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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5톤 덤프 트럭 한 대로 자식 둘 키우며 먹고 살고 있다. 아이들에게 빚 넘겨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 9월부터 일한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얼 먹고 사나? 그 사이 나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신용불량자 누가 만들었나? 다 건설 관계자들이 만들어 놓은 거다. 우리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중봉활강경기장 공사 현장 노동자 강성모씨)

"우리 빙설 대세계 건설 노동자들은 강원도개발공사 같은 공공기관을 믿고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돈 떼일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발주처, 시행사, 시공사 어디에서도 돈을 받을 수가 없다. 10원 한 푼 받지 못했다. 돈을 줘야 하는 시행사, 시공사는 협상 자리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돈을 받아야 하나?" (평창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 노동자 오경진씨)

"명절 때만 되면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건설 현장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건설 현장은 매우 절박하다. 산업 재해로 매년 700명씩 사망하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정부가 과연 우리를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전국건설노동조합 강원지역본부, 권혁병 본부장)

"체불, 정말 지긋지긋한 단어다. 그동안 설날과 추석, 양대 명절을 앞두고 수없이 체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정부에서 나오는 대책은 매년 똑같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삶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우리 건설노동자들은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유재춘 본부장)

'체불은 살인이다.' 3일 강원도청 앞에서 진행된 건설노동자 체불 실태 고발 기자회견.
 '체불은 살인이다.' 3일 강원도청 앞에서 진행된 건설노동자 체불 실태 고발 기자회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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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만 되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설날이 다가오면서 오히려 더 서글퍼지는 사람들이 있다. 건설 현장에서 임금 체불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올 겨울은 좀 더 따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같은 기대는 곧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설날을 코앞에 둔 그들에게 임금 체불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게다가 그들 앞에는 언제 끝날지 모를 노숙농성이 기다리고 있다.

평창 알펜시아 하얼빈 빙설 대세계 축제(이하 빙설 대세계) 현장. 축제 현장 곳곳 얼음을 쌓아서 만든 각종 조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조형물들은 수원화성과 황룡사지 9층 석탑, 그리고 콜로세움과 개선문 같은 대형 건축물들을 모방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작아도, 그 작품들 하나하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깃든 건 금방 알 수 있다. 한겨울에 대형 얼음 조각을 다루는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축제 현장 출입구 한쪽, 즐거워야 할 축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 눈에 띈다. 밝은 축제 현장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풍경이다. 그곳에 천막과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는 빙설 대세계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4개월째 임금과 장비 임대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장이다. 건설 노동자들이 한겨울에 얼음과 싸우며 일한 결과, 체불에 발목이 잡혀 여전히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빙설 대세계는 중국 하얼빈시와 국내의 트루이스트(주)라는 회사가 함께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 강원도개발공사, 강원도민회 중앙회 등이 후원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대규모 축제 행사다. 주최 측과 후원사 등을 보면, 꽤 공신력을 갖춘 행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축제 주최 측은 이 행사가 "세계 3대 겨울축제 중 하나인 하얼빈 빙설대세계가 대한민국 평창 알펜시아에서 웅장하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개최된다"고 홍보하고 있다.

물론, 평창에서 열리는 얼음 축제가 세계적인 겨울축제로 명성이 자자한 하얼빈 빙등축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래도 한국관광공사나 강원도개발공사 같은 공공기관들이 후원하는 축제인 만큼, 결코 하찮게 볼 축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축제를 위한 공사가 시작된 후,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 축제가 어떻게 해서 위에 열거한 공공기관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창 하얼빈 빙설대세계 축제 개장 시간 전, 현장에서 체불 임금 요구 집회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
 평창 하얼빈 빙설대세계 축제 개장 시간 전, 현장에서 체불 임금 요구 집회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
ⓒ 건설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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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기계 노동자들 "체불이 가정 파탄 부른다"

빙설 대세계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에 따르면, 지금까지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에서 발생한 체불 금액만 모두 11억 원에 달한다. 거기에 얼음과 눈을 조각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6억 원의 임금까지 포함하면, 모두 17억 원이 체불된 상태다. 그렇게 해서 임금과 장비 임대료 등을 받지 못한 사람들 수가 300여 명이다. 그들 중에는 건설 노동자들을 비롯해, 행사진행요원들까지 포함돼 있다.

