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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만 나와도 최소 4~5층짜리 건물이 즐비하다. 하늘은 건물숲 때문에 귀퉁이로 밀린다. 의식해서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는 한, 너른 하늘 한 번 보지 못하고 귀가하기 일쑤다. 하늘뿐 아니라 땅도 문명에 내준 지 오래다. 콘크리트 땅만 밟고 살다보니 어쩌다 흙길을 밟을 땐 어색할 정도다. 흙이 움푹 들어가면서 느껴지는 물컹함이 반가워, 제자리를 맴돌며 걸어보기도 한다.

하늘과 땅을 문명에 내주고 살면서 우리의 시야는 도로와 건물 사이에 갇힌다. 게다가 고용절벽이니,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니, 그럼에도 청년 실업률은 몇 년 만에 최고라느니, 갖가지 위협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든다. 물리적 시야도, 심리적 시야도 한껏 좁아진 채 우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좁은 땅에 워낙 많은 경주마가 달리다보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상처투성이의 경주마는 집에 돌아와 자기만의 방에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영화 '헤이마(Heima)'의 한 장면
 영화 '헤이마(Heima)'의 한 장면
ⓒ Klikk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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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 이계적 풍경, 세계 최하위 수준의 인구밀도(2.9명/㎢, 한국은 493명/㎢). 아이슬란드를 몇 년 전부터 동경한 이유였다. 우연히 알게된 이 나라는 한국과 정반대의 세계였다. 아이슬란드의 국민 밴드 '시규어 로스'는 드넓은 초원을 무대 삼아 공연한다. 관람객은 들판에 엉덩이 깔고 앉아 세상 가장 여유로운 표정으로 음악을 즐긴다. 압도적 자연 속에서 관람객은 점처럼 보인다. 여백은 자연이 채운다.

친구는 연신 반복했다. "이렇게 사람 없는 곳은 처음 본다"고. "이렇게 고요했던 적이 정말 오랜만"이라고. 단지 얼음 트레킹을 하러 갔던 철원에서 우리의 시야는 오랜만에 활짝 트였다. 여행(旅行)지에서마저 경주마가 되기 십상인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우리는 나그네(旅)처럼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行).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아이스링크장

한탄강 태봉대교~송대소 구간
 한탄강 태봉대교~송대소 구간
ⓒ 김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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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얼음 트레킹의 출발지 '직탕폭포'
 한탄강 얼음 트레킹의 출발지 '직탕폭포'
ⓒ 김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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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직탕폭포였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폭포가 강 전체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평소엔 보잘것 없는 이 작은 폭포가, 한겨울엔 군데군데 얼면서 제법 볼만한 풍경이 된다.

여기서 곧바로 얼음 트레킹을 하고 싶어도 아쉽지만 좀 더 가야 한다. 번지점프대가 있는 태봉대교까지 가야 강 가운데까지 깊게 언다. 그제서야 반대편으로 걸어서 가로지르는 게 가능해진다. 직탕폭포를 구경한 뒤 강 밖으로 나와 보행로를 따라가자. 조금만 가면 있겠지, 하고 강 가장자리를 열심히 따라갔다간 힘만 뺀다. (우리가 그랬다..)

얼음트레킹 코스
 얼음트레킹 코스
ⓒ 카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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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대교서부터 강 위를 가로지를 수 있다
 태봉대교서부터 강 위를 가로지를 수 있다
ⓒ 김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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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의 태봉대교부터 송대소까진 강폭이 넓고 유속이 느려 얼음이 단단하다. 큰 여울(한탄漢灘) 한가운데까지 10센티미터 이상 언다. 이제 진짜 놀 시간이다.

한탄강은 산악지대를 관통해 협곡과 절벽이 많다. 수십만 년 전, 한탄강 근처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하던 시기, 이곳에 용암이 흘렀다. 용암이 식은 자리엔 사각·육각기둥 모양의 돌이 들어서 이국적인 한탄강 풍경을 만들었다. 한탄강 곳곳의 주상절리는 그렇게 형성됐다. 강이 얼어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되면, 평소엔 멀찍이서 바라봤어야 할 기암괴석을 눈앞에서 만질 수 있다.

