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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위로 비가 내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위로 비가 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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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가 절규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주산학원 원장 김도섭은 알암이를 유괴해 살해한다. 알암이 엄마는 복수심에 불타오르지만 이웃인 김 집사의 권유로 신앙생활에 입문한다. 엄마는 어느 날 범인 김도섭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그를 만나러 교도소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엄마는 큰 충격에 빠진다.

김도섭은 엄마 앞에서 너무 당당하다. 그는 엄마의 면전에 대고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했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마음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해 어떤 책벌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알암이 엄마는 김도섭의 당당한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바로 이때 김 집사가 끼어든다. 김 집사는 대놓고 김도섭을 감싸고 나선다.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으로 주님의 사람을 얻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예요."

용서, 타인이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인가?

지난 12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회 및 제12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
 지난 12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회 및 제12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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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대한민국엄마부대봉사단(아래 엄마부대)' 등 극우단체들이 서울 마포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벌인 일은 여러모로 <벌레 이야기> 속 상황과 판박이다. 이들이 든 손팻말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제 아베의 사과를 받았으니 남은 여생 편히 지내십시오."
"일본을 용서하는 것이 일본을 정신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들의 구호는 한 마디로 '용서하라'다. 아베가 진심으로 사과했는지의 여부는 일단 접어두자. 이번 합의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나 이분들을 돕던 단체들의 입장은 어떨까? 정대협은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지난해 12월 28일 20여 개 관련 단체와 함께 공동성명을 냈다. 이들은 성명에서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비록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일본군'위안부' 범죄가 일본 정부 및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범죄라는 점은 이번 합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관여 수준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과 '위안부' 범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또한 아베 총리가 일본 정부를 대표해 내각총리로서 직접 사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독사과'에 그쳤고, 사과의 대상도 너무나 모호해서 '진정성이 담긴 사죄'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피해 할머니들 역시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분통을 터뜨렸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30일 열린 '제1211차 수요집회'에 나와 이렇게 외쳤다.

"여기 나와야만 여러분들한테 역사의 산증인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나와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베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정신없는 놈이죠.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이런 아베를 보고만 있어야 되겠습니까.

우리 정부는 도와줘요? 도와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두 번, 세 번 죽입니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그냥 죽을 수 없습니다. 그때 협상한다고 일본 얘기를 전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65년 협정 때 다 해결됐다. 거짓말도 하면 늡니다. 이런 거짓말로 타결했다, 해결됐다, 보도하고.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해결됐다는데 할머니 기분 어때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일본의 전쟁범죄로 아직도 아파한다. 그러나 가해자인 일본은 이런 아픔을 어루만지기보다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이전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외무상은 지난 4일 오전(현지 시각)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까지의 한일간 상호 작용과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 발언을 근거로 적절하게 이전되는 것으로 말씀드렸다, 그 인식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했다.

위안부 합의, 최종적이지도 불가역적이지도 않아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회담을 시작하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위안부 문제 논의, 한-일 장관회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회담을 시작하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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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죄의 드러남'을 전제로 한다. <벌레 이야기>에서 알암이 엄마가 그토록 분노한 이유도 죄의 드러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일 위안부 협상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책임 통감'이라는 낱말 뒤로 법적 책임을 피해갔고,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며 추후 위안부 논의 여지를 걸어 잠갔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일수도, 불가역적일 수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독일 뉘른베르크에 전범재판소를 설치하고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 부총통 루돌프 헤스 등 나치 거물들을 심판대에 세웠다.

이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헤르만 괴링은 "지금은 승리자들이 나를 죽일 수 있겠지만 50년이 지나면 독일 국민들이 내 시체를 다시 대리석 관에 넣어 국가영웅이자 순교자로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그러나 연합국의 의지는 강했다. 인종청소와 침략전쟁을 시효 없는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에게 죄를 물었다.

뉘른베르크 판례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풀어보자. 위안부가 비록 인종청소에 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동원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일이고, 피식민국 여성을 성노예로 착취한 데다 70년 가까이 정부 차원에서 죄과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질이 너무 심각하다.

게다가 국제규범상 반인도적 범죄는 공소시효를 배재해 왔기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실제 독일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유대인 위령탑에 무릎 꿇은 이후 46년 동안 빠짐없이 과거사 반성을 잊지 않고 있다.

<벌레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알암이 엄마는 김 집사의 협박에 가까운 용서 요구에 모멸감을 느끼고, 결국 자살을 택한다. 죄의 드러남 없는 '용서'가 인격살인과 다를 바 없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가 이청준은 결말에서 이렇게 꼬집는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지난 4일 엄마부대 등이 벌였던 용서 강요 행동 역시 인간의 주체적 존엄성을 짓밟는 인격살인이다. 존재의 존엄성을 짓밟고, '엄마'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숭고한 낱말을 오염시키며, 용서의 참 의미를 무색케 한 행동에 대해 이 땅의 깨어 있는 지성들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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