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끝나지 않는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 책표지.
 <끝나지 않는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 책표지.
ⓒ 보리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충청북도 영동군 횡간면 노근리와 하가리 일대에서 참전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위치한 경부선 철도 및 쌍굴 일대에서 미 공군기의 공중폭격과 제1기병사단 소속 미군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죽었다. 시체 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극히 일부 사람들은 눈이나 코를 잃는 등과 같은 상처와 정신적인 상처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사건 발생 직후 이를 보도한 <조선인민보>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만 400여 명.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망자만 최소 200여 명이다. 그런데 온 가족이 죽은 경우도 있으며, 한국전쟁 발발 한 달쯤이라 다른 지역의 피난민들까지 섞여 있을 가능성까지 있어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정확한 피해규모를 파악하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노근리(양민)학살사건, 또는 노근리사건', 그 대략이다.

이 사건은 당시 자식 둘을 잃은 노근리의 한 주민이 세상에 알리기까지 까맣게 잊혀졌다. 사건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노근리사건희생자 유족회' 회장이었던 고 정은용씨. 그는 1960년 10월 27일, 미국 정부에 노근리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인 1977년에 노근리사건을 다룬 중편소설을, 1994년에는 장편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함으로써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알렸다.

지금 현재 노근리사건 현장인 쌍굴다리 인근에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인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미국 정부가 미군의 양민 학살 사실을 인정, 그 결과 조성된 공원이다. 아울러 학살 현장 중 한곳인 쌍굴다리는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정은용씨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수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숱한 우여곡절과 노력을 만화로 기록한 이 책 <끝나지 않은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보리출판사 펴냄)의 원작자는 정은용씨의 아들인 정구도씨. 1990년대 초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가 쓰고 있던 원고(<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보게 된 그는 아버지의 집필을 거든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이후 20여 년 동안 아버지 정은용과 함께 노근리사건의 진상규명과 사건해결을 위한 백방의 노력을 해왔다.

이 만화 끝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살상사건 현황도'와 함께 그 리스트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전국적으로 자그마치 160건이나 된다. 이중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미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으로 공식 확인, 진실규명이 결정된 사건은 53건이다. 자칫 묻힐 뻔 했던 160건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이 그나마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노근리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그 결과 덕분이라고 한다.

노근리사건의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등록문화재 제59호)'
 노근리사건의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등록문화재 제59호)'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사실 처음부터 노근리사건의 진실규명은 힘들었다. 정부와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가 높은 데다가, 군사독재정권의 시기까지 거쳐 왔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노근리사건을 바탕으로 한 책의 출간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언론들도 외면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 힘을 얻게 된 것은 AP(미국연합통신)의 보도(1999년 9월). AP는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뒷받침하는 미군 공식문서를 발굴, 참전미군들의 증언과 함께 전세계에 타전함으로써 세상에 알린다(이 보도로 3명의 AP기자는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1950년 8월 29일, 제1기갑사단장 호버트 게이 장군의 포병사령부 전문일지)

노근리사건 말고도 미 지상군에게 피난민을 사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증거 문서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피난민 무차별 사격이 적어도 한국전쟁 초기에 미8군 사령부의 기본정책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피난민들은 사냥감"(1950년 8월 29일, 제1 기갑사단장 호버트 게이 장군 전화 통화문)

이 문서는 미군들이 노근리 피난민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였다.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인종차별적 속어인 국(gook)이란 단어가 있다. 미국 속어사전에는 이 말이 통상 갈색 인종이나 비기독교 동양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특히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베트남인을 통칭해 많이 써서 널리 퍼진 말이지만, 그 어원은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한국에서 '국'을 따와 한국인을 비하할 때 쓰던 말이 굳어진 것이다. - <끝나지 않은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에서.