눈이 덮이지 않은 곳을 걸어갈 때면 진짜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
 눈이 덮이지 않은 곳을 걸어갈 때면 진짜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
ⓒ 김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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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모양으로 생긴 한탄강 구간
 한반도 모양으로 생긴 한탄강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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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소를 지나면 다시 물이 흐른다. 강에서 빠져나와 조금 걷다 보면 다시 강이 언 게 보인다. 그렇게 걷다 보면 한반도를 닮은 강줄기도 나오고, 인공폭포도 나오고, 김일성(1948년 착공)과 이승만(1958년 완공)이 각각 반씩 만들었다는 승일교도 나오지만... 초반에 힘을 많이 뺀 터라 결국 끝까지 가진 못했다.

송대소에 머물면서 놀기만 해도 좋은 얼음 트레킹

그럼에도 얼음 트레킹에 아쉬움은 없었다. 굳이 직탕폭포에서 승일교까지 완주하지 않아도 좋다. 얼음 트레킹이라는 신기한 체험을 즐기는 게 목적이라면, 송대소에 오래 머물면서 충분히 노는 걸 추천한다.

트레킹 코스 중 폭이 가장 넓은 곳이라 넓은 스케이트장을 통째로 빌린 느낌이 날 것이다. 처음엔 김연아로, 엘사로 빙의해 별의별 짓을 다 하지만 곧 지친다. 그러다 강 한가운데서 멈춰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이내 대자연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물 위에 서 있단 것도 잊게 된다. 적막함이 몇 분간 지속된다.

강 한가운데서 멈춰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강 한가운데서 멈춰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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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가는 길에 만난 강아지들
 한탄강 가는 길에 만난 강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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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뿐 아니라 주변 어디를 가도 사람이 드물다. 저 멀리서 사람 비스무리한 게 보이면 반가울 정도다. 평일의 한탄강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오히려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이 보인다. 우리를 봤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외부인의 등장에 보는 즉시 짖어대거나, 쫄랑쫄랑 따라오면서 배를 내밀거나. 그 도도하다는 고양이마저 살갑게 군다. 그만큼 사람 볼 일이 적었으리라. 어느새 다가와 머리를 내밀었다. 쓰다듬자 주변을 빙빙 돌더니 배를 내줬다(!). 가려하자 따라오기까지 했다. 단 2~3분 본 건데도 그냥 가기엔 괜히 미안했다. 몇 번이고 뒤돌아봤다.

강아지가 아닙니다. 고양이입니다
 강아지가 아닙니다. 고양이입니다
ⓒ 김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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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는 길은 무척 피곤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는 것만 해도 1시간 넘게 걸렸다.택시가 다니지 않아 카카오택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몇 백 미터를 걸어가도 거기서 30~40분을 기다려야 한다. 언제 버스가 올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몇 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한탄강을 벗어나 도로·자동차·건물 등 익숙한 풍경이 보이자 이내 조급해진 것이다. 버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니 정류장을 떠나기도 어려웠다. 10여 분을 불안해하다 20분이 지나자 침착해졌다. 차분히 기다릴 수밖에 없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청춘 일행은 아이슬란드인이 요정을 믿는 게 이해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인이 보는 풍경을 그들도 같이 보면서 어렴풋이 공감한 것이다. 며칠뿐이지만 그들이 사는 환경을 체험하면서 동화된 것이다. 호젓한 풍경 속에 녹아들었고, 자연에 대한 경외를 공유했다.

나 역시 철원을 여행하면서 조금 더 여유로워졌고 잠시나마 충만했다. 평소보다 고개를 더 들고 멀리 바라보며 걸었다. 물론 이 또한 금세 잊힐 것이다. 다시 짜증을 내고 불안해할 것이다. 시야 역시 좁게 갇힐 것이다. 건물숲과 인파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조급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괜찮다. 문득 철원에서의 추억이 생각나 몇 시간만이라도 차분히 보낼 수 있게 된다면, 이번 여행은 그걸로 족하다.

한탄강을 걸을 수 있는 시기는 2~3주라 한다. 한파가 끝난 지 1주일 됐다. 강 위를 걸으며 한적함도 느끼고 싶다면, 따뜻해지기 전 철원에 가라.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쳐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평일에 가길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중복 게재



태그:#한탄강, #얼음트레킹, #철원,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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