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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는 말그대로 송아지를 위한 젖이다.
 우유는 말그대로 송아지를 위한 젖이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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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매일 900원을 주면서 중요한 물건이니 절대로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말고 간수하라고 한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대부분 기뻐하며 그 말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반대의 선택을 하는 집단이 있다. 바로 P초교 5학년생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생들의 교실에서는 치열한 우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전쟁의 이해당사자는 학부모, 학생, 선생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각 진영 대표들의 입장을 들어보자.


i. 먹이고 싶은 자(학부모)우유. 완전한 식품, 더 이상 가치를 논할 필요도 없는 음식이다. 아래의 식품구성자전거를 보라! 과일류에 근접한 비율로 권장되고 있다. 공동구매하면 가격도 참 싸다. 200ml짜리 하나 사려면 마트에서 700원, 편의점에서 900원 줘야 하는데 학교는 490원이다. 요즘 같은 물가에 이 값이면 핫딜이다.



돈 없어서 신청 못하는 애는 어떡하냐고? 걱정 마시라. 차상위, 기초생활수급, 기타 소득군 등 어려운 가정을 위한 복지 예산이 따로 있다. 희망하는데 못 마실 일은 없다. 누구는 백만 원이 넘는 성장호르몬 주사도 맞히는데 하루 500원도 안 하는 천연 발육제를 어떤 엄마, 아빠가 마다하겠는가?


사실 쌤들이 알아서  건강관리를 해주니까 제일 편하다. 집에서 아기 키워본 사람들은 알 거다. 자식들에게 몸에 좋다는 거 챙겨 먹이려고 하면 생난리를 친다. 도망가고, 고개 돌리고, 손을 내젓는다. 싫다는데 눈물, 콧물 짜면서 억지로 넣을 수도 없고 곤란하다.  욕심인걸 알면서도 천사 같은 선생님들께 비타민C, 오메가3, 프로폴리스도 좀 부탁하고 싶다.



 
식품구성자전거 *출처 : 보건복지부, 2015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 2015
 식품구성자전거 *출처 : 보건복지부, 2015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 2015
ⓒ 보건복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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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마셔야만 하는 자(학생)우유.  맛없고, 과음하면 배 아픈데 어른들이 추천하는 물질이다. 무엇보다 이제  열두 살인데 우유 뗄 나이도 되지 않았나?  태어나자마자 모유가 기다리고 있었고 다음은 분유였다. 이가 없으니 다른 메뉴가 딱히 없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익숙한 하얀색 액체를 줬다.



그러나 그땐 너무 어려서 반항해야겠다는 의식도 힘도 부족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즈음부터 바나나맛, 딸기맛 우유의 세계를 인지했다. 세상은 넓고 먹을 건 많았다. 멋몰랐던 저학년이 지나고 어느덧 고학년. 이럴 수가 '오늘의 Milk 봉사자'라니. 이런 악덕 제도가 있나. 유딩들이나 애호하는 음료로부터 내 한 몸 지키기 힘든 처지건만, 학급 구성원 수만큼 우유를 들고 오고 정리해서 다시 갖다 놔야 한다. 만약에 친구들이 장난쳐서 질질 새거나, 다 안 마신 채로 넣어 둔 팩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낭패다.


언제쯤 포유류의 슬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젖과 함께 시작하여 젖과 함께 가는 인생이구나. 그건 그렇고 왜 또 네스퀵이나 제티는 안 된단 말인가! 흰 우유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고 맛도 일품이니 훌륭한 첨가제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담임은 초콜릿 한 봉지 정도의 관용도 없는가? 도무지 자유로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 미래 꿈나무들에게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어달라고 주문하는 건 욕심 아닌가?



 
예술가형 교사의 작품. 이렇게라도 너희 손에 잡힌 우유를 비울 수 있다면.
 예술가형 교사의 작품. 이렇게라도 너희 손에 잡힌 우유를 비울 수 있다면.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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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없애야만 하는 자(선생)우유.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없애야 하는 일거리이다. 학부모들이 비용까지 지불하는 이 식량은 실온에서 하루만 보관해도 변질이 되고, 구석에 박혀 있기라도 하면 지뢰가 된다. 교사의 성격에 따라 제거법도 다양하다. 독재자형은 엄격하게 당번 제도를 운영한다. 당번이 자기 순서를 깜빡하거나 우유를 제 때 치우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주어서라도 역할을 다 완수하도록 한다.



예술가형은 재활용 기법을 활용해 작품을 제작한다. 순진한 제자들은 스승의 작업을 돕기 위하여 재료 공급에 최선을 다한다. 택배형은 무조건 가방에 우유를 넣게 한다. 종례 인사를 하고 귀가할 때까지 물건이 가방에서 나오는 배달 사고가 있어선 안 된다.


각 교실마다 독특한 첫인상(시각+후각)이 있는데 우리 반의 느낌이 강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학 간 도영이의 사물함을 몇 개월만에 다시 열었을 때 진짜 기막힌 향기가 났다. 토사물과 치즈와 버터 향이 동시에 났다. 소유자를 알 수 없는 고칼슘 우유 한 팩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다양한 치즈 종류를 즐기는 프랑스인이 사물함 냄새를 맡았다면 참신성 면에서 후한 점수를 줬으리라.


 
▲ 요일 밴드 '우유가져가' 뮤직비디오 (작곡, 작사자인 박대현샘의 허락을 받아 탑재하였다)
ⓒ 수요일밴드(수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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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hMc5GkIgJU



인간들의 우유 전쟁 이야기는 서로 자기 입장 설명하기에 바쁘다. 정작 이 전쟁 최대 피해자는 젖소다. 암컷 소는 새끼에게 다 돌아가지도 않는 젖을 생산하느라 인공수정을 통해 평생 동안 임신을 반복한다. 말  못 하는 동물의 희생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인가? 그렇다고 해도 사랑 없이 아기를 가지고 파이프를 통해 수유하는 소의 삶이 가엾다.


"송아지야 너희 어머니를 괴롭혀서 미안하다."
 

태그:#우유, #영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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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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