미국 정부는 AP가 발굴한 문서 외에 그보다 훨씬 많은, 그리고 명백한 근거자료들이 자신들에게 존재함에도 노근리에서 저지른 만행을 계속 부인해 왔다. 학살 당시 해당 부대인 1기갑연대에 복무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증언자로 내세워 잘못된 진술을 하게 하거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작전상 어쩔 수 없었다'와 같은 논리의 주장을 하게 하는 등으로 미군 참전, 그 희생을 우선 강조함으로써 최대한 발뺌하고자 한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 미국의 입장을 우선 헤아리거나 입김에 꼼짝 못하고 진상규명을 회피하는 등과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와중에 학살 현장인 쌍굴에 시멘트를 덧발라 탄환 자국을 없애는 등과 같은 일도 벌어진다. 그리고 쌍굴에 박힌 탄환을 미국 단독으로 수거해가려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일련의 방해로 노근리사건은 축소되거나 은폐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AP통신의 보도를 계기로 점차 우리나라에서 반미 분위기가 확산, 고조된다. 이에 1999년 10월,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협의에 착수한다. 그와 함께 '노근리양민학살사건 정부대책단 및 진상조사반'이 구성된다. 그리고 2001년 1월 12일 한·미양국조사단은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것을 인정,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다.

2004년 2월,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7월부터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이 추진되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는 고 정은용씨가 서울 소재 주한미군 소청사무소에 노근리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상규명을 받기까지의 50여 년에 걸친 총성 없는 싸움 그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고 정은용씨와 함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노력을 해온 정은용씨의 이들 정구도씨. 이 만화 원작 <끝나지 않은 전쟁> 원작자이다.
 고 정은용씨와 함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노력을 해온 정은용씨의 이들 정구도씨. 이 만화 원작 <끝나지 않은 전쟁> 원작자이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노근리 평화공원 위령탑
 노근리 평화공원 위령탑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불과 몇 달 전까지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사드가 일반인들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다. 그동안 미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에 다소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조차 북한의 미사일 관련 움직임에 불안해하며 사드 배치에 희망을 두는 것 같다. 이런 시점에 미국의 오점 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이와 같은 책 소개가 일부 사람들에게 의도와 달리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지도 혹시 모르겠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세계 경찰국가라고 말하며 여러 전쟁에 참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미국은 언제든지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미군은 제2, 제3의 노근리사건을 저지를 것입니다.

다시는 노근리에서처럼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반드시 손해배상을 받아야하고, 그 금액 또한 미국 정부에 부담이 될 만큼 큰 액수여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 정부가 군인을 훈련시킬 때부터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부디 이 일을 통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군대가 전시 때라 하더라도 민간인 인권은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역사적 교훈을 남길 수 있게 노력해 주십시오. - <끝나지 않은 전쟁-노근리 이야기 2부>에서.

이 말에 동감한다. 노근리사건이나 미군의 경우에 불과하랴. 노근리사건과 같은 무고한 희생들이 이미 진즉에 수면 위로 떠올라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라도 있었다면 셀 수조차 없는 무고한 죽음들은 훨씬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정착할 곳을 구걸하며 지구촌을 떠도는 수많은 난민들의 고통은 훨씬 줄어들었으리라. 이런 진심이 제대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앞서 고 정은용의 장편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한 만화 <그 여름날의 기억-노근리 이야기 1부>가 출간됐다. 두 권 모두 '빨치산'과 '제주 4.3항쟁', '고 김근태씨의 남영동에서의 22일'처럼 제대로 알려질 필요가 있는 사건들을 바탕으로 작업들을 해오고 있는 박건웅씨(<꽃>, <홍이이야기>, <짐승의 시간>,<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삽질의 시대> 등 여러 권)가 그렸다.

덧붙이는 글 | <끝나지 않은 전쟁 - 노근리 이야기 2부 > 박건웅 (그림) | 정구도(원작) | 보리 | 2015-11-20 | 25,000원



노근리 이야기 세트 - 전2권 - 그 여름날의 기억 + 끝나지 않은 전쟁

박건웅 만화, 정은용.정구도 원작, 보리(2015)


태그:#노근리사건, #등록문화재 제59호, #노근리 쌍굴다리, #노근리 평화상, #정은용 정구도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