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야구팬들에게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이대호의 행선지가 마침내 정해졌다. 이대호는 3일 미국 프로야구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에 합의했다. 계약 기간 1년에 메이저리그 승격 보장이 없는 마이너리그 계약이다.

시애틀 구단이 정확한 계약 규모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대호가 스프링캠프 경쟁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고 여러 인센티브 조건을 충족할 경우 최대 400만 달러(48억7000만원)를 받을 수 있는 계약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호는 지난해 12월 초 일찌감치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윈터미팅에 참가하여 메이저리그 단장들과 만남을 가지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했지만 계약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이대호의 적지 않은 나이와 수비력에 대한 불안감, 빅리그에서 검증되지 않은 경력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

여기에 이대호의 전 소속팀 일본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연봉 5억엔을 넘어서는 최대 3년 18억엔을 제시하며 이대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대호의 메이저리그 진출 의지는 확고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있게 기다린 이대호는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개막을 며칠 남겨두고 드디어 시애틀과 계약에 성공했다.

이대호의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되면서 다음 시즌 빅리그에서 뛸 한국인 선수는 추신수(텍사스), 류현진(LA 다저스), 강정호(피츠버그), 오승환(세인트루이스), 박병호(미네소타), 김현수(볼티모어), 최지만(LA 에인절스) 까지 총 8명에 이른다. 이는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등 '메이저리그 1세대'들이 활약하던 2005시즌과 함께 가장 많은 숫자다. 이중 추신수와 최지만을 제외하면 6명이 KBO 리그 출신들이다. 한국프로야구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이대호는 한국인 타자로서는 역대 최초로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섭렵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험난한 주전 경쟁 앞둔 이대호

 지난 19일 오후 일본 도쿄돔 구장에서 열린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대회 준결승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 9회 초 무사 만루 때 대한민국 이대호가 2타점 역전 적시타를 친 뒤 주먹을 들며 기뻐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9일 오후 일본 도쿄돔 구장에서 열린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대회 준결승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 9회 초 무사 만루 때 대한민국 이대호가 2타점 역전 적시타를 친 뒤 주먹을 들며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대호의 계약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당초 이대호의 행선지로 유력하게 거론된 것은 휴스턴이나 세인트루이스 등이었고, 시애틀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소속이라는 점은 타격에 특화된 이대호의 장점을 감안하면 유리한 부분이지만, 문제는 이대호의 주포지션인 1루수와 지명타자에 비교적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 많다는 점이다.

가장 주목할 선수는 넬슨 크루즈다. 2014년 볼티모어와 지난해 시애틀에서 2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강타자다.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는 크루즈는 메이저리그 홈런왕 경력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MLB 지명타자 랭킹에서도 1,2위를 다투는 강타자다. 이대호에게 최적 포지션은 지명타자지만 크루즈가 건재한 이상 이 자리를 노리기는 쉽지 않다.

1루수는 베테랑 아담 린드와 유망주 헤수스 몬테로가 있다. 린드는 메이저리그에서만 10시즌을 활약하며 통산 타율 0.274·166홈런·606타점을 기록한 강타자다. 2015시즌에도 밀워키 소속으로 타율 0.277·20홈런·87타점을 올렸다. 시애틀은 지난해 12월 취약 포지션인 1루 보강을 위해 트레이드를 통하여 린드를 영입했다. 린드는 2016시즌 뒤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린드는 고질적으로 좌투수(2015년 타율 .221. 0홈런)에 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잔부상도 잦았다. 몬테로는 장타력을 갖추고 있지만 잠재력에 비하면 만년 유망주에 머물고 있는 선수다. 통산 타율 .253, 홈런도 28개에 불과하고 지난 시즌도 고작 38경기에서 5홈런 19타점에 그쳤다.

시애틀이 이미 1루자원을 두 명이나 보유한 상황에서 이대호를 다시 영입한 것은 그만큼 기존 선수들이 미덥지 못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현재로서는 시즌 초반 이대호는 린드-헤수스와 플래툰 시스템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교함에 더 강점이 있는 이대호의 능력이라면 공격력 면에서 충분히 이들을 제치고 주전 자리를 노려볼만하다. 다만 불안 요소로 거론되는 이대호의 1루 수비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가 변수다.

