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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에서 이어집니다)

미국 백악관은 곤혹스럽다. 중국을 막아줄 방파제인 일본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NYT 기사가 결정타였다. 미국 유대계 정치인, 기업인들은 'Holocaust'의 'H'자만 나와도 정색을 한다. 그러니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더욱이 영국에서도 이런 압력이 들어왔다. 민간연구소인 국제전략연구소(IISS) 정례회의에서 앤서니 램버트 수석연구원이 사진과 인터뷰 등 증거자료를 소개하면서 연구소나 아니면 관계국 차원에서 진상조사가 필수적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미국은 물론 서방국가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총대는 미국 밖에 멜 나라가 없다. 보다 못한 재니스 오닐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통령에게 일본 사태에 대해 엄중히 경고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일본에 명백한 시그널을 줘야 해요. 이렇게 된다면 한국은 완전히 중국 편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체 아시아에서 정말 고립된단 말입니다."

대통령도 일본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중국과 완충지대는 만들어 놓아야 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럼 이 문제를 시끄럽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보세요. 전적으로 비공개로 처리해야 됩니다. 그게 국익을 위한 일이에요."

오닐 보좌관은 일본 대사에게 전화한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 다음 일본 당국 책임자와 긴급히 만날 것을 요구한다. 주미 일본 대사는 본국 측에 요청,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한 인사의 방미를 건의한다. 일본 정부는 다나카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단장을 미국으로 보낸다.

미국과 일본은 눈에 띄지 않게 만나기 위해 일부러 워싱턴DC를 피하고, 뉴욕 한 호텔에서 만난다. 오닐은 부보좌관과 함께 왔고, 다나카 단장은 다케우치와 동행했다. 먼저 오닐이 무겁게 입을 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상상력이 너무 과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요. 무슨 일이든 음모론에서 시작하는 게 언론이죠. 일상적인 일이었고, 다만 실무자들의 착오로 수감자들 작업에 방호복을 입히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 실무자들은 다 징계 조치했고요.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건 일본 측 얘기고요. 우리는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별 파견팀이라도 꾸려서 현지 조사를 하겠습니다.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까?"

다나카와 다케우치는 속으로 웃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죠. 미국이 석연치 않게 생각하면 저희도 찜찜하니까요. 일정과 팀원들 명단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거기서 일단락됐다. 귀국하는 비행기편에서 다케우치가 다나카에게 말한다.

"단장님, 혹시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를 아십니까?"

"그게 뭔데?"

"프라하에서 가까운 도시인데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수용소로 가기 전 중간 기착지 정도로 보면 됩니다. 나치는 그곳에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를 꾸며 놓고, 선전용으로 활용했죠. 거기 사는 유대인들은 음악도 연주하고, 축구도 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꾸며놓고는, 유대인의 천국이라고 전 세계를 속였습니다.

동북수용소를 그렇게 만들면 됩니다. 구태여 크게 꾸밀 필요는 없고요. 지금 미결수들을 분리시켰으니까 지금 남아 있는 수감자들에게 작업을 시키지 말고, 잘 먹이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다케우치는 무서운 사람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나치 전범(戰犯)들의 유대인에 대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에 대해 개연성과 타당성은 물론 명분마저 당연하다는 듯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신뢰라는 게 한 번 깨지면, 계속 이어지는 게 의심이라네. 미국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고, 나중에 치밀하게 고민 좀 해봐. 우리 대업을 끝까지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일세."

다케우치는 속으로 치민다. 늘 이렇게 모든 일은 자신에게 맡겨 놓고는, 좋은 소리를 들을 때만 나서는, 늙은 여우 다나카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았다. 이제 미우라가 꾸며 놓은 대일본의 실질적인 헤게모니가 자신에게 오는 날만 손꼽으면 된다.

미국 파견팀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 측에서 취소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외적으로 이라크는 물론 시리아에서는 내전 상황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미국 국내에서는 끊이지 않는 백인 경찰의 흑인 총격 살인 사건이 잇달으며, 이후 '흑인 자치주' 지정을 요구하는 흑백 인종 갈등이 깊어만 간다. 뿐만 아니라 급증한 히스패닉 계통 사람들의 이민 자유화 요구에 속이 시끄럽다. 그러니 과거 '세계경찰' 노릇이 이제는 미국에 힘겹다. 일본이 뭘 하건 간에 간여하고 싶지도 않고, 참견할 여력도 없다. 불길한 징조다.

안 좋은 예언이나 예상은 늘 이뤄지기 마련이다. 트로이 멸망을 예언했던 카산드라 공주의 말처럼.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카산드라라는 인물을 소재화-현대화 한 소설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카산드라 카첸버그라는 자폐증 여자 주인공을 앞세워 인류에 닥친 재앙을 예언하게 만들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는 상황을 묘사했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작품 <카산드라>청동상.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작품 <카산드라>청동상.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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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명예본부장은 기가 막혔다. 미심쩍은 동북수용소에 대한 정보 공개 요청이 거부됐다. 관계 당국 측으로부터 국가안전보장 관련 사항에 대해, 그것도 적법한 절차를 거친 사안에 대해 자꾸 의문을 갖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아닌 경고까지 받았다. 마치 수십 년 전 학창시절 경찰 정보과 형사가 은밀하게 찾아와 예상 형량을 언급하며 겁줬던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기관의 하는 짓은 옛 시간에 묶여 있다. 인권이나 국민의 알 권리는 안중에 없다. 오로지 자신들 편의만이 기준점이다.

