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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마라도에서 번 돈과 임대보증금을 돌려받은 돈이 꽤 된다 생각했는데, 반년 이상 생활비로 쓰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2500만 원이었다. 어디서 어떤 가게를 열더라도 터무니없는 돈이었다. 포장마차 하나 차릴 만한 밑천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과 '문만 열면 대박이야'라는 가당치 않은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란 코딱지만큼도 할 수 없던 때였다. 사업 말아먹고 마라도로 들어가 낚시에만 미쳐 살던, 중년이 넘은 남자와 직장생활 때려치우고 시 쓰는 삶을 최상의 우아한 삶이라 자찬하며 프리랜서로 '프리'하게 살던, 중년이 다 돼가는 여자가 가늠하는 세상이 오죽했겠는가.

결혼 전에 5년 동안 살던 평택이었지만, 나의 활동영역은 내 살던 아파트와 서울을 오가기 위해 이용하던 평택역이 전부였다. 어느 동네가 장사가 잘 되고, 어느 동네에 어떤 계층이 살며, 어느 동네가 임대료가 적당한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생활정보지에 나온 가게를 쫓아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녀 볼 뿐이었는데, 차를 몰고 아무리 뻔질나게 돌아다닌다고 해도 상가 창업에 필수적인 정보는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공부랍시고 인터넷을 두드려 보곤 했다. 그런데 식당 창업은 유동인구가 얼마나 되고, 어떤 계층이, 어떤 연령이, 어떤 성별이 주로 지나다니는지, 최소 일주일은 해당 가게 앞에서 카운터기를 눌러가며 지켜봐야 한다는데, 당연히 우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 가뿐히 무시했다. 

짜장면은 어디서 팔까... 종착지는 '미친 월세'였다

두어 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답을 못 찾고 있던 중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동네에 우연히 가게 됐고, 간 김에 부동산에 시세나 물어보자고 들어간 것이 그만 덜컥 발목이 잡힌 꼴이 됐다. 우리도 어리숙했지만, 그 부동산의 아가씨 사장의 수완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어리숙함도 한눈에 간파했을 것이고, 우리는 움쭉달싹할 수 없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가 됐던 게다.

짜장면집 자리를 찾는다는 주문에 그녀는 두 말 하지 않고 우리를 이끌고 가서 가게 세 군데를 보여줬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한편으로는 살짝 주눅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뭔가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부동산업자에게 믿음이라니….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착각인가. 그만큼 우리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우리는 결국 그녀가 소개해준 상가를 선택했다. 안성톨게이트 인근이었고, 대로 건너편은 아파트촌으로 세대수가 아주 많았고, 가게 뒤쪽으로는 프리미엄급 아파트가 들어서서 입주 중이었고, 수많은 원룸과 상가가 신축 중이었다. 다시 말해 개발지구였다.

전국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평택에 몰려들어 투기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때였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것조차 몰랐고, 그저 개발이 돼 너도나도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줄로만 알았다. 그 건물은 3층짜리 신축이었고, 짜장면집은 대로변에 접한 40평짜리를 얻기로 했다. 가게 바로 옆으로 널찍한 골목이 나 있어 두 면이 노출되는 모퉁이 자리라면서 어마어마한 임대료를 요구했다.

보증금이 7000만 원이었고, 월세가 330만 원이었다. 부가세도 필수여서 매달 363만 원을 내야 했다. 서울도 아닌데…, '미친 금액'이었다. 월세는 벌어서 낸다 쳐도 무슨 수로 보증금을 맞추나? 그때 부동산의 그녀가 묘책을 알려줬다. 아파트 담보 대출을 받되, 제1금융권은 박하니, 제2금융권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묘책대로 했더니, 시세의 90%를 대출해주는 것이었다. 마라도를 갔다 온 사이 쭉쭉 오른 아파트 시세 덕분에 큰돈을 만들 수 있었다. 담보 대출이라 이율도 그리 세진 않았다. 아무튼 그것이 우리가 처음 존재를 알게 된 저축은행이었고, 지금까지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빚진 인생'의 시작이었다.

