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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장금도 명인
 웃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장금도 명인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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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에는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 출신 기생(妓生) 두 분이 생존해 있다. 국내 유일의 민살풀이(수건 없이 추는 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89)와 구음(口音) 구사가 뛰어났던 김난주(90) 할머니다. 두 할머니는 군산 소화권번 출신으로 70년지기 친구이자 예기(藝妓) 선후배 사이. 권번 밥그릇 수로 따지면 장금도가 7~8년 위다.

가시밭길처럼 험난했던 인생. 무지갯빛 환희에 젖던 시절도 있었다. 곱디고운 칠흑색 머릿결이 호호백발이 된 지금은 호젓한 언덕배기에 피었다가 시든 할미꽃처럼 외롭게 지내는 그들. 굽이굽이 인생행로가 비슷한 두 사람은 사흘이 멀다고 전화를 걸어 안부도 주고받고,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를 되뇌며 덧없는 세월을 노래하였다. 그랬던 그들이 최근에는 전화기 번호판조차 누르기 버거울 정도로 몸도 정신도 쇠해버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장금도는 춤추는 해어화(解語花), 마지막 예기, 명인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김난주는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이 전부라는 것. 김 할머니는 지난 2012년 1월 12일 <오마이뉴스> 기사("기생질 허고 싶어 시집서 두 번 도망쳤지")를 통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오늘은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여남은 살 때부터 춤 연습장 기웃거려

 신명숙(제자) 교수 작품발표회에서 즉석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15년 12월)
 신명숙(제자) 교수 작품발표회에서 즉석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15년 12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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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도 명인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은 짜장면. 팔보채나 샥스핀 같은 고급요리보다 훨씬 맛있어서 좋단다. 그의 입맛을 따라 군산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몇 차례 만났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그는 기생시절 버릇(수줍음)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장금도(張錦桃)는 1928년 1월(호적 1929년 9월) 군산부 소화통 2정목(현 군산시 중앙초등학교 앞 골목동네)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본래 '今桃(금도)'였으나 훗날 아버지가 비단결처럼 곱고 아름답게 불로장생하라는 의미로 '이제 금(今)'을 '비단 금(錦)'으로 개명했단다. 그는 '춤꾼'이 될 팔자를 타고났는지 여남 살 때부터 춤 연습장을 자주 기웃거렸다. 

구경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춤 선생이 집에 가라고 해도 돌아섰다가 눈치를 살피며 다시보기를 되풀이했다. 배우고 싶어도 집이 가난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에게 열두 살 되는 해(1939년) 기회가 찾아온다. 가무(歌舞)를 가르치는 군산 소화권번 월사금(학비)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 이웃에 사는 가야금 선생 김영주(퇴기)였다.

소화권번(4년제)에 입적한 그는 회초리를 맞아가며 예의범절과 단가를 배운다. 이기권에게 <심청가>, 김준섭에게 <춘향가> 완판을, 민옥행을 독선생으로 집에 모셔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을 익혔다. 최창윤에게 승무를 김백룡에게 부채춤, 검무, 화관무, 포구락 등을 사사받고, 도금선에게 살풀이춤을 전수받는다. 도금선은 당대의 예인이었다.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가 그의 '기러기춤'을 배우기 위해 1940년대 초 군산에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장금도는 권번 졸업을 앞둔 열다섯 나이에 군산극장에서 초연(初演)을 하게 된다. 그해 열린 '수재민 돕기 예기 연주회'에서 살풀이와 승무를 선보인 것. 이후 군산의 한량들 사이에 '춤은 장금도다!'는 말이 회자되고 시내 요릿집(요정) 앞에는 '장금도' 명패가 내걸리기 시작한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김제, 익산, 전주 등지 한량들 귀에까지 들어간다. 

예기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경찰서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요릿집으로 놀음(밤 마실)을 나갈 수 있었던 시절. 시험은 명월관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일본어로 치렀다. 시험관은 권번장과 선생들. 군산 부윤(시장), 경찰서장, 지역 유지들도 참관했다. 영특했던 장금도는 소리와 춤 모두 수석으로 졸업, 가무가 가장 뛰어난 예기로 인정받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하려고 열일곱 살에 결혼

 아들과 함께 나들이. 20대 후반 모습.
 아들과 함께 나들이. 20대 후반 모습.
ⓒ 장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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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도는 열여섯에 명월관, 동양관(근화각), 만수장, 동해루, 쌍성루 등으로 놀음을 나가기 시작한다. 검무도 추고 승무도 하고 소리도 잘했던 그는 돈도 제일 많이 벌었다. '수양 엄니'(김영주)에게 진 빚(권번 학비)도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 그렇게 잘 나갈 즈음 예기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일제의 '처녀 공출'(일본군 위안부)이었다.

