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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나이가 73세나 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1,500여 승병들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림은 대구 임란의병관에 게시되어 있는 평양성 전투도.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나이가 73세나 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1,500여 승병들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림은 대구 임란의병관에 게시되어 있는 평양성 전투도.
ⓒ 임란의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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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개입한 삼국 시대 승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아마도 고구려의 바둑 고수 도림일 듯하다. 도림은 바둑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 화려한 궁성을 쌓도록 유도하는 등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 475년,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온 장수왕에게 백제의 수도 한성은 함락당하고, 개로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고려 때의 승군(僧軍) 중에는 1232년 몽고군 도원수 살례탑(撒禮塔)을 처인성(경기도 용인)에서 죽인 김윤후가 역사에 큰 이름을 새겼다. 승려였던 김윤후는 원의 4차(1253년), 5차(1254년) 침략 때에도 충주산성을 잘 지켜 결국 적이 물러가게 만들었다. 5차침략 때 침략군에게 함락되지 않은 성은 전국에서 충주성과 상주성뿐이었는데, 상주산성을 지킨 장수도 승병 홍지(洪之)였다.

조선 시대에 승군들이 활약한 대표적 시기는 말할 것도 없이 임진왜란 와중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대사(1520~1604)는 선조의 부탁으로 창의 궐기문을 전국 사찰에 보낸다. 대사의 호소를 받은 승려들은 분연히 의승군(義僧軍)에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73세나 된 고령의 서산대사 본인도 1500여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73세 고령의 서산대사도 1500여 승병 이끌고 참전

(왼쪽) 사명대사가 승군들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로, 대구 임란의병관 게시물이다. (오른쪽) 사명대사 초상으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국가 보물이다.
 (왼쪽) 사명대사가 승군들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로, 대구 임란의병관 게시물이다. (오른쪽) 사명대사 초상으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국가 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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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누리집은 "세계 최대의 석불인 약사여래대불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동화사는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연중 내내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들이 참배하는 동양의 대표 성지입니다."하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동화사에는 문화재들이 많다.

동화사 경내를 잘 둘러보려면 봉황문 쪽에서 들어가야 한다. 예전에 동화사를 드나들던 사람들이 즐겨 이용했던 길이다. 지금은 주차 편의 때문에 식당가 쪽으로 들어가는 방문객들이 조금 오르막을 걷더라도 봉황문으로 입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보물 243호인 마애여래좌상을 감상할 수 있다. 답사 순서를 적시해보면 아래와 같다.

1. 봉황문 마애여래좌상/보물 243호
2. 통일대불
3. 당간지주/보물 254호
3. (성보박물관) 사명대사 초상/보물 1505호
  보조국사 지눌 초상/보물 1639호
  아미타회상도/보물 1601호,
  영남치영아문 현판 등
  * 동화사 누리집의 사명대사 초상 소개 : 전국에 있는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는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이 남아있다. 이 진영은 17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켜 뜬 눈과 큰 코, 큰 귀 등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수염을 한 유정이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에 위엄이 넘친다.
4. 부도/보물 601호
5. 금당암 동서 3층석탑/보물 248호
  * 금당암은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
6. 봉서루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衙門) 현판
7. 대웅전/보물 1563호,
  목조약사여래좌상/보물 1607호
8. 극락전/유형문화재 11호
9. 조사전(고승들의 초상)⇢ 심지대사 나무
10.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244호,
    3층석탑/보물 247호
11. (중턱까지 등산) 염불암 청석탑/유형문화재 19호,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유형문화재 14호
12. (정상까지 등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유형문화재 20호

동화사와 남지장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1544~1610)가 대구에 남긴 임진왜란 유적이다. 1595년부터 동화사에서 활동했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 이 절을 영남 지역 승병의 총본부로 사용했다. 대웅전 앞 봉서루 뒷면 벽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衙門)'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승군은 다른 말로 치군(緇軍)이라고도 한다. 치(緇)가 승려들의 옷을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에 설치된 승려 군영의 문'을 의미하고, 이 현판이 봉서루에 걸려 있는 것은 동화사가 임진왜란 중 영남 지역 승군 본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봉서루에 지금 걸려 있는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사명대사 때에도 걸려 있었던 진품인 것은 아니다. 원품은 동화사 경내 성보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성보박물관의 진품 현판에서 받는 뭉클함도 대단하지만, 봉서루 벽의 복사본을 바라보는 일도 그와는 또 다른 감회를 맛보게 해준다. 건물에 달려 있는 현판을 보노라면 임진왜란 당시 이곳 동화사에서 승병들이 창을 잡고 훈련하는 풍경이 생생하게, 눈물겹게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성보박물관에는 사명대사가 의병대장 인장(印章)으로 썼던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등도 보관되어 있다. 당연히, 동화사에 가서는 성보박물관을 꼭 찾아보아야 한다.

