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라기 월드>의 한 장면. 갈수록 대형화하는 할리우드 제작·배급사들은 세계 각국의 영화자본을 한 입에 먹어치우는 강력한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영화 <쥬라기 월드>의 한 장면. 갈수록 대형화하는 할리우드 제작·배급사들은 세계 각국의 영화자본을 한 입에 먹어치우는 강력한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형 제작·배급사들은 공룡 같은 몸집의 블록버스터를 연이어 쏟아내며 2015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영화팬을 집어삼켰다. 매년 두 편씩 천만 영화를 내놓으며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 극장가도 체급이 다른 할리우드의 공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궁핍한 소재에 갈증을 느껴온 할리우드 제작·배급사들의 선택은 시리즈였다. 선택의 이면에는 검증된 구성과 캐릭터에 규모와 연출의 힘을 더하면 안전한 흥행작이 나올 거란 잇속 빠른 계산이 깔려있었다.

시리즈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난 한 해 가장 사랑받은 시리즈물 두 편이 무덤에서 되돌아온 전설적 작품이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난 한 해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최신 흥행작뿐 아니라 수명이 다했다고 여겨진 오랜 시리즈도 무덤에서 일으켜 세웠다.

시리즈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념

 할리우드 시리즈물의 미래를 보여준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노장의 집념이 빛났다. 어쩌면 할리우드 시리즈물의 미래는 이와 같은 태도에 있는 게 아닐까?

할리우드 시리즈물의 미래를 보여준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노장의 집념이 빛났다. 어쩌면 할리우드 시리즈물의 미래는 이와 같은 태도에 있는 게 아닐까?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하나는 2015년 기준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에 빛나는 콜린 트레보로우의 <쥬라기 월드>다. 아차, 실수다. <쥬라기 월드>는 감독인 콜린 트레보로우의 이름보다는, 오리지널 시리즈의 감독이자 리부트편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 혹은 제작사 유니버설 픽처스의 영화로 불려야 마땅하다. 잔인한 말일 수 있겠지만, 콜린 트레보로우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쥬라기 월드>는 만들어졌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도 지금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어쨌든 콜린 트레보로우는 <쥬라기 월드>를 통해 세계 최고수준의 흥행감독이 됐다.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전 세계 극장가에서 16억69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편당 수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전 세계 최고의 흥행작으로 군림한 기존 시리즈의 기록을 가뿐히 뛰어넘은 것이다. 앞서 <쥬라기 공원> 시리즈는 1편 4억 달러, 2편 2억2000만 달러, 3편은 1억8천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린 바 있다. <쥬라기 월드>가 기록한 16억6900만 달러는 세 편의 수익을 모두 합친 것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여기서 잠깐. 16억6900만 달러를 2015년 미국 맥도날드 빅맥 가격인 4.8달러로 나눠 계산하면 무려 3억4770만 개가 나온다. 미국 인구가 3억1000만 명이 조금 넘는다니, 전 국민에게 빅맥 하나씩을 돌리고도 3000만 개나 더 살 수 있는 돈을 영화 한 편이 벌어들인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지난 1993년 개봉한 <쥬라기 공원>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여러 매체가 앞다퉈 '자동차나 전자기기처럼 영화가 밥 먹여주는 세상이 왔다'는 보도를 쏟아낸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쥬라기 월드>는 정말로 전 국민에게 빅맥을 돌릴 수 있는 영화가 됐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도 무덤에서 돌아온 시리즈물이다. 본래 호주에서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멜 깁슨 주연의 저예산 SF·액션영화로 3편까지 제작됐다. 워너 브라더스의 지원을 받아 30년 만에 부활한 이 영화는 오리지날 시리즈의 창조주 조지 밀러가 그대로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으로 제작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흔이 넘은 노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역동적이었던 영화는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흥행 면에서도 제작비 1억50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검증된 구성과 스토리

 2015년 첫 천만영화로 기록된 디즈니-마블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포스터. 2016년 한 해도 마블을 비롯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의 공세가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첫 천만영화로 기록된 디즈니-마블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포스터. 2016년 한 해도 마블을 비롯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의 공세가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할리우드의 내일이 언제나 오늘과 같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전 세계 흥행순위 10위 안에 자리한 작품 가운데 8편이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이 할리우드가 처한 현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쥬라기 월드> <분노의 질주: 더 세븐>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미니언즈> <007 스펙터>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헝거게임: 더 파이널>이 그 영화다.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새로운 설정과 세계관을 창조하기보다는 검증된 구성과 전개, 캐릭터를 재활용하는 데 급급했다는 뜻이다.

국내 박스오피스 순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분노의 질주: 더 세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쥬라기 월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테이큰 3> <007 스펙터>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 등 2015년 흥행순위(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5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영화 상당수가 시리즈물이다.

이 같은 추세는 한동안 이어질 듯하다. 올해만 해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엑스맨: 아포칼립스> 등 마블 히어로물이 등판할 예정이고, 마블의 영원한 맞수인 DC코믹스의 대작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도 출격을 준비 중이다. 어디 그뿐인가. 2014년 개봉해 전 세계 5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 <닌자터틀>의 새로운 시리즈도 6월 중에 선보인다.

재난영화의 거장 롤랜드 에머리히는 무려 20여 년 만에 명작 <인디펜던스 데이>의 속편을 들고 찾아온다. SF와 애니메이션 장르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 적지 않다. <스타워즈> <스타트랙> 등 전통의 강호와 <다이버전트> 시리즈 속편과 <쥬만지> 리부트 버전 등 신흥 SF의 맞대결도 눈길을 끈다. 드림웍스와 디즈니는 시퀄과 스핀오프 등 시리즈물을 준비 중이다. 이들이 <타잔> <정글북> 등 유명 동화의 새로운 시리즈와 어떤 대결을 펼칠지 궁금하다. 그밖에도 십 수 편에 이르는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이 연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니 할리우드의 시리즈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물론 시리즈물의 흥행세가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매년 쏟아지는 시리즈물 가운데 상당수가 관객 및 평단으로부터 흥행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제작·배급사의 흥행전략이 지금처럼 안일한 우려먹기 정도에 그친다면 의외로 가까운 시일 내에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도 있다.

안일한 우려먹기에도 불구하고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의 포스터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의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다만 분명한 건 할리우드가 소재의 고갈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할리우드가 지닌 힘의 근간으로 꼽혀온 예술적 저변이 건재하다.

최근 몇 년간 영국, 캐나다, 멕시코, 스페인, 이탈리아, 인도, 브라질, 홍콩, 한국 등 세계 각국에서 손꼽히는 최고 수준의 영화인들이 연이어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개개인이 지닌 생각과 가능성, 창조성과 역동성이 미국의 예술적 저변에 밑거름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였다. 그는 2014년 수상자 알폰소 쿠아론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에서 건너온 영화인이다. 2013년 수상자 이안은 대만, 2012년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프랑스 출신이다. 4년 연속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시작하지 않은 감독들이 미국 영화계의 상징과도 같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를 거머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최근 몇 년간 더 나은 처우와 환경을 찾아 중국과 미국으로 떠나는 영화인이 줄을 잇는 한국 영화계에서 더욱 주목할만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일부 언론에선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의 해외 진출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미국이라 해서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도 아니다. 한때 할리우드를 장악했던 미국 태생 영화인들은 캐나다, 영국에 이어 멕시코와 호주, 이탈리아 감독들에게 조금씩 밀려나지 않던가.

이제 막 문을 연 2016년, 할리우드 영화는 익숙한 흐름 가운데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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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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