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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령 고갯길 정상에는 "여기서부터 비포장"이라는 사실을 적시한 도 경계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포장이 된 도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이었는데 이제부터 나오는 비포장 도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이라는 뜻이다.
 우두령 고갯길 정상에는 "여기서부터 비포장"이라는 사실을 적시한 도 경계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포장이 된 도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이었는데 이제부터 나오는 비포장 도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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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대리로 가려면 높이 580m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嶺)는 소(牛)의 머리(頭)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령(牛頭嶺), 우리말로 소머리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5년 11월 25일 우회도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 고갯길은 우리나라 3번 국도가 넘어가는 경유지로 이름을 떨쳤다. 총 길이 1096km의 3번 국도는 경상남도 남해에서 거창, 경상북도 문경, 서울,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평안북도 초산까지 이어진다. 

총 길이 1068km인 1번 국도는 목포에서 판문점을 거쳐 신의주까지 이어진다. 그에 비하면 2번 국도는 길이가 짧아 481km에 그치는데, 부산에서 출발하여 순천을 거쳐 전라남도 신안까지 대략 남해안을 달린다. 4번 국도는 군산에서 대전과 대구를 거친 다음 경주에 닿는 418km, 5번 국도는 거제에서 안동과 춘천을 거쳐 중강진까지 1252km를 간다.

우두령 고갯길 정상부에 '수렵 구역(경북 김천시)'과 '금렵 구역(경남 거창군)'을 나누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표식이 있으니 바로 뒤의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 전적지(址, 터)'가 바로 그것이다. 이 표석은 의병대장 중에서도 총 지휘권을 행사한 의병도대장(선조의 임명) 김면 장군이 이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두령 고갯길 정상부에 '수렵 구역(경북 김천시)'과 '금렵 구역(경남 거창군)'을 나누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표식이 있으니 바로 뒤의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 전적지(址, 터)'가 바로 그것이다. 이 표석은 의병대장 중에서도 총 지휘권을 행사한 의병도대장(선조의 임명) 김면 장군이 이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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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m라면 간단히 넘을 수 있는 손쉬운 고개는 아닌 듯한데 어째서 우두령이 우리나라 간선도로의 중요 길목이 되었을까? 하지만 생각보다도 580m는 그렇게 놓은 고개가 아니다. 우두령만 해도 남쪽으로 1255.3m 삼봉산, 1157.5m 양각산, 1018.5m 흰대미산이 자리잡고 있고, 북쪽으로 1290.7m 대덕산, 1317.3m 수도산이 버티고 있다. 우두령이 비탈을 타는 봉산조차도 높이가 우두령의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902.1m를 뽐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우두령을 '소백산맥의 대덕산에서 동쪽으로 가야산 방면으로 뻗는 지맥(支脈) 중 국사봉(875m)과 수도산 사이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고 기술한다. 우두령이 이 일대에서는 말 안장에 해당될 만큼 가장 움푹하게 내려앉은 지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두령은 우마현(牛馬峴)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두령에서 바라본 경북 김천시 방향의 풍경. 아득한 산길이다. 1980년이 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가 다녔던 이 길은, 그러나 지금도 폭이 4m밖에 안 되는 비포장도로이다.
 우두령에서 바라본 경북 김천시 방향의 풍경. 아득한 산길이다. 1980년이 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가 다녔던 이 길은, 그러나 지금도 폭이 4m밖에 안 되는 비포장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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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현은 농민과 상인들이 '재산 1호'인 소를 끌고 김천과 거창 일대 우시장에 드나든 고개였다. 또한 관리와 양반들이 말을 타고 넘은 산길이었다. 당연히 우두령 북쪽 아래인 김천시 대덕면 소재지에는 고려의 두의곡역(頭依谷驛)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때에도 장곡(長谷)역이 있어 역마(驛馬)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는 우두령 정상부 바로밑 외딴 마을 덕석마에 관용 숙소 소지원(所旨院)도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 구실을 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도 이 길은 교통요지답게 이용되었다.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자 '의문사'를 제기하며 소론 계열 강경파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경상도에서 호응한 정희량 등의 군대가 우두령을 넘나들었다. 이인좌의 난 때 맞서싸우다 전사한 이술원을 기리는 사당 포충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7호)가 우두령 남쪽 아래의 거창군 웅양면 소재지 노현리에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임진왜란 일본군도 넘으려 했던 우두령