"김원택, 민주당 쪽 사람들과 연락은 잘 주고 받고 있지?"

"네, 일이 있을 때마다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학생운동-시민운동 주체인 전일본공동체본부 도쿄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원택은 요즘 민주당과 협의를 통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 세력 확산에 애쓰고 있다. 기존 운동권에다가 공식적인 당 조직을 참여시켜 활동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런 활동의 홍보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인원이 적더라도 시민들이 직접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각 지부별로 최근 실종자들에 대해 전국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가 심상치 않습니다. 3개월간 무려 1천500명이 넘는데요. 고등학생 이하 청소년들을 제외하고 성인 실종자 수가 지역별로 예년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5배 이상이나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요. 그들 중 80% 넘는 인원이 한국계입니다. 아직 귀화하지 않고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고요.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그 가족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고, 곧 백서를 내놓을 계획이랍니다."

말하는 김원택의 설명은 매우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듣는 엔도 본부장의 심경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 설명 속에 들어있는 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서가 공개되는 시점이 적기라고 판단되는군. 그때를 기화로 일본 곳곳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와야 해. 그래야만 전체 일본 사회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고, 시민들 힘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는 국수주의  광풍을 막을 수 있게 돼."

엔도 본부장은 자못 비장하다. 나름대로 확신이 있어 당위와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일본에서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주체가 된 변혁이나 하다못해 '운동'마저도 딱히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전에 볼 수 없는 동향이 파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사람들 심리가 온라인에서는 거침없습니다. 흥분을 보일 뿐 아니라 일본의 위태로운 움직임에 대해 멈춰야 한다는, 그래서 더 이상 미친 일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다는 얘깁니다.

특히 몇 년 전 안보법안에 대해 반대했던 '실즈(SEALD's,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를 중심으로 오프라인에서 실체를 갖는 전국적인 단체를 결성하자는 네티즌도 상당수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매개로 민주당과 공산당 등 정당을 개입시킨다면 그야말로 시민운동의 불을 댕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우리 시민운동 전문가들의 기대 섞인 분석입니다."

김원택은 엔도에게 확신에 찬 듯 얘기한다. 진중한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그만큼 변화의 조짐을 온전히 감지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 했던 일들이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 파장은 너울너울 너울을 일으켜 사람과 사람사이로 퍼진다. 그냥 퍼지는 게 아니다. 낱낱이 하나하나 모여 그것을 산술적으로 합친 것보다 훨씬 큰 해일이 된다. 해일을 넘어 쓰나미로 커진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삼키려든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무자비한 대중의 힘으로.

온라인에서도 강자와 약자, 창안자와 추종자, 대표와 구성원이라는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김원택은 그들 중 강자이면서 창안자이자 대표성을 갖는 사람을 찾아낸다. '반정부 블로거'로서 이름이 높아진 인물이다. 그의 ID는 '태풍의 눈'이다. 바로 블로그 댓글과 SNS를 통해 김원택은 그의 '숭배자'를 자처한다. 그는 쾌히 만날 것을 약속한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태풍의 눈'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제히 출동하자 뻑적지근한 집회가 된다. 재밌는 것은 오프라인에 나타난 '태풍의 눈'은 겨우 스무살이 갓 넘은 전문대 학생이라는 점이다. 글로써 강인하게 느껴진 것과는 달리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가 에메럴드시에서 마주친 마법사 오즈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 본 '마법사'와 오프라인의 떠돌이 점쟁이 '마블 교수'처럼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명작 빅터 플레밍 감독 영화 오즈의 마법사> 에서 떠돌이 점쟁이 마블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로시. 나중에 드러난 일이지만 마블 교수는 자신을 '오즈의 마법사'로 만들어 도로시를 속였다.
 오래된 명작 빅터 플레밍 감독 영화 오즈의 마법사> 에서 떠돌이 점쟁이 마블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로시. 나중에 드러난 일이지만 마블 교수는 자신을 '오즈의 마법사'로 만들어 도로시를 속였다.
ⓒ 영화 '오즈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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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만난 사람들이 겉돌았다. 더욱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 온라인에서 친해진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대부분 주제나 의지가 뚜렷하지 않아 흐지부지 흐를 때가 십중팔구다. 하지만 곧 모임은 매가리 없던 '태풍의 눈'의 힘 들어간 지시대로 곧 방향을 잡는다.


태그:#카산드라, #테레지엔슈타트, #IISS, #오즈의 마법사, #일본 SEA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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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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