 왜 '4.16 교육체제'냐는 것이다. 솔직히 그 각론들을 보면 그동안 교육운동이 해오던 주장과 논의들을 모아서 이름을 붙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 참사가 과연 새로운 교육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이었던가? 단지 희생자 중 다수가 청소년이라는 것에 대해 비청소년들이 느끼는 당혹감이나 책임감을 투영하고 있을 뿐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청소년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참사로 희생되지 않았다면 수험생이되었을 단원고 학생 250여명을 추모하는 '250개 책가방을 모아 별이 된 아이들을 기억해 주세요 - 아이들의 책가방' 행사가 열렸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참사로 희생되지 않았다면 수험생이되었을 단원고 학생 250여명을 추모하는 '250개 책가방을 모아 별이 된 아이들을 기억해 주세요 - 아이들의 책가방' 행사가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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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운동에서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들에는 모두 각각 다른 결들이 있고 각각의 문제점들이 따로 있다. 예컨대 수능시험일에 희생된 학생들의 가방을 전시하던 퍼포먼스는 입시경쟁교육의 상징인 수능시험이라는 행사를 정상적 관례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희생된 학생들이 '당연히' 수능시험을 봤을 것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반복해서 언급된, '유가족'을 '단원고 학생 희생자의 부모'로 묘사하는 것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세세한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자면 내용이 넘칠 테니 개략적인 이야기만 해보겠다. 크게 봐서 세월호 운동에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방식은, 청소년을 피해자의 위치에, 비청소년을 책임자·권력자·주체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세월호 운동에 참여하는 비청소년들이 "아이들아 미안하다"를 외치고 그러한 정서를 공유할 때, 많은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의 보호와 부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지, 함께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함께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교육 때문이라는 분석은, 교육의 주체는 비청소년(교사, 부모)이며 청소년은 그 교육의 대상이라는 기존의 구도를 깨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를 비판하는 것이든 '4.16 교육체제'이든, 결국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한다는 논의가 되고 만다.

사실 '청소년'에 초점을 맞춘 많은 논의들은 세월호 참사를 마치 청소년 또는 교육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참사를 바라보는 초점을 흐리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은 청소년들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희생자=아이/청소년", "가해자/책임자=비청소년"이라는 단순화된 구도가 만들어져버린다. 교육이 원인이라거나 선내 방송을 상징화한 "가만히 있으라" 같은 표어들은, '체제 순응'과 '저항'이라는 해석의 틀을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틀이 과연 유효한지는 의문스럽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응해서 죽은 것인가? 가만히 있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말인가? 그런 해석틀과 구도의 극단적인 결과물이, 간혹 등장하는 아전인수 격의 해석과 인용일 것이다. 발달장애인 직업능력개발센터가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발달장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느냐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게 세월호랑 똑같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 아이들 어떻게 책임질 거냐?"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그냥 쓴웃음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오늘의 교육 제30호, 하금철, <발달장애인 공포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인용).

그 옳고 그름이나 바람직함의 여부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그런 청소년에 대한 논의의 밑바탕에는 어떤 동기, 어떤 감정이 있는지부터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말들 속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당혹감과 무력감이었다고 하면 좀 과한 것일까?

수백 명이 죽은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하면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답을 원했다. 4.16 교육체제라는 명명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교사/교육청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 못 되게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만들며 안심하기이고, 좋게 말하자면 무력감을 피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라고 할까. 세월호 참사 앞에서 수많은 말들이 나오는 현상은 마치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세월호 참사에 관한 많은 말들, 특히 청소년에 관한 말들을,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재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만의 문제는 없다

2014년 7월 15일, 세월호침몰사고 생존 단원고 학생들이 경기도 안산에서 국회를 향한 도보 행진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4년 7월 15일, 세월호침몰사고 생존 단원고 학생들이 경기도 안산에서 국회를 향한 도보 행진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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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 대한 담론이 과잉되어 있는 와중에, 내가 그 모든 것이 문제이고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도 의미 있고 더 많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다수가 청소년이라는 사실보다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여러 모습들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학교에서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거나 추모 행동 등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에게, 관심 끄고 공부나 하라고 다그치곤 했다. 혹은 일부 교사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애도하고 슬퍼하지 않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애도에 참여하도록 강압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또한 세월호 운동에 관련해서 청소년들의 표현과 행동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사례들은 청소년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과 함께 세월호 참사가 정부로부터 어떤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소년들이 이것은 순수한 추모 및 애도일 뿐이라고 말하는 모습도 청소년들이 마주하고 있는 한계와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한계를 드러낸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청소년만이 아니라 비청소년들도 함께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나 소비 심리를 말하며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고 세월호 참사에 관한 집회나 시위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동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만의 문제는 없다. 청소년들도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준 숱한 문제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월호와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청소년에 대해 그동안 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지를, 그리고 '청소년에 대해 특별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지는' 바로 그 현상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그려내고 어떤 역할로 소환하는지를 말이다.

또, 그런 그림 속에서 세월호 참사와 연관된 청소년들(유가족, 친구, 생존자 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활동가 호연씨는 세월호 참사의 청소년 피해자들에 관해서, "10대 피해자들은 대변, 해석, 진단, 치유되는 존재로 위치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주체적인 '사회적 화자'이자 증언자가 되는 과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라고 지적한다.

청소년에 관한 말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정작 청소년의 말들은 충분히 존중받고 비중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인식해야 하며, 어쩌면 청소년에 관한 그 넘쳐나는 말들이 청소년의 말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각심이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일어난 추모나 진상규명 요구 투쟁 속에서 청소년의 이미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실제로 투쟁에 참여한 분들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투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정서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왔는지 이야기할 때 '청소년'의 이미지와 존재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부모'와 '자식'을 강조하는, 가족주의적이고 청소년보호주의적인 정서가 강력하게 개입해 있고 이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경계심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들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가치, 죽음의 가치를 나누는 논리로 나아가고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품고 있진 않은가 의심한다.

정부의 태도를 보면 앞으로도 그럴 여유가 있을지는 회의적이지만, 지금 또는 이후에 할 수 있다면 세월호 운동이 사회적으로 낳고 있는 부수적인 효과들, 특히 청소년에 관해 낳고 있는 사회적 부작용들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운동이 세월호 운동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태그:#세월호, #청소년, #416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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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 4.16연대)는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세월호 피해자와 시민들이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홈페이지 : https://416ac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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