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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명절이 되면, 아빠를 빼고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 중 누구도 달가와 하지 않는 큰집에 갔었다. 각자 가정을 이룬 아빠의 팔남매형제들도 하나씩 큰 집에 도착해서 자기 식구들을 풀어 놓는데, 그 면면을 보자면….

허이!(판소리 추임새가 필요한 대목)

형제 보증 세워 사업 말아 먹은 큰아버지,
선산 잡혀먹은 또 다른 큰아버지,
빌려간 돈 갚지 않는 고모부, 
사고 치고 반성못하는 막내 삼촌이 되시겠다.

그 면면들이 안방에 둘러 앉아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밥을 나눠 먹다가, 케케묵은 감정들과 몇십 년 동안 덜 끝난 계산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며 밥상을 엎었다가, 멱살을 잡아 벽에 내다 꽂았다가, 고도리 판으로 호호하하 마무리 되는 듯했다가…. 다시 늦은 밤 술상이 들어가면 그 상을 엎으면서…, 다시 싸이클이 한 바퀴도는 그런 명절날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또 다른 큰 집이라는 무대의 한편 부엌에서는 늘 뚱한 큰 엄마가 묵묵부답을 수행하시고, 처세의 달인 둘째 큰 엄마는 명절특수 말로만 번드르르 무공을 펼치시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흥 처세의 우리 엄마도 또한 여전하셨으며, 그리고, 늘 고생하는 막내작은 엄마가 늦어지는 뺀질이 세째 큰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우기 바쁘셨다.

3대가 모인 아랫방이라고 관계 역학이 다르랴. 대학에 낙방한 나를 기어이 드잡이 해서 끌고 간 아빠를 나는 죽어도 이해 못하였고, 고생해서 좋은 대학 붙은 사촌은 나 때문에 면구스러워 했다.

부모들의 서로 받지 못했던 꿔간 돈과 부모들의 서로 팔아 먹지 못했던 선대의 전답들에 대한 배틀은 아직 어린 내 사촌들을 마루로 불러내어 애들끼리 키를 재어보고, 씨름을 시키고, 권투를 시키고, 키를 노래를 시키고, 성적표를 까고…. 그리 계속되던 소동은 꼭 누군가의 눈물바람으로 마무리됐다.

길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우야둥둥 뜨거운 떡국 한사발씩을 우야둥둥 엉덩이 걸쳐 마시듯 먹고
떡 몇점, 전쪼가리 몇 점, 생선 몇 마리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주면 우리 네 식구 모두 너무나 지친 표정으로 '아야… 우리 차도 안 막히는데… 택시 탑시다' 하며, 택시에 오르며, 행선지를 기사에게 알려 주면서, 우리 아빠는 늘 한마디 하셨다.

"내가 올 추석에 여기 오믄… 사람 새끼가 아녀!"

그런 명절이 나는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바늘에 실을 꿰어 쓸 때 실을 길게 잡으면 멀리멀리 시집간다고 한 말을 명심하며, 늘 바느질을 할때면, 실 길이가 양팔을 벌려도 남을만큼 짤라 써서, 내 실은 중간에 헝클어지기 일쑤였다.

아빠가 결혼식장에서 내 손을 신랑손에 넘겨줄 때까지, 나는 이 집안 사람이고, 고로, 아빠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지겨워서 신랑신부 동시입장을 내 결혼식에 관철시켜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사십 찍고 오십으로 달려가니, 원한 바를 이룬 이역만리 사는 딸년은 아직도 눈 마주치면 징글징글 싸우는 노인네 부부가 된 부모님께 '그만 쫌 하라고' 빽 하고 소리도 못 지르니 답답하고, 아프면 병원도 가깝고만, 답답한 소리만 하고, 후딱후딱 챙겨 가지 못하는 부모가 안타까워 진다.

몸뚱아리 늙어 가서 기력 없건만, 대체 들기로 한 철은 왜 여적지 감감들 하신지. 아직도 물정 모르는 소리와 걱정을 들을 때마다 예전처럼, 속만 터지면 좋으련만 흰 머리 가득한 부모 머리를 쓰담고 싶은 맘이 드니 미칠 노릇이다.

젊어서 마음 모질 때가 좋았다. 대차게 나는 신랑신부 입장한다고 결혼식장에서 아빠한테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때, 딸 하나인 우리 아빠는 참 당황했더랬다. 어리고 젊었던 마음 가득했던 상처들이 아직 내 생활에 스크래치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그 수 많은 상처들을 제치고, 문득문득 그때 그 통보를 들었을때 아빠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 그냥 인수인계해주시라고 할 걸 그랬나.' 내 할 도리는 다 하고, 상대방 준 상처준 거만 기억나게 말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악역을 맡길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피해자는 이래서 후지다. 상처를 입기만해도 힘들고, 그 상처를 갚아도 힘드니 말이다. TV에서 <불후의 명곡> 김광석 노래를 들으면서 따신 밥먹고 늘 쉰소리가 전문인 동생의 말이 생각났다.

입영열차 들으며 입대하고, 이등병의 편지 들으며 '쫄병 생활'하고,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내 20대를 빠이빠이 했는데, 김광석이 이리 가버리면 내 사십 즈음에는 어찌 준비하며, 내 오십은 어떠할지, 어찌 가늠하느냐고. 노부부 이야기까지 갈라믄 아직 아직 멀었는데 그 사이는 누구의 노래로 채우느냐는 말.

그러다, 오늘 불후의 명곡을 보고 알았다. 40대 찍고, 50대가 날 땡기니 감이 오고 만다. 노래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 키워 보니, 자식들이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내 마음 같이는 영 글른 거. 원망만 하믄 속이라도 편할 내 부모는 이제 기운 빠져 내 전투력에 적수가 되지 못한다.

호의가 계속되어 둘리가 되어 버린 나는 예전엔 몰라 당했고, 이젠 알고도 당해준다. 그러니,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온 송강호처럼 담배연기 참으로 맛깔스럽게 날리면서 김광석이나 들었다. '김광석이래, 와… 그리… 일찍… 죽었어' 하믄서.

… 난 아직도 … 그대를 … 이해하지 못 하기에… 그대 마음에 … 이르는 길을 … 찾고 있어… 라는 노래가 나오면, 그들의 좋을 청춘때에 헤불쩍 웃어주고, …여보 … 이제 … 안녕히 …잘 가시오 … 하고 노래가 나오면, 갈 수록 미워지는 특별한 재주를 지닌 남편에게 설마 하면서도, 눈길 한번 보내주고, 나의 노래는 나의 삶… 뿐이 아니라 나의 삶은 나의 노래가 된다는데, 고단했고, 고단하며, 앞으로도 고단할 일상에 날 벼락같은 말씀 마시고, 우리는 이제 됐다고…, 노래가 없어도 괜찮다고 … 여적지도 살았고 … 아직 남은 기운도 좀 있고 … 그러니 … 어찌되었든 한번 해본다고 … 그럼 된 거라고 … 전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그:#친척 명절, #김광석 노래,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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