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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배화여고와 동명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곳을 더 이야기를 하고 가자. 배화여고가 위치한 곳은 종로구 필운동(弼雲洞)이다. 이곳의 동명은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弼雲臺)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필운'은 이항복이 자신의 '호'(號)로도 사용하였으며, 그 뒤에 붙은 '대'(臺)는 고지대에 펼쳐진 평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세심대·파총대·경무대 등이 모두 그런 뜻이다.

배화여고 별관 뒤편 바위에 ‘弼雲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로써 이 일대가 백사 이항복의 집터임을 알 수 있으며, 종로구 필운동의 동명도 이것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배화여고 별관 뒤편 바위에 ‘弼雲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로써 이 일대가 백사 이항복의 집터임을 알 수 있으며, 종로구 필운동의 동명도 이것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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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 배화여고 별관의 뒤편으로 가면 큰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에 '弼雲臺'라는 큰 글자와 함께 그 옆에 작은 글자로 이곳을 설명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함께 새겨져 있다.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푸른 돌벽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도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옛 조상들의 의복과 모자가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은 글자로 쓰여진 글은 이항복의 9대 손 이유원이 고종10년(1889)에 쓴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큰 글자인 '弼雲臺'는 이항복이 썼다는 설도 있고, 이것 역시 이유원이 썼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곳이 조선의 명재상 이항복의 집터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항복' 하면 어려서 이웃에 살던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오성과 한음'을 먼저 떠올린다. 이항복은 9세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보냈으나, 후에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16세에 어머니마저 잃는다. 이런 성장 과정을 거쳤지만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권철(권율의 아버지)은 이항복의 영특함을 개구쟁이 시절부터 알아차렸으니 역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이항복의 집 감나무 가지가 옆에 살던 권철의 집으로 넘어 갔는데 나무 가지에 달린 감을 그 집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를 알고 꾸짖었다. 하지만 하인들은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오히려 그 감이 담을 넘어 왔으니 자신의 것이라 우기며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어느 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이미 자기 하인들이 이항복 집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결국 이항복은 권율의 무남동녀 외동딸을 자기의 아내로 삼게 된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가 된 뒤에 벌어지는 재미난 일화들은 상당히 많이 전하고 있다. 이항복은 '농담의 천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우스개를 즐겼는데, 그의 장인 권율과 마주앉아 틈만 나면 함께 빈정대고 희롱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사위 이항복이 여자 하인과 잠자리 하는 것을 권율이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놀리자 이에 뒤질세라 이항복 역시 장인도 비슷한 경우의 곤경에 빠진 것을 놀려주는 등 어릴 적 개구쟁이 기질은 나이를 먹어서도 그대로였다.

권율은 이처럼 장난기 심한 사위와 옆에 살며 골탕 먹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 집을 사위에게 주고 행촌동으로 이사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필운동과 행촌동은 바로 옆동네일지라도 그 사이에는 한양도성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촌동'이란 지명으로 전하는 권율의 집 터

권율의 집터로 알려진 곳으로 사진 속 은행나무는 그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나무로 인하여 이곳 동명은 종로구 행촌동이다.
 권율의 집터로 알려진 곳으로 사진 속 은행나무는 그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나무로 인하여 이곳 동명은 종로구 행촌동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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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이 살던 필운동과 권율이 살던 행촌동 사이에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어 있다. 그러니 암만 가까운 곳이라 해도 이항복의 집은 도성 안이었고, 권율의 집은 도성 밖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곳 행촌동이란 동명에는 권율과 관련된 유래가 있다. 권율이 자기 집 마당에 은행나무를 심었고, 그 은행나무가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행촌동(杏村洞)이라 지은 것이다.

참고로 우리는 권율을 떠올릴 때 '행주대첩'을 떠올린다. 3만 왜병을 2300명의 조선군에 마을 아낙네들의 힘이 합쳐 승리를 했다니 실로 놀라운 전투였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것을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권율 자신은 행주대첩을 자신이 치른 최고의 전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항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백사집)

전투를 직접 치른 권율과 그것을 평가하는 역사가들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그의 공로로 인하여 권율을 부를 때 마치 합성어처럼 항상 '권율장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라는 사실이다.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의 장군,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다. 지금은 문관 출신이냐, 무관 출신이냐 보다 그가 진정 자주적인 군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듯하다.


태그:#서촌기행, #백운동천, #친일파, #행촌동, #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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