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찍을 ×이 없어. 그 ×이 그 ×이지 뭐. 여당 야당 다른 게 뭐 있어. 투표 해봐야 그 ×들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지 뭐. 난 관심 없어."

선거철이 가까워졌나 보다. 퇴근길 지인과 한 잔 하기 위해 들른 선술집에서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 50대로 보이는 남자 셋. 사는 이야기에서 정치 이야기로 옮겨가더니, 다가올 선거 이야기로 바뀐다. '카더라'식의 정보가 오가고, 나름의 분석을 토대로 총선의 결과까지 점치기도 한다. 그때 듣고만 있던 일행 중 한 명. '난 관심 없어'를 연발하며 선거 이야기를 끊고 화제를 돌리고 만다.

플라톤의 명언, 한국 현실에 꼭 맞네

'난 관심 없어'라고 선언하는 정치 무관심은, 한때 '세상 일을 초월해 사는 멋진 인간'으로 여겨진 적도 있었다. 아귀다툼 같은 정치판에 관심 갖기보다는 고상한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 지성의 척도이며, 정치인 이름보다는 프로 야구 선수의 이름을 꿰고 있어야만 대접 받았다.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좌파냐?' '출마하려고 하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라며 대놓고 면박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도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정치나 선거 이야기에 '나는 관심 없어'라며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다 한통속'이라며 귀를 막고 선거에 무관심으로 일관한 결과는 오히려 그렇게 경멸했던 정치의 모습을 더 공고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름만 꺼내도 온갖 비리가 연상되는 인물들의 국회의원으로 화려한 데뷔. 지지하는 유권자만의 잘못도 아니다. 다 똑같다며 귀 막고 투표에 기권한 정치 냉소주의가, 오히려 가장 흠 많은 인사를 국회의원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이런 사례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벌은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교훈, 한국 사회에 너무나 꼭 들어맞는 명언이 아닌가.

지난 19대 국회가 18대 국회보다 나았다고 볼 정황은 별로 없다. 몸싸움이 사라지고, 일부 참신한 인재를 영입했지만, 구태는 여전했고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은 한층 강화되었다. 각종 비리와 사건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상실하는 의원도 상당수였다.

특히 19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에 비리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공천은 유지되었고 유권자는 어이없게도 그를 당선시켜 주었다. 성폭력 혐의로 논란이 됐던 김형태 새누리당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성추행과 선거법 위반 의혹으로 새누리당을 자진 탈당했으며, 후에 대법원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소위 '박심'을 근거로 공천을 유지시킨 것이 새누리당이 받아야할 비난이라면, 후보자 4명 중 김 전 의원에게 41%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유권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투표에서 기권한 46.4%의 유권자도 마찬가지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국회의원의 자격을 판단하지 못한다. 정당의 공천 기구가 있다고 하지만 권력의 입김이나 계파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은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선거는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심판받는 자리이지만, 유권자의 정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의혹이 있는 자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주고, 종국에는 법원에서 죄의 유무를 판단해 국회의원직을 박탈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면,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표현은 당분간 유보되어야 한다.

그 X이 그 X이니 난 관심 없다고?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지난해 12월 3일 오후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총선에서 대구 달서을 선구구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지난해 12월 3일 오후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총선에서 대구 달서을 선구구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뚝심!! 청문회 선서 거부"

서울경찰청장을 지낸 김용판 새누리당 예비후보(대구 달서구을) 선거 현수막 내용은 유권자를 향한 조롱이자 권력에 대한 충성 맹세다.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서 부하인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광주 광산구을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을 은폐·축소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죄를 받았지만, 여야가 합의한 청문회에서 선서 거부를 하는 행위는 국회를 부정하는 행위다.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선서를 두 번이나 거부한 전력을 뚝심으로 내세우는 것, 권력과 지역 민심을 뒤에 업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 23일,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영하 9도의 날씨에 옛 남일당 터에서 용산참사 추모대회가 열렸다. 부수고 새로 짓지 않으면 당장에 국가 변란이라도 생길 것 같이 밀어붙인 용산 재개발. 그러나 철거민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6명이 죽은 대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나도록 그 땅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무리한 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한국공항공사 사장에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를 굳혔다.

용산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은 그가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한 경주에 내려가 '용산참사 살인진압 김석기를 감옥으로!'라는 피켓을 들었다. 이에 맞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용산참사 관련 단체를 '과격폭력시위에 얼굴을 내밀며 늘 박근혜 물러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의 문자를 경주시민들에게 돌렸다.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희생자대책위 관계자 등이 지난 18일 오전 김석기 전 경찰청장의 선거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총선 출마를 규탄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희생자대책위 관계자 등이 지난 18일 오전 김석기 전 경찰청장의 선거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총선 출마를 규탄했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20대 국회는 19대 국회보다 나아져야 한다. 그러나 국민들이 정치의식을 높이지 않는다면 국회는 절대로 나아질 수 없다. "그 ×이 그 ×"이라고 말한다. 여야가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고, 돈 받아먹은 국회의원이 여야를 가리지 않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걸지 못하겠다는 푸념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난 관심 없어'라고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결과가 가장 뻔뻔한 인간들에게 금배지를 달아 주었으니까 말이다.

선거는 유권자 정치의식의 시험대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절대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부터 추려보는 것 말이다. 다가올 총선이 국회의원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가려 뽑는 행사이지만, 또 한편으론 가장 부적합한 인간들을 가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 X이 그 X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도 옥석을 가려야만 하는 것이 선거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라도 되려면 결격 사유가 분명한 최악부터 정리하는 것이 순서다. 그래야 19대 국회보다 20대 국회가 나을 수 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발표될 때마다 한숨부터 쉰다. 어떻게 이런 폭정에도 지지율이 40%에 육박하느냐고 말이다. 여론조사 기관의 조작론도 심심찮게 이야기 된다. 그러나 근거도 의미도 없는 푸념이다. 지지율 40%는 현실이다. 단지, 응답률 10% 미만에서 말이다. 응답하지 않은 90% 여론을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추론하기는 하지만, 10% 응답으로 나머지 90%를 여론을 오롯이 읽어내기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10%의 응답률이 대통령 지지율 40%를 유지시키듯, 실제 선거에서도 '난 관심 없어'라는 정치 냉소주의가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을 우리의 대표로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태그:#김석기, #20대 국회
댓글3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