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교시 수업 시작하기가 무섭게 꾸벅꾸벅 졸던 정원(가명)이가 어째 멀쩡하더라니, 교과서 아래에다 잡지를 숨겨놓고 읽다 걸렸다. 어디서 구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는 두툼한 축구 잡지다. '올 컬러'인 데다 사진이 많아선지 듬성듬성 찢겨나간 흔적도 있다. 언젠가 정원이는 '교과서가 축구 잡지 같다면 서울대 정도는 열 번도 더 갔을 거'라며 너스레를 떤 적이 있다.

정원이의 가방은 여느 아이의 것과는 달리 원기둥을 눕힌 모양의 긴 스포츠 백이다. 책을 담기에는 적당하지 않을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열어보면 책은커녕 필통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언제든 들어있는 건 딱 두 가지, 축구공과 체육복이다. 그것도 학교 체육복과 그가 죽고 못 사는 스페인 프로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 두 벌이 포개져 있다.

정원이만 유별난 건 아니다. 같은 반 주현(가명)이는 리오넬 메시의 팬이다. 듣자니까, 그의 방에는 제 몸보다 큰 메시의 브로마이드가 벽에 걸려있고 '바르셀로나팀의 홈과 원정, 시즌별 유니폼은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메시의 현란한 플레이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수집할 정도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메시교'의 독실한 신자다.

주현이는 축구 실력도 남달라서 체육대회 때 학급별 대항전을 하면 서너 명 정도는 가볍게 제치는데, 그와 맞붙는 반은 '경기 하나마나 무조건 탈락'이라며 미리 포기할 정도다. 설령 밥은 굶어도 점심시간 공은 차야 한다는 그에게 축구란 학교에 오는 유일하다시피 한 이유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방과 후 수업 과목에 축구가 개설돼 있는지 여부"라며 '진지하게' 답했던 아이다.

점심시간 학생들의 논쟁 "최고 선수, 호날두냐 메시냐"

스페인 프로축구팀 'FC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리오넬 메시' 선수.
 스페인 프로축구팀 'FC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리오넬 메시' 선수.
ⓒ flickr.com

관련사진보기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축구는 차라리 '종교'다. 대개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은 유행을 타지만, 축구만은 예외다. 연중 경기장을 찾는 관중 수로만 따져 우리나라에선 야구가 대세일 것 같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는 축구에 비할 바 아니다. 축구는 운동장에 공 하나만 있으면 되니, 점심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잠깐 나가서 즐길 수 있는 전천후 스포츠다.

공을 못 차도 축구팬이 되는 데는 문제 없다. 정원이와 주현이와는 달리 요즘 아이들은 '뛰는' 것보다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옛날 같으면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은 '축구를 잘한다'는 뜻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축구에 대해 관심이 많다'거나 '많이 알고 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TV에서 영국이나 독일, 스페인 등지의 수준 높은 프로축구 경기를 상시 중계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체육대회 때 학급별로 '반 티'를 맞춰 입는 경우가 많은데, 디자인은 하나같이 유럽 유명 축구팀의 유니폼이다. 챔피언스리그나 유럽 대항전 등 '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새벽 생중계를 시청하고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등교하는 아이도 더러 있다. 큰 경기 다음 날은 어김없이 아이들이 축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때만큼은 다들 축구팀의 감독이나 해설자가 된다.

그런데, 며칠 전 점심시간에 정원이와 주현이가 도서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주위에 친구들이 모여들더니 이내 반반으로 나뉘어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주먹다짐으로 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들끼리의 언쟁이라고 하기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내용인즉슨,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호날두냐, 메시냐'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두 아이에게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주제였던 거다.

"킥 능력, 스피드, 헤딩 능력, 몸싸움 등 어느 면에서 보나 호날두가 메시보단 한 수 위지."
"물론, 그러한 세부 능력은 모두 호날두가 나을지 몰라도, '축구'는 메시가 더 잘하지."