무경험자 셋이서 만든 식당

월세 330만 원의 가치는 무엇인가? 건물주는 자신이 건축사무소에 갚아야 하는 돈을 보증금과 월세로 계산해 내는 것일 뿐임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그 자리가 330만 원만큼의 가치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와 그(건물주)의 말대로 목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라 여겼다.

그 좋은 목에 예쁜 짜장면집을 차리면 손님들이 빨려 들어올 것이므로 그 돈 못 내겠냐 싶었다. 서류에 도장을 찍고, 셀프 인테리어에 돌입했다. 보증금을 다 주고 나니, 남은 돈이 없기도 했지만, 업자를 부릴 줄 모르는 우리는 우리끼리 하는 게 속이 편했다. 또한 고대하던 셀프 인테리어를 드디어 하게 돼 콧노래를 부르며 시작했다. 주방일을 도와주기로 한 지인이 합류해 셋이서 두 달 반 동안 가게를 만들었다.

건물주는 빨리 오픈 안 하고 뭐하냐고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다녔고, 인근의 많은 공사장 인부들은 점심을 먹은 뒤 골목에 앉아서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구경했다. 두 면이 온통 유리인 가게 안 공사 현장은 왕복 6차선 대로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됐다.

건물주가 유예해준 기간은 한 달이어서 뒤의 한 달은 오픈도 못 한 채 월세를 내야 했다.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주방을 만들고, 공사하다 만 것 같은 천장을 마감하고, 벽과 창을 꾸미고, 시멘트 가루 풀풀 일어나는 바닥을 덮는 지난한 일들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셋 다 아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마라도를 떠나 평택에서 새출발한 우리의 짜장면집
 마라도를 떠나 평택에서 새출발한 우리의 짜장면집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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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공사 시작과 함께 어린이집으로 보내진 기련이는 오후 5시 하원 후에는 먼지 나는 공사 현장에 앉아 노트북으로 <뽀로로>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9시 넘어 일을 마치면 마땅한 식당이 없어 늘 고깃집에서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두 달 반 동안 먹어치운 저녁 식비가 400만 원에 달했다.

인테리어 자재는 친환경 제품을 사용했는데, 재료비만 1500만 원이 들었다. 당연히 돈이 없으니, 모든 것은 카드로 해결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거래를 튼 은행에서 장기우수고객이라고 최고 신용등급을 부여해 주는 바람에 한도액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일들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건 줄 알았다. 그들은 내가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가계부채의 덫에 착실히 걸려들고 있었다.

2010년 7월 10일, 우리의 두 번째 짜장면집이 문을 열었다. 남편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으나, 다시 월세 내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급하게 문을 연 것은 큰 실수였다. 남편에게 필요한 시간은 주방일에 관한 것이었다. 마라도에서 늘 임시방편으로 만든 화구를 사용한 탓에 평택에서는 제대로 된 중식 화구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가스비를 1/3로 떨어트려주고 화력은 최강인 제품이었다. 솥을 포함해 화구 3개짜리가 800만 원이나 했다. 나중에 화구가 모자라 1구짜리를 추가했는데, 다 합쳐 1000만 원에 가까웠다. 물론 돈이 없으니, 리스로 긁었다. 이런 것도 리스가 되는구나, 놀라며 역시나 하늘이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없는 살림에 무리한 가격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화구를 쓰고 있고, 가스비 절감한 걸 생각하면 화구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늘 일정한 맛을 원하는 사람들

