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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진상이 담긴 일본 외교문서 공개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진상이 담긴 일본 외교문서 공개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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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983년 9월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진상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일본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일본 언론은 여객기 격추 사건 발생 후 2달 정도가 지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미국 정부의 고위 관료가 일본 정부 당국자를 만나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소련 영공에서 공해 상으로 막 나가려는 데 격추했다"라고 말한 기록이 공개됐다고 24일 일제히 보도했다.

미국이 당시 소련이 민간 여객기라는 것을 알고도 격추했다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사건의 진상을 모두 알고 있으며, 이 같은 정보를 일본과 일찌감치 공유한 것이라고 일본 언론은 평가했다.

이 기록은 일본 외무성이 이날 공개한 외교 문서에서 확인됐다. 문서에 따르면 1983년 11월 14일 작성된 '극비' 메모는 "소련이 캄차카 반도에 들어온 미국 정찰기의 항적(배나 항공기가 지나간 자취)에 약 15분 후에 들어온 대한항공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했다"라는 미국 정부 고위 관료의 발언을 담고 있다.

미국 고위 관료는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오인한 이유로 "소련 측 레이더가 고장 나 3대 중 1대밖에 작동하지 않았고, 대한항공기가 소련 영공인 사할린에서 공해 상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격추돼 11분간 급강하 후 추락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소련 정부는 미국 정찰기를 막기 위해 "영공을 침범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사건 발생 후 소련은 격추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미국은 소련의 고의성을 규탄하며 냉전이 더욱 악화됐다.

이 극비 메모는 당시 일본 외무성 인사과장이었고, 후에 최고재판소(대법원) 판사를 지낸 후쿠다 히로시(80)가 작성했다.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기록이 확실하다"라며 "미국 정부의 상당한 고위 관료에게서 들은 내용이지만 상대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또한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는 아니었다"라며 "소련이 민간 여객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격추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NHK 방송은 "냉전 시대에서 발생한 중대 사고의 기밀 정보를 미국이 비교적 빠른 시점에 일본과 공유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아사히신문>은 "냉전 대립 속에서 미국이 대외 정보 조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당시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보잉 747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할린 해상에 추락하면서 승객 240명과 승무원 29명 등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1993년 "대한항공기가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하고 확인 작업을 철저히 하지 않은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공표한 바 있다.


태그:#대한항공 격추 사건, #소련,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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