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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1980년대 중반 경기도 광주 도평요에 칩거하던 이후락(왼쪽)을 방문한 기시 전 일본 수상(오른쪽 빨간넥타이). 기시 전 총리는 일본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다.
 1980년대 중반 경기도 광주 도평요에 칩거하던 이후락(왼쪽)을 방문한 기시 전 일본 수상(오른쪽 빨간넥타이). 기시 전 총리는 일본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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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HR·아래 존칭 생략)이 박정희 정권 2인자로 불린 것은 바로 HR이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마다 그의 최측근으로 있었다는 점이다.

HR은 1970년 12월 21일부터 1973년 12월 1일까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다. 그러면서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1972년 5월 극비리 평양방문과 김일성 면담, 그로 인한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등 굵직한 일을 맡았다. 또한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당시 유신의 최고 중심부에 있었다.

하지만 HR과 박정희의 관계는 1963년 12월 10일부터 1969년 10월 21일까지 약 6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결정됐다. 1969년 장기집권의 토대가 된 3선 개헌이 강행되고, 이에 국민적 지탄이 쏟아지자 박정희는 HR을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주일대사로 내보낸다.

HR이 1970년 12월 21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되기 전 지냈던 1년간의 주일대사 임무는 HR에게는 일본 정부 핵심부와 친분을 쌓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같은 친분은 HR이 신군부의 등장으로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전직 일본 총리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HR을 찾아 위로하게끔 한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 전 일본 총리는 HR에게 '각하'라고 지칭한 것으로 나타나 비상한 관심을 끈다.

후쿠다 전 수상이 이후락을 '각하'라고 부른 이유

HR을 10여 년간 아주 가까이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는 30년이 지난 당시의 일들을 '어휘'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가 당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HR이 외부와는 철저하게 담을 쌓으면서 가능했다. HR은 12·12로 신군분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고 권력에서 쫓겨난 이후 언론 또는 주변 인사들과의 연락을 일절 차단했다. 단지 이동휘 등 일부 가신들과만 교류했을 뿐이다. 이동휘의 증언이다. 

"HR이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물러난 뒤 당시 한일의원연맹 사무총장인 이석용이 찾아와 '한일의원연맹으로 와서 나를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한일의원연맹 섭외부장으로 일하게 됐다. 이석용은 당시 이재형 사무총장(국회의장)의 사람이었는데, HR이 중앙정보부장을 할 당시 중정 국장을 지낸 인물이었다(이재형 12대 국회의장은 1기: 1985년 5월 13일~1987년 5월 12일, 2기: 1987년 5월 13일~1988년 5월 29일까지 임기였다. 기자 주).

몇 해 전 발생한 록히드 사건으로 일본 정관계의 허점을 발견한 나는 일본 로비스트가 되어 국익에 일조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또한 HR로부터 일본 정관계 인사를 다수 소개 받은 터라 대일 관계에 의욕이 있었다(록히드 사건은 미국의 항공기 제작회사인 록히드 사가 항공기를 팔기 위해서 일본과 서독 이탈리아 등 서방국의 정관계에 뇌물을 뿌린 사건 -기자 주).

한일의원연맹 섭외부장으로 일하던 내게 한 날은 이석용 사무총장이 '후쿠다 전 일본 총리(후쿠다 다케오, 재직 기간: 1976년 12월 24일~1978년 12월 7일, 1995년 작고)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을 방문하러 왔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롯데호텔 34층 신격호 회장 집무실로 갔다.

신격호 회장이 후쿠다 전 총리에게 '한일의원연맹의 섭외부장이다'고 나를 소개했다. 이에 후쿠다 전 총리가 '젊은데 부장인가?'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신격호 회장은 다시 '이후락의 조카다'고 나를 소개했다. 후쿠다 전 총리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내게 '이후락과 전화통화를 하고 싶다. 연결해 달라'고 했다.

나는 경기도 광주 도평요에 전화를 넣어 HR과 후쿠다를 연결했다. 전화기를 받은 후쿠다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일본어와 한국어의 '각하' 발음은 같다. 이동휘는 일본어에 능통하다 -기자 주).

후쿠다가 HR에게 '각하'라고 인사한 후 길게 통화하는 모습은 신격호 회장과 이석용 사무총장, 또 다른 배석자 등이 목격했다.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각하로 지칭되는 사람은 전두환이 유일했다. 이승만,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까지 각하로 부르는 것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사용하지 않게 됐다. 당시 서슬푸른 전두환이 집권 중이었는데 후쿠다는 왜 권력에서 밀려난 HR에게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했을까?

이동휘 "위안부 문제, 일본 특성 파악해서 대처해야"

이에 대해 이동휘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각국 대사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때문에 주일대사를 지낸 HR을 여전히 각하라고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예우를 갖추는 일본의 전통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휘의 증언은 계속된다.

"후카다가 HR과 통화를 한 후 파악한 근황이 일본 정가에 퍼진 모양이었다. 얼마 후 기시 전 일본 총리는 직접 경기도 광주 도평요를 방문해 HR과 만나기도 했다. 당시 나도 배석했는데, HR을 대하는 기시의 예우는 각별했다."

이동휘의 이러한 증언은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 타결로 정부가 후폭풍을 맞는 현실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지급받았다. 1965년 일본과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굴욕적 협상'이라는 국민적 반대 여론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 HR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이 협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위안부 협상을 밀어붙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신적 지주인 외할아버지가 바로 기시 전 수상이다(기시 노부스케, 1차 1957년 2월 25일~1958년 6월 12일, 2차 1958년 6월 12일~1960년 7월 19일 일본 수상을 지냈고 1987년에 작고했다).

기시 전 수상은 일본 정계의 거물로 군림했으며 일본 제국주의 시절 만주국의 산업 5개년 개발 계획을 수립한 장본인이다. 이 계획은 군부 엘리트와 관료, 재벌이 지배하는 중앙통제형 개발독재체제로, 후일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평가가 있다.

이와 관련 이동휘는 "현재 위안부 협상과 관련해 비난 여론이 거센 것을 알고 있다"며 "한일의원연맹과 일본 유학을 통해 절실히 느낀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의 특성이 개인과 단체보다는 국가를 우선한다는 것"이라며 "이 같은 일본의 특성을 잘 파악해 일본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동휘는 당시 차관급으로 여겨지던 한일의원연맹 전문위원까지 지냈다.


태그:#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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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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