"그때 마침 중매가 들어와 열일곱에 부여로 시집을 가버렸지. 농사도 짓고 면사무소 댕기는(다니는) 열 살인가 더 먹은 남자였는디 부인이 있는 사람이더라니께. 애기(아기)는 들어서고 당초 못 살겠더라고.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밤마다 등잔불 앞에서 울고불고 하니께 시어머니가 친정에 가서 몸을 풀라면서 보내주드라고..." 

광복(1945년)은 어린 예기에게 고달픈 살림만 떠안겼다. 이듬해 몸은 풀었지만, 시어머니는 돌봐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요정에 나갔다. 열아홉 되는 해에는 애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상경한다. 서울 친구와 선배들 소개로 금정, 명월관 등으로 놀음을 나가던 그는 전쟁(1950년)이 터지자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꼭 싸쥐고 군산으로 내려온다.

전쟁, 피난, 휴전 등 격랑의 시대에도 그의 명성은 빛을 더했다. 미제 '깡통문화'를 따라 들어온 카바레, 맥주홀, 여급(여종업원) 등이 군산 화류계를 강타하던 시절. 군산의 한량들은 맥주홀 여급의 2~3배 되는 비용(팁)을 들이면서 장금도를 찾았다. 그들은 요정에 갔다가 어여쁜 여급들이 들어와 인사하면 '이게 무슨 요정이냐, 술집이지'라고 하며 예기들을 불렀다. 그중 가장 많이 호명된 이름이 '장금도'였던 것. 

"그때 손님들은 인심도 좋고 점잖은 어른들이었지. 그전에 영화를 보믄 굉장히 추하게 나오던디 잘못된 거여. 춤 잘 춘다고 등어리나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 가끔 손은 잡아주지. 막 비비고 흔드는 건 없었어. 영화처럼 그렇게 비벼대면 흰 모시옷을 어떻게 다 감당허게. 요새처럼 빨아 입는 옷도 아니고 손질 한 번 할라믄 얼매나 힘드는디..."   

손님들에게 사랑을 흠뻑 받았던 장금도는 스물아홉에 요정과 인연을 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 반 친구가 '느 엄니가 우리 집에서 춤췄다'고 놀려댔다"며 펑펑 울더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엄니, 인자는 절대로 춤추러 댕기지 마!" 소리에 충격을 받아 놀음을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기생 출신 아닌 척 허니라고 나를 숨김서 살았어. 얼굴이 알려지는 게 무서워 국악원에도 안 가고, 노인정에도 안 나갔지. 전주나 부안 잔칫집 초대나 서울로 공연 갈 때도 한복을 아들 몰래 세탁소에 맡겨 놨다가 입고 댕겼응게. 자식이라고는 그 아들(월남전 참전용사)이 전부인디 병(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고생 허다가 몇 년 전 나를 앞서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니께...(한숨)"

극장 영사실 기사였던 큰오빠가 젖먹이 아들을 남겨놓고 병사(病死)하고 학도병에 나간 남동생이 전사하자 가족(조카 포함 10식구) 생계를 떠안았던 장금도, 그는 조카들 학비까지 대면서 방 네 개짜리 'ㄱ'자 기와집도 장만한다. 춤을 극구 말렸던 철부지 아들이 환갑을 넘긴 초로가 되어 공연장에 찾아와 꽃다발을 건네줄 때는 환희의 눈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타고난 춤꾼인 그는 지금도 "몸은 아프지만, 춤출 때가 젤 행복혀!"라고 말한다.

지방 한량들이 장금도 춤을 원했던 이유

 충청도 어느 부잣집 잔치마당에서 흥을 돋우는 장금도(가운데)와 김난주.(왼쪽)
 충청도 어느 부잣집 잔치마당에서 흥을 돋우는 장금도(가운데)와 김난주.(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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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춤이 치밀하게 새겨 넣은 청자라면 민살풀이춤은 무심한 맘으로 담담하게 꺼낸 백자였다. 잘 짜인 살풀이춤이 조각보의 화려함이라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채색하지 않은 결 고운 한 필 비단이었다. 장금도의 고립과 고독에는 송구하지만 춤에는 축복이었다. 단지 수건을 들지 않음이 아닌 한없이 흐르며 구사하는 즉흥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새롭게 다시 맞는 위대한 완성이다." - 진옥섭 저서 <노름마치>에서

벼농사를 '천하지대본'으로 여겼던 1950~1970년대. 장금도는 동료들과 전북의 김제, 부안, 익산, 전주, 충남의 부여, 광천, 대천 등지 단체와 잔칫집에서 초청받아 외출(공연)을 다녔다. 가는 곳마다 그 지역 한량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잔치가 끝나면 '큰 행사에는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장금도의 민살풀이가 있어야 어울린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신이 내린 춤꾼'이란 소리도 들려왔다.

