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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딸이 보고 싶은 이유

"이번엔 내려와도 되지 않나?"

수화기 저편 엄마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실린다. 설에 고향에 내려오라는 말씀이다. 사실 서른이 넘은 시점부터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는 것을 보이콧해왔다. 이유는 뻔하다. 대한민국에서 미혼남녀, 미취업자는 명절에 설 자리가 없다. 그 중 나는 미혼여성이다.

명절에 우리는 죄인이 된다. 평소 일상 곳곳에서도 우리는 죄인이다. 지난해, 한 정치인의 사위가 마약혐의에 연루되었는데, 그때 한 종편채널에서 이런 긴급 속보를 띄워보냈다. <딸, 32년간 한 번도 속 썪인 적 없어...> 나는 그 속보에조차 괴로워했다. 마약혐의에 연류된 사위조차 못 데려온 내가 더 불효녀라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내려왔으면 싶나 보다. 말씀 끝에 "친척들한테 네가 낸 책 사인도 좀 해주고 해야지" 하시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딸이 별 거 아닌 책 한 권 냈다고 친척들에게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짠해서였다. 그동안 얼마나 자식 자랑할 게 없었으면 저러실까. 미안해졌다.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 중국 시안의 결혼 사진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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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이나 부모님의 계모임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다.

'자식 자랑의 전쟁터.'

그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대학 입학 때였다. 그해 겨울, 아빠는 친구 아들이 Y대 법학과에 들어갔다며 한턱내는 자리에 참석하셨다. 물론 아빠는 내게 아무 말 없으셨지만 괜히 미안해졌다. 그때 난 서울소재 4년제 국문과에 겨우 입학했다. 사실 스스로는 이게 어디냐고 생각했지만(지금 생각해도 수학을 그렇게 못했는데 대학에 간 게 기적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공부를 잘했으면 아빠도 저렇게 친구들에게 한턱내며 좋아하셨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자랑 전쟁. 이 전쟁의 성격은 우리가 어렸을 때는 공부, 그리고 취업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결혼으로 변한다. 누구 딸은 어디 집안에 시집갔다더라. 누구 집 며느리가 혼수를 어떻게 해왔다더라. 유난히 전투력이 강한 사람들은 아무 말 안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기어이 "그 집 딸은 소식 없어?"라고 물어본다. 제발 상대가 아무 말 없을 때는 물어보지 말라고 법으로 좀 정해놨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 전쟁터에서 수년간 침묵으로 버틴 부모님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사실 이번 한번 정도는 내려가서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된 양(현실은 다르지만), 부모님 위신을 세워드리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이 싸움은 지는 싸움이다. 누군가 슬며시 '책도 좋지만 그래도 딸아(딸을 뜻하는 경상도방언)가 시집을 가야지...'라고 말을 하면, 그리고 그 옆에서 누군가 '아이고오, 지금 결혼해도 아(아이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는 낳겠나..'라고 추임을 넣으면 부모님의 풍선 같은 자식 자랑은 금방 바람이 빠질 터였다.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2
▲ 우즈베키스탄 히바의 결혼사진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2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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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즈려밟고 행복해진다

2014년 겨울. 한 여자 후배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혼하니까 행복해?" 그러자 그녀는 나를 흘깃 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근데 주변에 36살인 결혼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결혼해서 행복한지 모르겠는데 이 나이에 결혼을 안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것보다 행복한 것 같다고 그러다라고요."

옆에서 가만히 족발을 먹고 있던 결혼 안 한 36살 나는 졸지에 불행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굳이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길 해야했을까. 나중에 물어보자 그녀는 눈 하나 깜박 않고 말했다.

"언니가 언니 인생에 당당하면 됐지, 왜 그런 말을 신경 쓰세요?"