이인좌의 난과 포충사

포충사(褒忠祠)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원촌3길 25-2(노현리)에 있다. 현지 안내판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7호인) 이 사당은 이술원을 제향하기 위해 1737년(영조 13)에 포충사라는 현판을 받아 이듬 해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1752년 거창읍 대동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술원 장군(1679-1728)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거창 출신으로 영조 4년에 거창 좌수(座首)로 있었다. 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서울로 북상하고, 안의현에서 정희량이 이에 합세하였을 때 이술원은 좌수로서 거창현감 신정모로부터 현내의 군사권을 위임받아 끝까지 대적하였으나 결국 정희량에게 생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포충사 누각
 포충사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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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1725년,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는다. 몸이 아픈 경종은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노론측은 경종의 아들이 없고 병이 많다는 이유로 연잉군(延礽君 :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뒷날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서둘러 당시 경종 보호를 내세웠던 실세 소론과 대립한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소론 중 과격파들이 장기간 정권에서 배제되어 온 남인 일부를 포섭해 영조와 노론 제거를 계획하고, 이윽고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최대 명분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영조측의 암살)이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한 기세를 몰아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서울로 북상한다. 그러나 24일 안성과 죽산에서 패하고, 청주성에 남아 있던 군대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등의 창의군에게 무너진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지만 결국 관군에게 토벌당한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후 소론은 재기불능이 되고 노론의 권력 장악에 속도가 붙는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침략해온 일본군도 이 길을 놓치지 않았다. 3번 국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구로다(黑田長政)의 제 3군이 서울까지 진격한 우로(경상우도 길)와 대략 일치한다. 고니시(小西行長)의 1군은 부산, 양산, 청도, 대구, 안동, 상주를 거처 조령을 넘는 중로(中路)를 택했고, 가토(加藤淸正)의 2군은 동래, 김해, 성주, 금산을 거쳐 추풍령을 넘는 좌로(경상좌도 길)를 거쳤다.    

김천을 점령한 침략군은 우두령을 넘어 전라도로 진격하려 했다. 전라도는 전통의 곡창 지대로, 일본군의 군량미를 해결해줄 수 있는 곳이었던 까닭에 그들로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필수 점령지였다. 우두령 정상 바로 아래 거창군 웅양면 어인마을 입구 '김면 장군 공원'에 세워져 있는 '임진왜란 구국 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의 내용은 그 당시 상황을 잘 증언해준다.

'(1592년) 7월 초순, 김천에 주둔한 왜적 천오백여 명이 전라도로 집입하려 우척현(우두령)을 넘을 때 고개 좌우에 군사를 매복 급습하여 적을 토벌하는 대승을 거둬 왜적이 전라도로 진격할 수 없게 했다. 우척현 전투는 임진왜란 산악전의 큰 전투로 산중지리에 밝은 산척(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약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전공은 컸지만 복병장 이형이 전사했다. (중략)

국왕께서 경상우도 의병도대장의 교서를 내려 경상도의 모든 의병을 통솔하고 익년 정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관군과 의병을 지휘했다. 장군은 1년간 격전기에 10여 차례 큰 전투와 30여 회 작은 전투를 치르며 갑옷을 벗지 않았다. 선산의 왜적 토벌 계획 중 김천 진중(陳中)에서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 몰랐다(只知有國 不知有身)."는 말을 남기고 1593년 3월 11일에 운명하니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통곡했다.

관찰사 김성일은 장계(狀啓,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장성(長城)이 무너지다. 국사(國事)가 흔들리다. 그의 충성심은 보석같이 빛나도다. 경상도 오른쪽이 보존된 것은 그의 공"이라 했다. 국왕이 크게 애도하며 예관(장례를 담당한 관리)을 보내 치제(임금이 제문과 제물 등을 보내어 신하를 제사지내는 일)를 하고 자헌대부병조판서에 추증(죽은 신하에게 벼슬을 내림),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공로를 기록)하고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 벼슬이 있는 신하에게 다시 벼슬을 추가)했다. 만석재산을 군비에 충당하며 나라 위해 바친 장군의 우국충정을 돌에 새겨 청사(푸른 역사)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경남 거창군 웅양면 우두령 정상부 인근 어인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
 경남 거창군 웅양면 우두령 정상부 인근 어인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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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척현 전투 등지에서 패한 일본군은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냥 한양으로, 평양으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따라서 평양성의 소서행장 군대 등은 '추위에 시달리고 극도의 식량난을 겪어 옥수수만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실정(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굶주림과 추위, 의병과 조선 수군의 분전, 명군의 개입 등에 못이겨 마침내 퇴각을 결정했다. 그만큼 김면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은 나라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 힘이 되었다.

그런데도 2015년 9월 9일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세워진 '김면 장군 공원' 표지석은 그 첫 문장이 애달프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찾아 먼 길을 달려온 답사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표지석을 세운 사람들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의 숭고한 선비 정신과 호국 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려'고 이 비를 세웠다고 말한다.

