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 조연진의 자스민 지난 20일,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때 자스민 역을 맡은 배우 조연진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자스민은 우리가 흔히 '남성적'이라고 여기는 성격을 지닌 캐릭터이다. 극 내에서도 가슴둘레, 적극성, 술 등의 요소를 통해 이 여성이 지닌 남성적인 면을 부각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은, 남편이 잘 때에야 할 수 있는 소심한 모습도 보인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성의 기준을 흐트러트리는 역할을 웃음과 함께 잘 풀어냈다. ⓒ 곽우신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다. 천재라고 불리는 장진 감독의 대학로 컴백은 성공적이었다. 장진 감독이 13년 만에 공개한 신작 연극 <꽃의 비밀>이 호연을 마치고 오는 31일 막을 내린다. 여배우 위주로 꾸린 소극장 작품,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사회 풍자성 코미디가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뮤지컬 <디셈버>가 장진이 무엇을 '못' 하는지 보여줬다면, 연극 <꽃의 비밀>은 장진이 무엇을 '잘' 하는지를 확실히 보여줬다.

연극 <꽃의 비밀>은 4명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탈리아의 북서부지방의 작은 마을 '빌라페로사'.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들끼리 유벤투스와 AC밀란의 경기를 보러 떠난 사이, 4명의 아내(소피아·자스민·모니카·지나)는 마을에 남아 송년회를 준비한다.

 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 배우 오소연의 지나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에서 열린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배우 오소연은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도 매번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 배우이다. ⓒ 곽우신


그런데 지나는 계속 불안한 기색을 보인다. 두려움에 떨던 지나가 결국 고백한다. 자신이 남편의 브레이크를 일부러 고장 냈다고, 그런데 축구를 함께 보러 가던 다른 남편들이 그 차에 함께 탔다고. 언덕길을 내려가던 그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봤다고 말이다.

처음에 경악하던 아내들은, 각자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축구를 보러 간다던 이들은 사실 다른 마을의 유흥가로 향하던 길이었다. 소피아는 술을 마시던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잦고, 자스민의 남편은 그녀와 자지 않은 지 오래다. 뜻하지 않게 4명의 남편이 한꺼번에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아내들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삶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것도 사망보험금 20만 유로와 함께 말이다. 그저 내일 하루, 최종적으로 거쳐야 할 간단한 방문 의료 검진만 통과하면 끝이다.

 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 김연재의 소피아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에서 연극 <꽃의 비밀> 낮 공연이 끝난 뒤 커튼콜 장면. 소피는 극의 무게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끝까지 보험금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는 인물이다. 가장 직접적인 폭력에 노출됐던 그녀의 익살스러우면서도 아픈 이야기를 잘 소화했다. ⓒ 곽우신


연극 <꽃의 비밀>은 일단 재미있다. 어깨에 힘 빼고 편안하게 극을 따라가다 보면, 연출이 의도한 웃음 포인트에서 '빵' 하고 터지게 된다. 더 좋은 건, 그 웃음이 메시지에 기반을 둔 웃음이라는 것이다. 1막에서는 남편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남성들의 권위의식과 무능함을 꼬집으며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2막에서는 네 명의 아내가 각자의 남편을 연기하면서, (섹스와 젠더를 포함해)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폭로하며 폭소가 나온다. 여기에 동성애 코드를 곁들인 건 꽤 괜찮은 덤이었다.

장진 감독은 <꽃의 비밀> 프로그램 북에 어떤 꽃이든 "슬픈 비밀 한 자락 없을까요"라고 적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이어도, 기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폭력이 난무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 정희진은 여성을 '꽃'으로 비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 꽃이 어떤 종류의 꽃이든, 꽃으로 정의되고 명명되는 순간 수동적인 역할로 고정된다. 공과대학 수석 졸업의 엘리트(지나)이든, 미래가 촉망받던 연기학과의 수재(모니카)이든, 농부의 아내가 된 이상 그저 농사짓고 빵 굽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20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연극 <꽃의 비밀> 커튼콜.

▲ 김나연의 모니카 지난 20일, 연극 <꽃의 비밀> 낮 공연이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에서 끝난 뒤 커튼콜이 진행됐다. 김나연 배우가 연기한 모니카는 아침에 검진을 하러 온 의사가 묘하게 끌리게 되는 역할이다. 극의 전체적인 줄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극의 웃음을 잘 증폭했다. ⓒ 곽우신


<꽃의 비밀>은 우리 주위의 꽃이 혹시 멍들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는 괜찮은 극이다. 가정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여성의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연출은 투쟁만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도 얘기한다.

하지만 영화 <인턴>의 끝에서 줄스가 그녀의 남편과 갑작스레 재결합하는 데서 느꼈던 묘한 어색함이 여기서도 고개를 든다.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극 안에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해프닝으로 끝난 이번 사건이, 다음에는 진짜 비극으로 되풀이될지 모르는 일이다.

연극 <꽃의 비밀> 포스터 31일까지

▲ 연극 <꽃의 비밀> 포스터 지난 12월 1일 개막하여 두 달의 공연을 마치고 막을 내리는 연극 <꽃의 비밀>. 개인적으로 <디셈버>에서 느꼈던 실망감을 한 방에 날려버린 유쾌한 작품이었다. 엔딩에서의 아쉬움을 제외한다면, 장진이 뭘 잘하는지 그리고 그가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다소 무례할지 모르는 질문에 친절하게 응대해준 그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주)수현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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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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