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안정된 연기로 극을 뒷받침한 마이클 패스벤더. 이 영화에서 그가 펼친 숙련된 연기는 그 자신이 올해 오스카를 거머쥘 강력한 후보임을 강변한다.

▲ 스티브 잡스 안정된 연기로 극을 뒷받침한 마이클 패스벤더. 이 영화에서 그가 펼친 숙련된 연기는 그 자신이 올해 오스카를 거머쥘 강력한 후보임을 강변한다. ⓒ UPI 코리아


누군가 내게 스티브 잡스의 전기영화를 만들라 한다면 난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가 어떤 유년기를 보냈고 언제 어떤 계기로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는지, 창업 파트너인 스티브 워즈니악과는 어떻게 만났으며 사업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나갈 것이다. 그것이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을 스크린 위에 가장 충실히 복원하는 수단이자 관객이 그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대기적, 혹은 일대기적 구성이라 불리는 이 같은 서술방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나열함으로써 관객이 자연스럽게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끈다. 전기영화를 실존인물의 삶을 극 가운데 구현하는 장르로 이해할 때, 연대기적 구성만큼 전기영화에 어울리는 서술방식을 찾기도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전기영화가 연대기적 구성을 채택하고 있는 이유다.

물론 연대기적 구성이 장점만 가진 건 아니다. 필연적으로 사건의 나열이 될 수밖에 없기에 자칫 단조로워지기 쉽다는 단점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줄거리라면 위험은 배가된다. 안정적인 만큼 기교를 부릴 수 있는 여지 역시 좁다. 뛰어난 작가라면 틀을 깨고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셜 네트워크> <머니 볼> <뉴스룸>으로 빛나는 명성을 손에 쥔 아론 소킨 역시 그와 같은 작가다. 차근차근 스티브 잡스의 삶을 보여주는 대신 단 세 번의 사건으로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복원하길 선택했다는 점이 그가 어떤 작가인지를 보여준다. 익숙한 방식으로 익히 알려진 정보를 활용하며 스티브 잡스의 삶을 재구성하는 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어려운 길로 접어든 아론 소킨의 의도는 명백하다. 바로 극의 미학을 정점에서 살려내는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와 상징, 이면에 가득 깔린 복선과 디테일이 이 영화엔 시종 넘실거린다. 관객은 촌각을 다투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성품을 지녔으며 그들 사이엔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짐작한다. 어느 관계, 어느 사건 하나 쉽게 풀어 설명되지 않고 이야기는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린다. 내달리는 극도 현란한 연출도 나태한 관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기영화 위에 성장드라마를 덧씌우다

케이트 윈슬렛 <타이타닉>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남다른 관계를 유지해온 배우 케이트 윈슬렛. <스티브 잡스>에서 마이클 패스벤더와 함께 연기한 그녀는 올해 오스카의 주인으로 누구를 응원할까?

▲ 케이트 윈슬렛 <타이타닉>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남다른 관계를 유지해온 배우 케이트 윈슬렛. <스티브 잡스>에서 마이클 패스벤더와 함께 연기한 그녀는 올해 오스카의 주인으로 누구를 응원할까? ⓒ UPI 코리아


영화가 선택한 세 번의 사건은 1984년 매킨토시, 1988년 넥스트 큐브, 1998년 아이맥 런칭행사다. 영화는 각 행사에서 스티브 잡스가 프레젠테이션을 벌이기 직전 40분간을 실시간으로 조명한다. 등장하는 인물은 주인공인 잡스를 비롯해 스티브 워즈니악, 조안나 호프만, 앤디 허츠펠트, 존 스컬리, 크리산 브레넌, 리사 잡스 등이다. 무대 뒤 대기실이라는 제약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갈등과 화해, 성장 등 의미심장한 장면을 빚어내고 있다는 점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버드맨>과 유사하다.

완벽주의적인 극작가 아론 소킨은 전기영화 위에 성장드라마를 덧씌웠다. 이를 위해 스티브 잡스의 캐릭터는 유년기의 상처로 낮은 자존감을 가진 폐쇄적 인물로 표현됐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확고한 비전을 가진 인물이지만 인간관계를 파행적으로 끌고 가는 외골수적 기질로 주변 인물을 불행으로 몰고 간다. 그 자신의 삶 역시 순탄치 않다.

그런 그를 바꾸는 건 자신이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딸 리사다. 어느새 잡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딸이 메마른 아버지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는 과정이 사실상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스티브 잡스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성장드라마다. 아론 소킨의 선택은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전기영화 위에 한 편의 성장드라마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실존했던 잡스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건 어쩌면 그에게 첫 번째 목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잡스를 특징지은 수많은 설정은 기실 그의 변화를 보이기 위한 장치다. 예컨대 시간이나 사소한 절차에 필요 이상 집착하고 타인의 의견을 수용할 줄 모르던 그의 독단적 면모는 극 후반에 이르러 모조리 산산이 조각난다. 아론 소킨은 단 하나의 설정, 그러니까 영화의 가장 주요한 갈등으로 꼽을 수 있을 '맥2팀'의 소개 여부만 결론짓지 않고 있는데 이마저도 철저히 계산된 열린 결말로 여겨진다.

아론 소킨과 대니 보일, 그리고 마이클 패스벤더

현란한 교차편집 등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대니 보일의 연출은 아론 소킨의 꽉 찬 각본과 맞물려 영화를 더욱 화려하고 빠르게 이끈다. 때로는 속도감이 지나쳐 불친절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이 시대 가장 의욕 넘치는 작가들의 진검승부를 지켜보는 듯한 짜릿함이 더욱 크다.

강하고 빠르며 화려한 작가들이 빚어내는 격렬함 속에서 특별히 빛나는 건 스티브 잡스를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가, 그것도 친절한 설명이 아닌 인물 간의 대화에 묻어 지나가는 상황 속에서 자칫 관객이 흐름을 놓칠 수 있는 순간이 없지 않지만 마이클 패스벤더의 숙련된 연기는 낙오되는 관객을 용납하지 않는다. 확고한 원톱 배우가 관객의 감정선을 이끌며 이야기를 뒤쫓고 있기에 설사 흐름을 놓쳐버린 관객이라도 다시금 드라마에 녹아들 여지가 확보된 것이다.

아론 소킨과 대니 보일이 각기 이성과 직관의 영역을 담당한다면 패스벤더는 감성의 영역에서 영화를 강화한다. 골든글로브 등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치러지는 각종 영화제에서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일찌감치 기세를 올리고 있긴 하지만 마이클 패스벤더도 그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오스카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아론 소킨, 대니 보일, 마이클 패스벤더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량을 유감없이 입증한 작품이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명마처럼 지칠 줄 모르고 세차게 극을 이끌어가는 아론 소킨과 대니 보일에 더해 안정된 연기로 뒤를 받치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숙련된 연기가 높은 수준에서 조화를 이뤘다. 내용과 형식, 수준에 있어 앞으로 만들어질 전기영화는 한동안은 이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 영화 <스티브 잡스>의 포스터. 아론 소킨과 마이클 패스벤더의 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 스티브 잡스 영화 <스티브 잡스>의 포스터. 아론 소킨과 마이클 패스벤더의 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 UPI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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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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