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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낯선 여행자들을 이렇게 불편하게 해도 되는 거예요? 초행길인 외국인들에게 아예 죽도록 고생해보라며 놀리는 것 같아요."

추적추적 겨울비 내리는 브뤼셀에서 숙소를 찾아 거리를 한참을 헤매는 도중 아이가 울먹이며 내뱉은 하소연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일단 지도만 손에 쥐면 그 어디든 쉽게 찾아다녔기에 이곳에서의 '방황'은 낯선 것이었고, 두려움마저 들게 했다. 브뤼셀의 겨울 해는 유독 짧았고, 오후 다섯 시가 갓 지났을 뿐인데 금세 주위는 어두컴컴해져버렸다.

주머니 속에 스마트폰이 있었지만 단 한 푼이라도 아낄 요량으로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아무렴 내로라는 선진국인데 곳곳에서 자유롭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을 줄로 여긴 탓도 크다. 흔히 배낭여행자들의 필수품이라는 구글앱의 도움 없이도 제 집 드나들 듯 외국 여행을 즐겨온 우리 가족이 길을 잃고 헤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도에도 영어 표기가 돼 있지 않다니... 

지도를 얻기 위해 늘 하던 대로 기차역 구내의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어디를 여행하든 맨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막상 지도는 구했으나 영어로 된 게 없었다. 그나마 도로명만 적혀있을 뿐 그 흔한 쇼핑몰이나 유명 관광지조차 표기돼 있지 않았다. 하물며 거기에 우리가 찾는 값싼 숙소의 영어 이름이 적혀있을 리 만무했다.

거리 곳곳에 세워진 도로 표지판과 주변 안내도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만 병기돼 있어 하나같이 무용지물이었다. 동서남북 방향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아 순식간에 미아 신세가 됐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두려움은 배가 됐다. 웬일인지 비오는 도심 거리에는 오가는 택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이는 출발하기 전 읽었던 여행 책자에서 벨기에 브뤼셀은 유럽의 다른 여느 도시에 비해 특히 치안이 안 좋다는 글을 읽었다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아는 게 병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기차역 주변은 물론이고, 광장과 도로 곳곳에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즐비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여느 때 같으면 보기에도 부담스러웠을 그들이 이렇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네덜란드에서 벨기에로 넘어오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풍경이 있다면 바로 무장 경찰들이 곳곳에 깔려있다는 거다. 경찰차들이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비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 또한 흔히 볼 수 있는데, 언뜻 수시로 강력 사건이 벌어지는 곳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긴 브뤼셀 주변은 얼마 전 전 세계를 경악시킨 파리 도심에서의 야만적인 테러가 모의됐던 곳이다.

숙소 찾아가는 길이 순식간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가 돼버렸다. 숙소의 영문 이름만으로는 찾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뤼셀 중앙역에서 그다지 멀지않다는 정도의 헐거운 정보만으로는 애초 어림없는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외국에선 택시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우리 가족의 여행 원칙이 깨질 판이었다.

숙소의 이름 아래 깨알같이 프랑스어 주소가 병기돼 있어 택시 기사에게 보여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6시만 되면 대부분의 상가가 철시한다더니 택시도 그런가 싶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무작정 기다릴 바에야 어떤 지도나 안내판에도 적혀있지 않아 조그만 골목길일 것 같은 그 길을, 무모할지언정 직접 물어 찾아가기로 했다.

아뿔싸, 프랑스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니 행인들에게 길을 묻는 건 차라리 '보디랭귀지'에 가까웠다. 어딘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 속에 지쳐갈 무렵, 한 젊은 여성이 수호천사가 돼 나타났다. 주소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곳을 안다면서 영어로 또박또박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무엇보다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왜 그리 고맙게 들리던지.

그가 알려준 관건은 길의 모퉁이마다 세워진 표지판의 길 이름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 브뤼셀의 중심인 구시가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비좁다. 그만큼 길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더욱이 프랑스어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영어와 사뭇 다른 알파벳을 대조해보는 것조차 버거운 일인데, 길 이름마저 길다.

한 시간 넘게 거리를 헤맨 끝에 드디어 변변한 간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숙소를 찾았다. 입구는 어둡고 통로는 길었으며, 방에 오르는 계단은 가팔랐다. 경비를 아끼려는 노력에 대해 시샘하는 기회비용이었을까. 아무튼 '천신만고'란 이럴 때 쓰라고 지어낸 말일 것이다. 그러나 방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넓고 깨끗하고 쾌적해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긴 했다.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 모르면 '눈 뜬 장님' 신세

여행을 떠나기 전 유럽을 다녀왔다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것. 그때 난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찾는 여행지인 일본이나 동남아 등의 사람들에 견줘 불친절하다는 것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브뤼셀에 올 때까지 만나 도움을 청한 많은 사람들 누구 하나 그렇지 않았다. 그저 괜한 오해라고 여기게 됐다.

