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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읽고 싶은 책을 가득 적어둔 목록이 있다. 적어두는 건 쉽되 읽어 치우는 건 어렵다. 읽는 양은 산술급수로 쌓이는데 책 목록은 기하급수로 오르기 때문이다. 때로 읽어야 한다는 압박과 다 읽지 못할 거라는 무력에서 벗어나고자 목록에 없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책을 고를 때가 있다.

<내 눈 안의 너>(바스티앙 비베스, 미메시스)도 그렇게 만났다.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찾았다. 글자가 거의 없고 한 페이지에 여섯 컷이 들어간 만화책이었다. 활자에서 벗어나되 여전히 독서를 계속할 수 있기에, 읽고 있던 다른 책을 덮고 이 만화를 펼쳤다.

<내 눈안의 너> 앞 표지
 <내 눈안의 너> 앞 표지
ⓒ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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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안의 너>는 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과 여학생을 만난다. 둘 사이 풋풋한 연애가 시작된다. 함께 저녁을 먹고, 도서관 서가에서 좋아하는 책을 뽑아 소개하고, 극장의 어둠을 빌려 입을 맞추고, 댄스파티에서 춤을 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연애담을 그렸다. 하지만 이 만화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표현방식, 바로 '관점'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남자주인공의 눈에 비친 상을 만화 프레임에 그대로 반영한다. 그의 눈은 카메라처럼 여인의 모습과 주변 세계를 담는다.

독자는 남자주인공의 눈에 맺힌 화면을 고스란히 보게 된다. 독자와 남자주인공의 시선이 일치하는 것이다. 자기가 남자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먼저, 만화에 남자주인공의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여인은 남자주인공을 바라보며 말을 한 뒤 무언가 대답을 들었다는 듯 다음 말을 이어간다.

다음으로, 키스 신을 살펴보면 그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처음에는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이 담긴 컷이 나온다. 다음엔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연 여인의 얼굴, 그 모습을 감싸는 가로 타원형 검정색 두꺼운 테두리(게슴츠레 감은 눈꺼풀일 것이다)가 나오는 컷. 그 다음은 여인의 코 아래와 윗니와 입술, 더 두꺼워진 테두리 컷.  

<내 눈안의 너> 앞 부분, 도서관에서 여인을 만난다
 <내 눈안의 너> 앞 부분, 도서관에서 여인을 만난다
ⓒ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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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보는 동안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 게임'이 기억났다. 애니메이션 소녀 캐릭터를 앞에 두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연애하듯 과정을 이끌고 엔딩도 맞는 형태의 게임이었다. 게임 속 상황을 실제로 겪는 것 같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 눈 안의 너>도 마찬가지였다. 전개과정과 표현방식이 미연시 게임과 다르지 않았다. 여인이 나를 보듯 정면을 응시하는 컷이 설렜다. 내 왼쪽 어깨에 머리를 댄 여인이 이렇게 말했을 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 학교에서 봤을 때부터 키스하고 싶었어. 계속 계속 이야기만 했지 나한테 키스 안 해주더라."

댄스파티에 가서 춤을 추는 '내 눈안의 너'
 댄스파티에 가서 춤을 추는 '내 눈안의 너'
ⓒ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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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안의 너>는 가느다란 펜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연필로 채색해서 산뜻한 만화였다. 두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을 깔끔하게 표현했다. 그린이 바스티앙 비베스는 1984년에 태어난 프랑스 만화가로 200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젊은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신선한 감성이 듬뿍 담겼을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대학신입생 남자가 느꼈을 법한 연애감정을 다시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내 눈 안의 너>를 권한다. 오랜만에 미연시 게임을 하고 싶은데 십덕후 소리 들을까봐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다만, 다 읽고 나서 여인 캐릭터에게 선물을 사주거나 그녀 생일을 챙기지는 말길. 그녀는 내 '눈 안'의 너일 뿐 현실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 사랑은 2D 것들과 하지 말고 피와 뼈와 살이 있는 상대와 합시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도 올리려 합니다.



내 눈 안의 너

바스티앙 비베스 글.그림, 그레고리 림펜스 옮김, 미메시스(2013)


태그:#이두리, #그래픽노블, #미메시스, #내눈안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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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병기 모국어 https://blog.naver.com/leedr83 - 장곡타임즈 https://blog.naver.com/janggok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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