아시아 선수들과 인연 깊은 시애틀

1977년 창단해 올해로 40년을 맞는 시애틀은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빅리그에서도 유독 아시아 야구와 연이 깊은 팀이다. 시애틀은 일본계 기업 닌텐도가 대주주로 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스즈키 이치로와 사사키 가즈히로, 추신수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특급 메이저리거들이 모두 시애틀을 거쳤다. 현재도 일본인 투수 이와쿠마 히사시,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가 있어서 이대호의 새로운 팀동료가 될 예정이다.

시애틀은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다. 창단 이후 아직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것은 시애틀과 워싱턴 내셔널스 단 두 팀뿐이다. 그래도 나름의 전성기는 있었다. 2001년에는 무려 116승46패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을 세웠고, 1995년부터 2001년까지 포스트시즌에 4번이나 진출했던 시기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다. 랜디 존슨, 켄 그리피 주니어,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  여러 면에서 메이저리그에 한 획을 그은 슈퍼스타들도 이 시기에 시애틀을 거쳐갔다.

하지만 시애틀은 정작 우승권에 가장 근접했던 2001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뉴욕 양키스에 1승 4패로 허무하게 무너지며 월드시리즈 진출조차 실패했다.(이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바로 김병현이 있던 애리조나였다.) 시애틀은 2002년과 2003년에도 연달아 93승이나 거뒀으나 머니볼을 앞세운 오클랜드와 LA 에인절스 등 시애틀보다 높은 승률을 기록한 팀들 때문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유독 강호들이 운집했던 2000년대 초반 아메리칸리그(AL) 서부지구가 만들어낸 최대의 희생양이었다.

불운을 거듭하던 시애틀은 2004년부터 급기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프런트로 꼽히는 빌 바바시(Bill Bavasi) 전 단장이 부임하면서 트레이드와 대형 FA 영입 등에서 줄줄이 악수를 거듭했고 리빌딩에 실패한 시애틀은 서서히 꼴찌가 더 익숙한 AL의 약체팀으로 전락해 갔다. 이대호가 프로에 갓 데뷔하던 시절의 KBO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와도 웬지 흡사하다.

특히 바바시 단장은 팀의 미래를 책임질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잇달아 다른 팀에 퍼주는 삽질로 '대인배'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시애틀을 떠난 이후에 잠재력을 폭발시킨 선수들이 유독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추신수다. 시애틀에서 이치로의 그늘에 가려서 만년 유망주에 머물던 추신수는 2006년 클리블랜드로 이적하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시애틀 팬들에게 바바시는 지금도 금지어지만, 추신수에게만큼은 은인(?)이나 다름없다.

길어지는 시애틀의 암흑기, 이대호의 새로운 도전

바바시 단장은 2008년 결국 해임되었지만 시애틀의 암흑기는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시애틀은 116승을 달성했던 2001년을 끝으로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2004년 이후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것도 단 3번뿐이다. 시애틀은 지난 2015 시즌도 76승 86패(승률 0.469)로 지구 5개 팀 중 4위에 머물렀다. 이는 현재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이 소속된 구단 중 가장 좋지 않았던 성적이었다.

일본 소프트뱅크에서 2년 연속 정상을 맛봤던 이대호는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리빌딩팀의 일원으로 새출발을 해야한다. 시애틀은 지난해 팀홈런이 198개로 리그 5위였던 반면, 팀출루율은 3할1푼1리로 리그 11위에 머물렀다. 이대호는 장기인 정확한 타격과 출루 능력으로 시애틀의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유난히 KBO 출신 타자들의 빅리그 진출이 활발한 올 시즌 추신수, 김현수, 박병호, 강정호 등과 함께 펼칠 선의의 경쟁도 기대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성공신화를 개척한 이대호가 메이저리그에서도 한국 타자의 자존심을 이어갈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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