그러나 이제야 그들이 조언한 불친절하다는 의미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사람이 아니라 '언어'가 그렇다는 뜻이었던 거다. 적어도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를 모르면 여행자는 '눈 뜬 장님'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가 이곳에서는 '구어'로서만 일부 기능할 뿐, 활자화된 영어는 시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길이고 건물이고 가게의 간판과 유치원의 이름조차 온통 영어 일색인 우리나라에선 상상조차 어려운 풍경이다.

이는 비단 길 찾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이 숱하게 이용할 텐데도, 기차나 트램, 버스의 승차권에도 영어 표기는 없다. 식당에서도 현지어를 모르면 음식 주문이 힘든데, 입구에 영어로 된 메뉴판을 비치하고 있다며 광고하는 곳도 봤다. 마트의 상품 진열대에도, 심지어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 구내 커피 전문점의 메뉴판에서도 영어는 자취를 감췄다.

이곳을 시작으로 각 층과 방으로 동선이 이어지는데, 워낙 규모가 커서 관람하는 데 한두 시간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 벨기에 왕립미술관 내부 이곳을 시작으로 각 층과 방으로 동선이 이어지는데, 워낙 규모가 커서 관람하는 데 한두 시간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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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립 미술관은 시대별로 나뉘어져 있는데,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별도의 건물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티켓 하나로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 마그리트 현대 미술관 내부 벨기에 왕립 미술관은 시대별로 나뉘어져 있는데,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별도의 건물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티켓 하나로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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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브뤼셀에 왔다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왕립 미술관도 예외는 아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분관 형태로 개관했다는 벨기에 최고 권위의 미술관인데도, 영어로 된 안내 책자는커녕 작품의 제목조차 영어로 병기되어 있지 않다. 이 큰 미술관에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쓰는 벨기에 사람들만 관람하러 오는 건 아닐 텐데, 대체 이 '배짱'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직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을 듣기는커녕 되레 오디오 가이드를 활용하면 된다는 면박만 당했다. 명색이 벨기에의 얼굴인데, 외국인 여행자들로부터 설마 오디오 가이드 사용료 몇 푼 더 벌기 위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미술 작품의 영어 해설을 귀로 듣고 이해하는 건 웬만한 어학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미술관 입구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간판이 미술품 마냥 내걸려 있다. 그들 중에 반갑게도 우리 한글로 된 간판도 눈에 띈다.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가자마자 안내 데스크로 달려가 한글로 된 가이드북과 오디오 가이드를 찾은 것도 그래서다. 언감생심, 기대가 과했던 것일까. 미술관 안팎을 통틀어 한글로 적힌 건 입구에 걸린 그 간판이 유일했다.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가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방인데, 의자에 그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두툼한 가이드북이 놓여있다. 물론, 프랑스어로만 돼 있어서 우리에겐 무용지물이었다.
▲ 왕립 미술관 내 루벤스의 방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가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방인데, 의자에 그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두툼한 가이드북이 놓여있다. 물론, 프랑스어로만 돼 있어서 우리에겐 무용지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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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술관에서조차 '눈 뜬 장님'이 되어 작품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미술 교과서에 수록된 수많은 작품들의 원본을 바로 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값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곳이긴 하다.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면, 하루 종일 둘러봐도 다 못 볼 벨기에, 나아가 유럽의 거대한 보물 창고임엔 틀림없다.

연신 아쉬움을 토로하는 아빠 앞에서 중1 아이는 오히려 잘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차피 프랑스어로 된 제목이고 설명이고 읽어봐야 전혀 알 수 없으니 제대로 관람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때로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어설픈 사전 지식과 정보보다 나을 수 있다는 말일 테다. 아울러 고생하면서 깨달은 바도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노예처럼 길들여지고 주눅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 사람들 봐요. 영어는 막힘없이 곧잘 하면서도 가게도, 물건도, 길도, 건물도 다 자기들 언어로만 이름 짓잖아요. 우리나라에선 우리말과 글로 된 간판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맨 건 영어에 철저히 길들여졌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왕립 미술관에 가기 전 만화 박물관에 들렀다. 이곳에선 영어로 된 안내문이 '친절하게' 걸려 있었다. 맨 위부터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 순이다.
▲ '탱탱'과 '스머프'의 고향, 브뤼셀 만화 박물관 내부 왕립 미술관에 가기 전 만화 박물관에 들렀다. 이곳에선 영어로 된 안내문이 '친절하게' 걸려 있었다. 맨 위부터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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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네룩스,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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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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