동화사 누리집은 '1606년(선조 39) 사명당 유정(惟政)대사가 (동화사를) 중창'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대웅전 왼쪽 옆 조사전에 들면 사명대사의 진영(眞影)을 볼 수 있다(물론 보물 1505호인 진품은 성보박물관 내에 있다). 조사전(祖師殿)은 어떤 사찰의 조(祖)상과 같은 대사(師)를 모시는 집(殿)이다. 즉, 동화사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중 승병대장으로서 머물렀던 시기와, 절을 크게 중창한 일을 기려 그를 조사전에 모시고 있는 것이다.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는 봉서루 뒷면 벽의 모습. 유리에 비친 건물이 동화사 대웅전이다.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는 봉서루 뒷면 벽의 모습. 유리에 비친 건물이 동화사 대웅전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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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사명대사의 임진왜란 흔적이 남은 사찰이 한 곳 더 있다. 최정산 중턱(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865)에 있는 남지장사가 바로 그곳이다. 남지장사는 동화사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북지장사와 대비하여 이름이 그렇게 바뀐 것으로 전해지는 절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본래 있던 절이 전소되어 그 후 중창했는데 1767년(영조 43) 남지장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기이한 일은, 절의 사라져버린 본명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남지장사 누리집은 스스로를 '684년(신문왕 4) 양한이 창건하였다, 신라 때에는 왕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유지들도 시주를 많이 하여 사세가 매우 컸다, 한때는 8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수도하는 승려만도 3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궁예가 일으킨 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1263년(고려 원종 4) 일연이 중창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남지장사
 남지장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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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장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 유정이 절을 승병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당시 승병과 의병장 우배순이 거느린 의병이 함께 훈련하였는데, 모두 3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에 탔다'.

우배선 동상
 우배선 동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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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지장사 누리집에 등장하는 '우배순'은 의병장 우배선(1569~1621)의 육촌동생이다. 우배순은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다. 누리집이 지금처럼 '의병장'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 의병장은 우배선을 가리키게 된다. 월곡선생창의기념사업회가 펴낸 <월곡 우배선 선생의 생애와 의병 활동>에 실려 있는 대사헌 윤봉오의 '(우배선) 행장'에 보면 '(우배선은) 최정산 전투에서 (적의 머리) 수백 급을 베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대구의 화원·달성·최정산 등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했다. 김성일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합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로7길 38에 그를 기리는 월곡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부속 암자들을 꼭 봐야 하는 남지장사

남지장사에서는 특히 부속 암자들을 자세히 둘러보아야 한다. 대웅전 왼편에 있는 백련암(白蓮庵)은 사명대사가 수행을 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대웅전을 가운데에 놓고 볼 때 백련암의 반대편, 즉 남지장사의 오른쪽을 돌아 아늑한 솔숲길을 천천히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청련암(靑蓮庵)은 비구니들의 수행처이다. 법당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보통의 여염집처럼 느껴지는 이 특이한 암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지장사 청련암(대구시 유형문화재 34호)
 남지장사 청련암(대구시 유형문화재 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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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장사를 두루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에서 문득 고은의 시 <그 꽃>을 떠올린다. 남지장사를 향해 올라갈 때에는 무심히 지났던 마을인데, 내려오는 길에 보니 이름부터 아주 새롭게 다가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시의 격언 그대로이다.

마을 이름이 '하얀 사슴이 사는 동네', 즉 백록동(白鹿洞)이다.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하고 있는 중에 하얀 사슴이 나타났고, 그 이후 사람들이 이 마을을 "백록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남지장사만이 아니라 이 마을도 임진왜란 유적지이다. 7년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 인구의 1/3이 사라졌고, 경상도 농토의 2/3가 황폐화되었다는데 어찌 우리나라에 임진왜란 유적지 아닌 곳이 있을까! 마을회관 앞에 마련되어 있는 정자에 올라 한참 동안 백록마을을 바라본다.

최정산 아래에는 백록동 말고도 자신의 이름에 사슴을 넣고 있는 마을이 또 있다. 최정산 높은 기슭에서 아주 평지로 내려오면 항왜(降倭)장군 김충선이 살았던 마을이 나타난다. 녹동서원이 있는 이 마을의 이름에도 사슴이 들어 있다. 우록동(友鹿洞)이다. 김충선이 '사슴을 벗하며 살만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최정산 주변은 확실히 사슴이 살 만한 청정 지역인가 보다. (김충선에 대해서는 <일본군 장군,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과 <일본 장수에게 '김해 김씨' 성 내린 선조> 기사 참조)

백록마을 회관
 백록마을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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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남지장사, #청련암, #사명대사, #우배선,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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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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