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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영감님 / 골목길에 퍼질러 앉아 / 오늘도 전선을 깐다 // 명예퇴직으로 까이고 / 경비직에서 까이고 / 이젠 / 할머니에게서도 까였는지 // 입 앙다물고 / 까이고 까인 삶에서 / 한 푼이라도 벌어 볼 양 // 시커먼 속 같은 / 시커먼 전선만 / 까고 / 또 / 깐다"(시 <깐다> 전문).

'껍질을 벗기'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세게 차일' 때 쓰는 '까(이)다'는 말을 가져와 쓴 시다. 요즘 힘들게 사는 사람들, 특히 어르신들의 힘든 일상이 느껴진다.

이 시는 이상호 시인이 최근 펴낸 새 시집 <깐다>(갈무리 간)에 실려 있다. 이 시인은 1999년 '들불문학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경남작가회의와 객토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며, 2007년 첫 시집 <개미집>을 냈다.

이상호 시인의 새 시집 <깐다> 표지.
 이상호 시인의 새 시집 <깐다> 표지.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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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집에는 노동자 등 민중의 삶이 담긴 시들이 많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도 있지만, 시마다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우리 이웃의 잔잔한 삶이 녹아 있는 시들이다.

시집에는 '노동시'가 많다. 1970~1980년대 '민중시'가 우리 문단을 이끌다가 1990년대 이후 그 힘을 점점 잃었다. 요즘은 '노동시' '민중시'를 쓰는 시인이 드물다. 노동 현장에 있다가 산재를 당했던 이상호 시인이 자신과 이웃의 삶을 담은 '노동시'를 생산해 냈다.

"이른 아침 /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 / 한 짐 실은 손수레를 미는 / 발걸음이 가볍다 // 한산한 도로를 거꾸로 가며 / 노년의 삶을 거꾸로 밀고 가며 / 손자 손녀의 깔깔거리는 웃음 대신 / 불안한 아침을 알리듯 / 강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할 때 //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 한 대"(시 <역주행> 전문).

"언제쯤 어디에 재활용품이 나오는지 / 손금보다 더 잘 아는 골목 // 마흔 넘은 정신지체 2급 아들과 / 칠순이 넘은 어머니 / 삐걱거리는 손수레 끌고 / 골목골목을 다니는 소리 들린다 // 손수레가 무겁다고 투덜대는 아들 / 달래는 소리 들린다 // 분리수거 하는 날이면 / 왜 같은 시간에 / 같은 곳에 재활용품이 쌓이는지 / 왜 동네 사람들 꼼꼼히 분리해 놓는지 / 안다"(시 <골목이야기> 전문).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어르신들의 삶이 담겨 있는 시다. 여느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을 시인은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요즘 어르신들의 삶이 힘들다고 하지만, 시인의 이런 시선 때문인지 '위안'으로 느껴진다. 다음 시 한 편도 마찬가지다.

"햇살이 환한 아침 / 골목 입구가 왁자지껄하다 // 손수레를 끌며 모자를 눌러 쓴 할머니 / 공공근로 조끼를 입은 세 분의 할머니 / 서로를 향해 언성이 높다 // 공공근로하며 쓰레기나 줍지 / 종이상자는 왜 챙기느냐는 말에 / 신경질 내며 던져지는 종이상자 // 밥줄이 걸렸다"(시 <종이상자 하나> 전문).

"방울토마토 모종 몇 / 생의 줄기 뻗어 / 몸 곧추 세우더니 / 비오는 날 / 혼자서는 설 수 없다고 / 시위하듯 / 쓰러지는 거야 // 그래 그래 / 지지대 하나 꽂아 주니 / 어깨 기댈 곳 있다고 / 의지까지 할 곳 있다고 / 보란 듯 / 꽃 피우는 거야 //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 이런 게 하는 것이라고"(시 <이런 것> 전문).

우리네 삶이 방울토마토 모종과 같다. 지지대를 세워주고 가꾸니 주렁주렁 토마토가 열리듯, 우리네 삶도 혼자보다 서로 의지하고 살면 넉넉해진다는 것을 깨달게 된다. 모종이 '시위하듯 쓰러지다'고 하니 긴장감이 더 커진다.

"밤 새 비가 왔다는데 / 그 비에 빨래가 젖어 푹 젖어 / 허리를 다친 사람처럼 건조대가 휘어졌는데 // 그 밤 사이 / 누구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데 / 누구는 정리해고 되었다는데 / 누구는 공장이 부도났다는데 / 휘어진 건조대처럼 /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데 // 그래도 여전히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시 <멈출 수 없는> 전문).

비에 젖은 빨래 건조대를 '허리 다친 사람'에 비유했다. 그 사람은 바로 시인 자신이고, 우리 이웃이다. 빨개 건조대를 보면서 정리해고와 부도로 공장에서 쫓겨나는 노동자의 삶을 떠올렸다. 시인의 상상력이 풍부하다. 시인은 건조대가 휘어지더라도 빨래는 늘어야 한다며, 그래도 희망을 품는다.

이상호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히고, 시 한 편마다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시인은 힘든 세상이지만 함께 나누며 살자고 호소한다.

이월춘 시인은 해설에서 "이상호 시는 언어의 조탁 면에서 약간의 희미함이 드러나지만, 시적 의미가 주는 삶에 대한 성숙미가 큰 울림으로 다가와 신뢰감을 준다"라면서 "시인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시선이 독자들의 공간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시는 일단 생명력을 가진다"라고 평했다.

하아무 경남작가회의 회장은 "시의 시대가 가고 노동시도 몰락했다고 한다, 이상호 시인도 산재를 당해 노동현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노동시를 쓰고 있다"라면서 "우리는 진정성의 힘으로 사유를 밀어 올리는 시인의 노고를 믿는다, 그의 시에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내는 삶의 신비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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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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