늘 일어나는 일이다. 결혼하는 여자 후배에게는 '결혼도 못하는 불행한 여자 선배' 취급을 받고, 50대 부장에겐 '모두가 보편적 삶을 사는 데는 이유가 있다'라는 설교를 들으며, 남자 동기에게는 '남자는 상관없는데 여자가 나이 들어 혼자면 궁상맞다'는 말을 듣는 일.

그 여자 후배는 나를 불행하다 말하며 자신은 행복한 신부가 된다. 그 50대 부장은 나를 철없는 인간 취급하며 자신은 주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 그 남자 동기는 나를 궁상맞다 말하며 자신의 삶은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마찬가지로 명절에 모인 친척들은 결혼 못한 나를 보며, 자식을 모두 결혼시킨 자신이 우리 부모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나 결정이 불안할 때 주위의 노총각 노처녀들은 보석같은 선물이다. 이들은 나를 '즈려밟고' 행복해지는 거다.

폄훼의 마음.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의 삶을 꼴사나워하고 어디 흠 잡을 거 없나 들여다보는 마음'들을 마주친다. 근본적으로 '폄훼'의 본질은 남을 깎아내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이 모든 폄훼의 행위는 결국 자신의 불안한 삶에 대한 인정욕구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과 하나하나 비교하며 자기위안을 하지 않는다. 남을 폄훼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후진 행동이다. 남을 깎아 내려 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는 달콤한 자기위안. 그 마음이 얼마나 볼품없고 촌스러운지 이제는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후지고 촌스런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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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지키스탄 호로그의 결혼사진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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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그해 겨울, 곧 결혼하는 후배에 의해 '불행한 여자'가 된 날, 나는 속상한 마음에 선배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선배, 루저 취급 받는 거 짜증나서 못살겠어요. 위장결혼이라도 해야하나?"

그러자 선배는 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혼하면 끝날 거 같지? 난 어제 후배한테 인간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를 들었어."

선배네 부부는 아이를 안 낳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선택'은 늘 '보편적 진리'에 무참히 공격받고 만다. '사람은 자식을 낳아봐야 인간이 된다'는 식이다. 인간이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말 '인간'이 되고 싶으면, 인간적으로 남의 선택도 좀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의견은 저 거대한 '보편적 진리' 앞에 맥을 못춘다.

어쨌든 선배 말이 맞다. 결혼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누구는 아이를 낳았는데 너는 안 낳냐'는 소리를 들을 거다. 이런 식으로 한번 남의 시선에 맞추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옆집 아이는 무슨 학원에 다니고, 그 집은 어떤 아파트에 살고 그 집 아빠는 어떤 차를 몰고... 이 모든 시선들을 쫓아가다 보면 내 인생은 없고 남의 삶만 남을 텐데, 그럼 난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 같다.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 파리 몽마르뜨에서 결혼사진 반성합니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남의 결혼사진이나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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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이 불안한 사람들은 줄곧 타인의 삶에 눈길을 던진다. 타인의 삶이 자신보다 더한 지옥이길 바라며. 그러니 이 후지고 촌스런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 눈길을 무시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론은 미혼남녀는 명절에 안 내려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지옥의 무한 반복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깨끗한 자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 자랑 전쟁에서 늘 패배자인 부모님 걱정이 남는다. 부모님은 결혼을 안 해 속을 썩이게 하던 딸이 그래도 책을 낸 작가가 되었다며 친척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이미 그 게임은 물 건너갔다. 작년에 결혼한 사촌동생의 부인이 만삭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새 생명의 탄생 앞에서 어찌 책 따위가 감히 명함을 내밀겠는가. 가뜩이나 출판계도 불황이구만.

덧붙이는 글 | 흔히, '골드미스'라는 말들 합니다. '금수저', '흙수저'처럼 노처녀계에도 '금미스'가 있다면 '흙미스'도 있답니다. 저는 '흙미스'이오니 제발 돈이라도 많이 모아놨냐고 물어보지 좀 마세요.



태그:#미혼남녀, #노총각, #노처녀, #명절스트레스, #흙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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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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