노동자들은 공사가 시작된 후로 임금을 단 한 푼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덤프 트럭 등을 운전한 노동자들 역시 장비 임대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임금과 임대료를 받지 못한 기간이 길게는 4개월 전부터 지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건설 장비를 운영하는 노동자들은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그들은 "기름 값, 차량운영유지비 등 수백만 원을 갚지 못해 카드가 정지됐다"고 하소연했다.

건설 장비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체불은 특히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건설 기계 노동자들의 경우,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데 기름 값, 차량유지비, 차량할부금 등 매월 6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받아야 할 돈을 제때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체불이 발생하면 꼼짝없이 빚더미에 올라앉아야 한다. 그래서 건설 기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체불은 가정 파탄"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빙설 대세계 노동자들은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행사와 시공사 등에 거듭해서 임금과 장비 임대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도 임금을 지불하지 않자, 급기야 일주일 전부터 축제 현장 부근에 천막을 치고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그런데도 시행사 측은 여전히 임금과 장비 임대료를 지불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축제가 기대했던 만큼 수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등 자금 여력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곧 당장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아 노동자들을 더욱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자들은 또 시행사 측이 "노동자들에게 계약서상의 임금은 지급하고, 일부 추후 공사에서 발생한 임금을 지급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에도 분통을 터트렸다. 노동자들은 시행사 측의 이 같은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체불에 화가 나 있는 노동자들은 시행사 측의 이런 주장에 더 큰 분노를 나타냈다. 노동자들에 따르면, 시공사는 노동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이처럼 빙설 대세계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체불은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은 지금도 밤마다 휘황찬란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 곁에서는 여전히 임금과 장비 임대료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쓸쓸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왠지 낯설지 않다. 임금 체불 현장은 단지 이곳 평창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체불 해결 없이 올림픽 없다!' 길가에 늘어선 건설 장비들.
 '체불 해결 없이 올림픽 없다!' 길가에 늘어선 건설 장비들.
ⓒ 건설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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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체불 공사 중 98.9%가 공공기관에서 발주

전국건설노동조합 강원지역본부(이하 건설노조)에 따르면, 지난해 강원도에서 발생한 체불 금액만 136억 원에 달한다. 더 놀라운 것은 임금 체불 내용 중 98.9%가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공사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공사이기 때문에 좀 더 안심하고 공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노동자들에겐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건설노조가 발표한 '2015년 체불 현황'을 보면, 강원도가 발주한 '중봉알파인활강경기장 공사'에서만 30억 원에 달하는 체불 금액이 발생했다. 그리고 한국도로공사가 발주한 '동홍천-양양 고속도로5공구 공사'에서는 10억 원의 체불 금액이 발생했다. 체불 현장은 그 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에 건설노조는 "정부 발주 공사 현장에서조차 전혀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민간공사는 또 어떻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건설노조는 3일 '건설노동자 체불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강원도 내 건설 현장에서 체불 사업주가 처벌을 받았다는 뉴스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며, "과연 사회적 약자인 건설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건설노조는 그것은 "법을 지켜야 할 정부가 법을 위반"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부에 건설노동자들의 체불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발주처에서 노동자들에게 직접 지급하는 대금e지급시스템, 장비임대료 지급보증제도 준수 등 새로운 법안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건설노조는 "설 명절 이전에 체불 문제가 반드시 해결 되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강원도 전체 조합원 2300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예고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건설노조는 "알펜시아 하얼빈 빙설 대세계 축제의 화려한 불빛 저편에는 건설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화려한 불빛에도 축제 현장에 훈기가 돌지 않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설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임금 체불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올해 설날은 더욱 더 쓸쓸한 명절로 기억될 것이다.

평창 하얼빈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 한밤에 진행된 체불 임금 요구 시위.
 평창 하얼빈 빙설 대세계 축제 현장. 한밤에 진행된 체불 임금 요구 시위.
ⓒ 건설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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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금 체불, #빙설 대세계,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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