경상도 의병을 총지휘한 김면도 역사 속에 묻혀 있다니!

선조가 김면을 경상우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에 임명한 때는 1592년 11월이다. 의병도대장은 의병대장 중에서도 최고의 대장이라는 뜻이다. 선조는 김면에게 경상우도 지역의 모든 의병들을 총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렸던 것이다.

의병도대장 김면 아래에서 의병 좌장을 맡은 사람은 홍의장군 곽재우였고, 의병 우장은 1612년(광해군 4)부터 1623년(광해군 15)까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는 정인홍이었다. 그런 김면 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상태라면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준 우리 선조들의 창의 정신과 선비 정신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기리고 있다는 말인가!

김면 장군 공원
 김면 장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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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도대장의 '도'는 '가장 높다'는 뜻이다. 임금이 머무르는 성을 도성(都城)이라 부르고, 여러 목수를 거느리고 큰 공사를 진행하는 대장 목수를 '도목수', 넓은 땅을 가진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마름의 우두머리를 '도마름'이라 한 것은 '도'가 가진 뜻에 기인한다. 임진왜란 발발 몇 달 뒤부터 내내 권율의 자리가 되었던 도원수(都元帥) 역시 전군 최고 지휘관의 직책 이름이었다.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의병도대장이었던 김면 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이래서야 어떻게 김광순 경북대 명예교수가 쓴 '임진왜란 구국 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 비문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선조들의 올곧은 정신과 뜨거운 기백을 오늘날에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경북 고령군 쌍림면 구곡리 도암서원 왼쪽의 김면 장군 묘소와 신도비
 경북 고령군 쌍림면 구곡리 도암서원 왼쪽의 김면 장군 묘소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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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비 첫머리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김면 장군은) 비분강개하여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요!" 하고 분연히 창의(의병을 일으킴)하여 열읍(列邑, 여러 읍)에 기병유사(起兵有司, 의병을 모으는 담당자)를 두고 의병을 규합하니 수일 만에 친족(가까운 일가) 의사(義士) 8인과 사위 박산립 등 이천여 명이 모였다.'로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조차) 역사에 묻혀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상황이 재발했을 때, 배운대로 실천하려는 언행일치의 정신, 불과 며칠만에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는 이천여 백성의 운집 광경을 우리가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까?

선조들의 정신 기리는 사업 계속돼야

안타까운 마음에 젖은 채 '김면 장군 공원' 표지석의 뒷면을 모두 읽어본다. '이 비는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의 숭고한 선비 정신과 호국 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려 함이다'라는 첫 문장 아래에 사람들의 거주지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거창군수 이홍기, 거창 군의장 이성복, 거창 문화원장 이종천, 전 거창군수 정주환, 추진회장 고령 이대근, 청도 김재호'로 시작되는 인명은 모두 42명의 성명을 밝히고 있다. 

'경산 김영환, 고령 박종진 김칠현 김규열 김도윤 김중열 황순현, 고산 김재교, 공주 김창복, 과천 박종희, 나대 김일태 김재암, 논산 김영호, 대구 김원수 김영국, 대전 박봉관, 부산 김강식 김기현 김용근, 서울 소상호 박순일 최경애 김경동 김용갑, 안동 김수자, 용문 장찬주, 울산 김기열 김수현 김원현, 웅양 김옥자, 진주 조옥환, 천안 김재근, 청도 김수형 김성호 김영창, LA 김영돈, 고령김씨 양천문중 나대문중 청도문중, 어인마을 주민 일동'

빗돌에 새겨져 있는 명단을 지명 및 성명의 가나다 순으로 정리해 본다. 이 분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삶을 바친 선조들을 기리는 일은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역사의 올바른 주춧돌 하나를 놓는 선행이라 믿는다. 끝내 성명을 모두 기록할 수 없어 '주민 일동'에 포함된 분들이야말로 임진왜란 당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산천과 들판에 버려진 무명 용사들일 것이다.

경남 거창 웅양면 노현리(면소재지)에서 붉은 선을 따라 들어가면 웅양저수지(사진 중앙의 흰색 둑) 왼쪽을 타고 오르막을 올라 김면 장군 전적지인 우두령 정상으로 간다.
 경남 거창 웅양면 노현리(면소재지)에서 붉은 선을 따라 들어가면 웅양저수지(사진 중앙의 흰색 둑) 왼쪽을 타고 오르막을 올라 김면 장군 전적지인 우두령 정상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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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면, #우두령, #우척현, #임진왜란,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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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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