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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로 갑자기 빛이 모이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에게로 갑자기 빛이 모이는 시간이 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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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지 않는 당신은 유죄!'


은정이는 무언(無言)으로 나의 죄를 고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같이 있다가 잠시 사라져도 눈치채는 이가 별로 없는 캐릭터. 몸집이 작고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목소리는 뻗지 못하고 뒤로 삼키는 듯 했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담임에게 질문은 안했지만 노트에 적힌 문장들은 늘 가지런하였다. 농담하면 배시시 웃고 마는 수줍은 친구는 선생에게 참 편한 존재였다. 사고를 치지도 않고, 공부가 쳐지지도 않고, 부모가 극성도 아니고, 교우관계도 그런대로 원만한 학생. 새학기 반편성 할 때 부담 없이 아무 곳에나 배정할 수 있는 아이가 은정이였다. 이 여학생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3월, 4월,  5월... 9월, 10월 그리고 꼬맹들과의 헤어짐이 두려워지는 11월 11일 이었다. '농업인의 날'보다 '빼빼로 데이'로 더 익숙한 그 날에는 과자 포장지가 어디에나 쌓여있었다. 숫자와 생김새가 비슷한 막대과자로 마음을 전하라는 상술에 꼬맹이들 호주머니는 가벼워졌다. 학부모들은 더 심했다. 학급 전체에 간식으로 돌리고 싶다는 분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말리는 일도 매년 반복되었다. 이쯤 되면 문화가 되어버린 셈인데 먹기만 하고 넘어가기에 기회가 아까웠다.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짧은 회의를 통해 뭘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받았다. 벽화 경험이 있는 수민이가 협동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기왕이면 종이 말고 캔버스에 작업하자고 했다. 아무도 캔버스 경험이 없었다. 호응이 괜찮았다. 미술관에서만 보던 하얗고 고운 천을 만져본다는 상상만으로도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만화 캐릭터 좀 그리는 진수는 스펀지밥 징징이를 표현할 테니 맡겨달라고 했고, 투니버스 채널 마니아 가영이는 거대 도라에몽을 담아내겠다고 했다. 거들기 좋아하는 지민이와 상훈이가 자기도 미술학원 다녀봤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용기백배! 이대로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뺨이라도 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첫 단계는 젯소 바르기. 젯소는 유화나 아크릴 채색을 하기 전 표면에 바르는 재료인데 색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꿀렁꿀렁. 점도가 있는 흰 색 액체가 접시에 부어지는 순간 교실에는 환호성이 울렸다. 물감 같기도 하고 페인트 같기도 한 신기한 물질의 등장에 터져나온 탄성이었다. 꼬마 예술가들은 차례를 지켜 붓질을 개시했다. 가로 방향으로 한 번, 세로 방향으로 한 번. 누르는 힘과 바르는 양이 들쭉날쭉 이었다. 옷에는 하얀 얼룩이 지고 손에는 뻑뻑한 석고가루가 묻었다. 예상만큼 쉽지 않았다. 잠깐 말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로 방향으로 두 번, 세로 방향으로 두 번.


진행 속도가 더뎌졌다.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까불이 윤서와 건우는 20분째 부재중이다. 피카소도 감탄할 처음의 용기는 끈적거리는 젯소처럼 두려움이 되어 11살 어린이들의 마음에 들러붙었다. 마침내 스케치할 준비가 끝났다. 그림을 다 그린 기분이었다. 막막했다. 현대 추상화의 이해로 주제를 바꿔서 '순수'라는 제목으로 종료해 버릴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미니멀리즘의 극치 '순수1', '순수2'
 미니멀리즘의 극치 "순수1", "순수2"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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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은정이가 조용히 크레파스를 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리를 잡더니 담담하게 선을 그었다. 디자인에 참고하라고 가져간 인쇄물이 있는데 그것을 보고 나름대로 변형하여 옮기고 있었다. 자기 덩치보다도 큰 20호짜리 미술재료를 겁내 하지 않고 쓱싹쓱삭 팔을 움직였다. 몇 분만에 사람의 형체가 보이고 눈과 코가 생겼다. 다른 애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않고 얌전히 지켜만 봤다.



밑그림은 빠른 속도로 완성되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는데도 은정이의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온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부분 색맹을 앓는 것처럼 주변의 모습들은 옅어지고 주인공만 돋보였다. 살아있는 블랙홀이 탄생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주의를 흡수해 버리는.


 
그저 숨죽이고 보고만 있었다.
 그저 숨죽이고 보고만 있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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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미안했다. 얌전하기만 하던 어린 화가의 본모습을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마당에 그제야 알았다.  잘 가르치라고 나라에서 돈까지 주는 선생이라는 작자는 도대체 뭘 한 것인가? 아동들 특성 파악하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상담, 일기, 대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배우는 자들의 상태와 특징을 알아야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학생에 따라 던지는 질문이 바뀌고, 피드백이 달라진다.


나는 은정이를 놓치고 있었다. 무난하다고 관심 덜 쏟고, 별 일 없으니 안심했다. 그런 어리석은 스승을 지혜로운 제자가 깨우쳤다. 울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차분하게 존재감만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그녀의 판결에 동의한다.


'관찰하지 않는 교사는 유죄다.'


 
최종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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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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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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