천오백만 원으로 두 달 반 동안 손수 만든 가게. 사람들은 1억쯤 들어겠다고 말했다.
 천오백만 원으로 두 달 반 동안 손수 만든 가게. 사람들은 1억쯤 들어겠다고 말했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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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화구는 설치해놓고, 오픈 전날까지 공사 마무리가 안 되는 바람에 화구에 불 한 번 붙여 보지 못한 채 손님을 맞았던 게 문제였다. 화력이 그렇게 셀 줄 몰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초강력 화력이었다. 물론 강약을 조절할 수는 있지만,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기능도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다 오픈 첫날부터 손님들이 미어터지도록 들이닥쳤다. 그런 상태가 두 달 동안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을까 싶다. 아무튼 손님은 꽉 들어차서 기다리지, 화력은 감당이 안 되지, 준비해둔 재료는 계속 모자라지, 그야말로 중과부적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타서 나가는 짬뽕이 많았다. 남편은 기대를 잔뜩 가지고 온 손님들에게 탄 음식을 내어준 것이 패착이었다고 늘 후회했다. 처음 그렇게 실망하고 간 손님들은 다시는 찾지 않는다며, 두 달 이후 손님이 뚝뚝 떨어져나가던 이유를 남편은 거기에서 찾곤 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노하우도 없을 때라서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조미료를 넣지 않는 음식은 일정한 맛을 내기가 어렵다. 철마다 잡히는 멸치의 맛이 다르고, 철마다 달라지는 식재료 역시 맛의 변수다. 농업이 산업이 되면서 농산물은 계속 변해왔다. 종자가 변하기도 하고, 농약과 비료와 농법이 변하기도 했다. 양파 한 개도 옛날의 그 양파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일정한 맛을 원한다. 오래된 골목 식당의 20년 단골이 20년 동안 똑같은 맛 때문에 찾아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조미료가 빠진 자연주의 음식은 그게 불가능하다. 물론 '맛이 다르다'는 것과 '맛이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식재료를 가지고도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맛이 있다'의 비결이다.

조미료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죽이고 세상 모든 맛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화학의 맛이다. 요리사라면 조미료가 끼어드는 요리법을 자존심 상해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유능한 요리사다. 남편에게 평택에서의 2년은 그것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음식을 통해 맛으로 전달해내는 진짜 요리사의 길을 숙련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뭐 이따위 맛이 있어?' vs.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아무튼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두 달 반을 끌고도 정작 중요한 준비는 다 못한 채 급하게 문을 연 것도 문제였고, 어느 식당이든 오픈 일주일은 조용히 맞이하는 게 장기적으로 더 이득인데,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온 것도 문제였다. 처음엔 보조도 없이 남편이 혼자 모든 요리를 했다. 같이 공사를 했던 지인은 면을 반죽하고 뽑고 삶아내는 면장이었고, 나는 두 아주머니들과 서빙을 했다.

메뉴도 짜장, 짬뽕, 탕수육, 탕수어로 단출했는데, 탕수육 할 일손이 없어 식당 경험이 많은 서빙 아주머니가 긴급 투입되는 날이 많았다. 많은 것들이 미숙했지만, 돌아볼 여유도 없이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호황은 딱 두 달 동안이었다.

손님들의 반응은 반반이었고, 극과 극이었다. 조미료가 빠진 짜장과 짬뽕이라니, 안 먹어본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뭐 이따위 맛이 다 있어?' 하는 부류와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하는 부류. 공통점은 두 부류 모두 깜짝 놀랐다는 점이다.

전자는 조미료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적어도 집밥만큼은 무(無) 조미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길게는 100년, 짧게는 60년 동안 길들여져 왔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평생을 화학의 맛을 맛의 전부라고 알고 살아온 셈이다. 난생처음 먹어본 자연주의 맛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심한 경우에는 한 젓가락 먹고 그냥 가버리기도 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포즈로 말이다.

깜짝 놀라는 현상은 맛을 보기도 전에 눈에서부터 일어났다. 짜장 그릇을 받아든 손님들은 "이거 짜장 맞아요?"라고 물었고, 짬뽕 그릇을 받아든 손님들은 "이거 매운 거 맞아요?"라고 물었다. 짜장은 까맣지 않고, 짬뽕은 빨갛지 않았다. 우리 짜장과 짬뽕의 역사는 그렇게 평택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마라도에서 온 자장면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0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연주의짜장면 , #착한식당 , #NOMSG , #NONGMO,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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