그 시절 많은 사람이 장금도의 춤(민살풀이와 승무)을 원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춤은 현란한 무대도 휘황찬란한 조명도 필요 없었다. 시골집 마당과 대청마루가 곧 무대였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올린 쪽머리와 한복에서 느껴지는 고운 어깨선, 고아함, 정갈함 등은 조명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기품이 돋보이는 그의 춤사위는 구경꾼들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면서 분위기를 압도했다.

흰 모시 한복차림의 해어화 장금도가 춤을 춘다. 사뿐사뿐 발을 내디디며 더금더금 걷다가 잠시 멈추면서 숨을 고른다. 그때 보일 듯 말듯 들썩이는 어깻짓과 함께 작은 공간이 생긴다. 그 틈을 이용, 두 소매를 다소곳이 모으며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가 휘모리로 절도 있게 내달리는 발 디딤새는 정·중·동(靜·中·動) 속에 역동적인 신바람을 일으킨다. 그처럼 짧은 시간에 다양한 춤사위로 관객과 호흡이 일치하면서 자연스럽게 흥(興)을 돋웠던 것.

신명숙(56) 대진대 무용학과 교수(민살풀이 계승자)는 장금도의 민살풀이를 담백한 맛이 일품인 전통 백김치에 비유했다. 그는 "무형문화재 지정 사업이 한창이던 1960~1970년대 대부분 무용가들은 손을 한 번 올릴 장단에 두 번 올리고, 한 바퀴 맴도는 동작에 네 바퀴 도는 등 많은 부분에 색(춤동작)을 더해 화려함으로 채워졌지만, 민살풀이는 수십 년을 묻혀 있으면서 군산 소화권번의 엄한 교육 과정을 거친 80여 년 전 춤사위가 변함없이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범태 사진작가 설득으로 마음의 빗장 풀려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 공연.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 공연.
ⓒ 김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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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명무전>은 1983년 시작되어 이번(1984년) 10월 24일, 25일까지 2년 동안 12차례 공연을 치렀다. 시골에 묻혀 있던 춤꾼들이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매번 4~5명씩 올라 50여 명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무대를 꾸미며 흥겨워했다. 이들의 춤은 모두 비디오로 담겨져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었다. 국립극장 <명무전>을 통해 재능이 세상에 알려진 교방 예인으로 군산의 장금도, 전주의 김유앵, 진주의 김수악씨가 꼽히며... (아래 줄임)" - 1984년 10월 25일자 <경향신문>에서

어깨에 카메라를 걸친 수상한(?) 손님이 찾아오면 "진자그(진작) 죽은 사람을 뭐 할라고 그렇게 찾아쌌소, 나는 동생이요!"라고 쌀쌀맞게 내뱉으며 따돌릴 정도로 자신을 울타리 안에 꼭꼭 숨기고 살았던 장금도. 그의 민살풀이는 1980년대 중반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까지는 정범태(1928~) 사진작가의 집요한 추적과 '찐디기 같은'(끈질긴)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후 간간이 중앙무대에 섰다. 대표작으로 '한국인의 넋이 담긴 민족의 춤' 명인전(1990),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명무 초청(1998), 내일을 여는 춤-우리 춤 뿌리찾기(2002),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2004),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2004),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2005),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 '전무후무'(2005),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2006), '춤'-이 땅의 숨은 춤-(2011), 작별의 춤 해어화(2013) 등을 꼽는다.

프랑스 초청공연(2006년)에 이어 2008년 여름에는 일본 초청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엽제로 고생하던 아들이 그해 6월 하순께 갑자기 죽는 바람에 취소된다.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받은 충격으로 두 달 남짓 병원에 입원해있었던 것. 의지했던 친구들 연락마저 끊기면서 침상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밭고랑처럼 깊게 팬 주름과 호호백발의 머리칼에서 지난했던 삶이 묻어나는 이 시대 마지막 예기 장금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정범태 작가에 대해 "나는 신문이나 테레비(TV)에 나오는 걸 절대로 싫어하는 사람이니께 이만 돌아가시라고 혀도 죽자고 끝까지 달라붙는 '찐디기 같은 사람'이었다"며 1983년 당시 심정을 밝혔다.

"지금이나 허니께 춤을 예술이라고 허지, 그때는 예술이라고 혔간디. 아무리 좋은 춤도 뭔가 풍류를 아는 사람이나 예술이라고 혔지... 기생도 그려. 비싼 월사금도 월사금이지만, '생짜 기생'(권번에서 회초리를 맞아가며 기예를 터득한 기생) 되기가 얼매나 어려웠다고. 그런디도 사람들이 '기생 출신'이라고 천시허든 시절이었응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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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