논쟁은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그냥 둘 다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하면 될 일인데, 죽자고 달려드는 걸 보면 이참에 '승부'를 낼 셈인 모양이다. 두 선수의 서열을 정하는 게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저러나 싶지만, 축구가 취미를 넘어 종교가 돼버린 두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대결일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의 곁에서 편으로 갈려 훈수를 두는 아이들까지 뒤엉켜 축구 토론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러쿵저러쿵 다툼은 길었지만, 승부는 뜻밖에 쉽게 갈렸다. 말다툼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심판을 자처하며 결정적인 '기준'을 제시했는데, 그걸로 언쟁은 끝이 났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돈이 곧 실력이니, 둘 중 연봉이 많은 사람이 더 뛰어난 선수"라는 거다. 올해 기준으로 호날두는 639억 원, 메시는 770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결국 주현이가 이겼고, 정원이도 '쿨'하게 인정했다.

그가 두 선수의 구체적인 연봉 액수를 언급하자 주위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루에 2억 원도 넘게 버는 셈"이라며 부러움을 토로하는가 하면, "전 세계 축구팬들을 설레게 만드니 그 정도 가치는 있다"는 의견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또 어떤 아이는 "저신장증이라는 장애를 딛고 세계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선 메시의 성장담은 수백억 원의 가치를 넘어서는 감동을 준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영효(가명)가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들이 위대한 축구선수라는 걸 인정한다 해도, 수백억 원이나 되는 그들의 연봉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런 '호들갑'이 그들의 연봉에 '0'을 하나씩 더 붙이는 꼴이라며 마뜩잖다는 표정이었다. 호날두와 메시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가로 시작된 말다툼이 연봉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로 불이 옮겨붙었다. 그들이 받는 천문학적인 연봉이 과연 정당하냐는 의문이었다.

"우리 사촌 형은 2부 리그에서 몇 년째 뛰고 있는데, TV에서 거의 볼 수도 없고 연봉도 채 3천만 원이 안 되는 'B급' 축구선수야. 웬만한 부상 정도는 내색조차 않을 만큼 정말 열심히 뛰는데,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라지만 이따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형은 호날두와 메시를 보며 그들을 부러워할지언정 '꿈'을 키우기보다 우선 좌절감이 든다고 해."

영효는 이어 "테니스나 수영, 육상 등 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라면 모를까, 축구처럼 11명이 함께 뛰는 단체 경기에서 극단적인 연봉 차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곧, 아무리 탁월한 실력을 지녔다 한들 혼자 다 해낼 수는 없는 종목이라는 이유다. 더욱이 그 재미와 감동을 오로지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하는 건 스포츠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고도 했다.

선수 몸값 논쟁, '그들의 고액 연봉은 과연 정당한가'

스페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
 스페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영효야, 네 형의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한 거라잖아. 어쨌든 실력에 대한 보상이 존재하는 한 연봉의 양극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네 말대로라면, 경기의 수준이 저하될 게 틀림없어. 솔직히 말해서, 영국과 독일, 스페인 리그 등이 우리나라의 K리그보다 수준이 높은 건 돈으로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되잖아."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해. 아무리 프로라지만, 경기장에서의 동기 부여가 꼭 돈으로만 될까. 수백억 원을 받는 호날두와 메시가 연봉 좀 적어진다고 안 뛸까. 그들이 연봉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했다는 뉴스 속 미담 사례에 감동할 게 아니라, 연봉의 차이를 줄이고 나누는 게 외려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얼마 전, 한 프로야구 선수가 수십억 원을 받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는 소식과 동시에 60여 명의 선수가 각 구단으로부터 방출됐다는 뉴스, 너희도 들었지? 그런데, 60여 명의 연봉을 다 합해봐야 그 선수가 받는 돈의 절반도 안 된다는 이야기에 정말 씁쓸하더라. 오로지 돈이 실력과 명성을 이끌어낸다면, 그건 외려 실력과 명성에 누가 되는 것 아닐까?"

영효의 '호소'에도 정원이와 주현이를 비롯한 그 많은 '신자'들을 설득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고 여기는 대다수 아이의 '편견'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좋은 지적이긴 해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연봉에 제한을 둔다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거나, 심지어 '공산주의 발상'이라며 놀라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번엔 언쟁에 종지부를 찍을 심판이 나타나질 않았다. 다만, 이 언쟁을 통해 아이들은 호날두와 메시가 아닌 수많은 'B급' 축구선수들과, 한 메이저리거의 화려함 뒤로 방출된 60여 명의 고단한 삶을 한 번쯤 떠올려보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마치 무심한 시청자처럼 아이들의 '유치한' 토론을 듣고만 있었는데, 축구 잡지 한 권이 교과서보다 더 좋은 수업 교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태그:#축구, #연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