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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 옆자리에 장모님을 모시고, 슬픔과 안도가 같이한다
▲ 이천호국원에 모신 장모님 7년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 옆자리에 장모님을 모시고, 슬픔과 안도가 같이한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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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이 계시는 이천호국원까지 모시는 날들은 유례없는 강추위의 초반기였다.

"엄마가 당신이 갑자기 보고 싶다고 하셨어."

장모님과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처형의 말과 안부를 확인해보라는 말에 집을 나서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같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처가에서 장모님은 뇌출혈로 쓰러져 계셨다. 수술을 하지 말라는 장모님의 평소 뜻을 어겨가며 수술을 했지만 보름 만에 소천하셨다.

"그래도 보름 동안이라도 이별하는 시간이 있었잖아. 장인어른처럼 갑자기 돌아가시면 얼마나 허망했겠어."

나는 아내를 위로했다.

장모님은 8년 전 예기치 못한 일로 귀국한 우리 가족의 생활을 하나하나 신경 써주셨다. 귀국 다음해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고, 남은 게 상처밖에 없던 우리 가족은 거처를 장모님이 계신 부평으로 옮겼다.

처가까지 10분도 안되는 곳에 살았지만 내가 처가에 가는 건 1년에 명절을 빼면 다섯 번도 채 되지 않았다. 애교 없는 사위였지만, 내가 가면 술 한잔이라도 마시고 가라는 장모님. 그리고 그것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는 아내. 나는 그 미묘한 신경전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술 마시는 것보다는 이곳저곳 아프신 장모님이 한잔하시는 게 더 마뜩잖았을 것이다.

육개장, 조기찌개 그리고 삼겹살 김치볶음

돌아가신 장모님의 냉장고 안에는 여러 가지 식재료가 있었다.
 돌아가신 장모님의 냉장고 안에는 여러 가지 식재료가 있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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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라는 허망한 시간에 장모님을 모시고 돌아왔다. 아내는 5남매의 막내지만, 처가 근처에 사는 유일한 자식이기에 주인없는 처가를 살피는 건 우리 가족의 몫이 됐다. 가장 급한 것은 처가 냉장고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한 대의 중형 냉장고와 작은 냉장고 그리고 한 대의 김치냉장고를 정리하는 건 결코 녹록지 않았다.

병원에 계실 때 냉장실에 둔 밥처럼 처리할 수 없는 음식같이 상한 것들은 우선 버렸다.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냉동실에 있는 각종 식자재들이었다. 둘째 처형이 사다 드린 소고기 양지, 두세 뭉치로 있는 삼겹살 등 고기류부터 내가 사드린 영광 굴비나 제사 때 쓰기 위해 사다놓은 조기 등 생선류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우리집 냉장고로 옮겨야 했다.

갑자기 닥친 식자재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연구에 따른 결과물 생산은 내가 맡기로 했다. 소고기 양지와 고사리는 '육개장'으로, 제사용 조기는 '조기찌개'로, 오래된 삼겹살은 볶음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육개장은 해보지 않은 요리라 무리가 따랐다. 잘 쓰지도 않는 숙주나물 등의 다른 부자재를 샀다. 드디어 소고기 양지를 끓이자 집안 가득 냄새가 배었다. 보양식이라고 떠들었지만 고기를 싫어하는 아내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그래도 아들은 두 끼를 거뜬히 먹어줬다.

삼겹살은 김치볶음 등의 요리로 소화하려 했지만 번번이 돼지 냄새를 잡지 못했다. 특히 조리한 음식 전체를 버린 후에 한 뭉치의 묵은 삼겹살 역시 함께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릴 때는 스스로도 큰 죄책감이 일었지만, 실패한 요리의 잔영으로 어쩔 수 없었다.

조기찌개는 생선 냄새를 제어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자극적인 양념으로 생선 특유의 냄새를 없애 그래도 버리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처가엔 많은 식자재가 있었다. 도토리묵가루도 적잖이 있어 나는 생전 처음으로 도토리묵 쑤기에 나섰다. 처형의 말대로 가루와 물을 1대 6으로 섞어서 묵쑤기를 시도했다. 묵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소금·참기름·식용유를 넣고 묵을 완성했다.

"옛날에 엄마랑 남한산성 아래에서 묵을 먹은 적이 있는데, 이 맛이 그맛이야. 정말 맛잇는데."

묵을 먹은 아내는 자신이 먹어본 묵 중에 손꼽히는 맛이라고 칭찬했다. 쑤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재료가 중요할 테니 크게 자만할 일도 아니지만 앞으로 내 레시피에 묵도 포함될 거라는 확신이 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이 집의 한 시대는 이렇게 정리됐습니다

장모님이 쓰러진 시간으로부터 이제 50여 일 남짓 지났다. 그 50여 일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장모님이 쓰러진 시간으로부터 이제 50여 일 남짓 지났다. 그 50여 일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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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음식을 해가면서 시간은 갔다. 처음에 처가에 가면 마치 물건을 훔치러 온 자식처럼 느껴져 죄송스러웠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하지만 정작 더 걱정스러운 것은 처가에 있던 많은 식물들이었다. 장모님을 모시고 온 다음날 꽃이 핀 선인장을 비롯해 수십여 가지의 식물들은 주인을 잃은 탓에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선인장조차 말라죽게 한 우리 가족이 장모님의 사랑을 가득 받은 식물들을 돌볼 자신이 없기에 결국 입양을 보내야 할 것이다. 식물들 가운데는 화분에서 뽑혀져 버려질 것도 있을 게 뻔하기에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49재를 지내면서 처형들이 하나둘씩 처가에 들러 가재도구들과 유품들을 정리한다. 기본적인 정리를 마치면 유품정리 업체를 불러 마무리할 것이다. 50년이 넘는 장인장모님의 결혼 생활, 30년가량 살았던 이 집의 한 시대는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장모님이 쓰러진 시간으로부터 이제 50여 일 남짓 지났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적지 않은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50일은 우리 세 가족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제 중2가 되는 아들 역시 항상 옆에 있던 외할머니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죽음이라는 걸 미세하게나마 감지하는 시간이 됐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한때의 희망이 실버 잡지를 하면서 시골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잘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마흔 후반인 나 역시 그곳이 이제 한 세대 시간으로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소중한 의식이었다는 생각이다.


태그:#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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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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