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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5일 열린, 제2차민중총궐기대회가 평화집회로 마무리 되면서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면 자연스레 평화집회가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제2차 민중총궐기 지난 12월 5일 열린, 제2차민중총궐기대회가 평화집회로 마무리 되면서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면 자연스레 평화집회가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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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소요죄' 혐의를 추가해 기소하기로 했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다. 지난 5일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볼 수 있었듯이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자 집회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지난 19일 제3차 민중총궐기대회에서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소요죄 혐의'에 대해 비판하는 '소요문화제'가 시끌벅적하게 열렸다. 그 행사 역시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경찰은 문화제가 집회로 변질됐다며 이런저런 구실을 들이대면서 주동자들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잊고 있었던 '소요죄'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마침 '1986년 5.3 인천사태'에 함께 갔던 친구도 있었기에 마치 '응답하라 1980년대' 대본을 쓰듯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언제나 폭력시위의 원인은 국민에 있지 않았고, 과도한 공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있었다. 그것을 국가권력이 망각한다면, 독재국가가 되는 것이다.
▲ 경찰차벽 언제나 폭력시위의 원인은 국민에 있지 않았고, 과도한 공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있었다. 그것을 국가권력이 망각한다면, 독재국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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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5월 3일, 그날 무지하게 더웠어. 당시 신한민주당(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난 후, 운동권을 과격 좌익학생운동 운운하면서 결별을 선언한 후 인천에서 신민당 전당대회를 열었지. 그거 항의하러 간 거지만, 사실 언더서클에서 거기에 가면 운동권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더 끌려서 간 것 같아."

친구A : "맞아, 그때 우리 장기표 민주통일국민회의 사무처장 실물도 봤잖아. 경찰이 쫙 깔려서 못들어갈 줄 알았는데 뭐 다 들어갔지."

: "날은 덥고, 배는 고프고, 물도 없어서 길가에 앉아있는데 시위대가 경찰에 쫓겨 달려오면서 구호를 외쳤어. '미제 축출, 파쇼 타도!'"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친구A는 후배다. 나는 당시 3학년이었고, 친구A는 86학번 새내기였다. 언더서클은 달랐지만, 학과 선배로서 운동권에 입문(?)한 신출내기 후배를 시위현장에서 보호해줘야 할 책임도 있었다.

검문 검색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는데, 하필이면 가방에는 '이반 일리치의 <학교는 죽었다>라는 책과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들어 있었다. 앞의 책은 불온서적으로 분류는 되지 않았지만, <페다고지>는 의식화 교육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재수 없으면 걸릴 수도 있었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주홍글씨>라는 제목이 빨간책이라고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검문검색을 하던 전경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가 죽은 거 맞아.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공부도 안하고 시위나 하지. 그리고 백마고지도 아니고 페다고지는 뭐야? 너희들 데모하러 가는 거 아니지?"

그때 내가 말했다.

"야 임마, 우리 예비역이야. 군대 갔다 왔다고."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아무튼 날은 덥고, 배는 고프고, 목도 말라서 지쳐 길가에서 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시위대가 몰려왔다. 우리는 덩달아 시위대에 합류했다. 아, 그런데 그 시위대는 전경들에게 쫓기면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였다. 후배와 나는 무조건 앞을 향해 엄청나게 뛰었다.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시위대 본대와 합류했을 때 먼발치에서 시위차량에서 구호를 외치는 '장기표'를 보았다.

"야, 우리가 평생 실물을 볼 수 없는 인물일지도 몰라. 봐둬라. 얼마나 멋지냐? 민주주의를 위해서 감옥에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렇게 투쟁하는 모습이."
"형, 정말 멋지네요."

그렇게 서너 시간 그곳에 있으니 허기가 져서 더는 있을 수 없었다. 후배와 함께 시위장소에서 빠져나왔고 그날 저녁 뉴스에서 '5.3사태'라는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걸 봤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뒤범벅된 화면이 겹치면서 '폭력시위'가 유독 강조됐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서 이에 대한 평가들을 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이번 5.3 인천사태를 폭력시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운동권에 대한 탄압을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친구B : "그런데 말이야, 1986년에 5.3 인천사태가 있었고 이듬해인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단 말이야. 우리나라 역사상 소요죄가 적용된 사례는 몇 안 되는데 그 마지막이 1986년이니까 30년 전이네. 그러니까, '소요죄'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30년 뒤로 후퇴했다는 증거기도 하고, 머지 않아 대국민항쟁이 일어난다는 증거기도 한 거 아니겠어?"

친구A : "형, 검색해 보니까 네 번 있었네. 한일회담 반대시위때(1964), 부마민중항쟁 때(1979), 광주민주화운동 때(1980), 5.3인천사태(1986)인데…. 대부분 소요죄가 적용된 이후에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네."

: "그러면, 내년에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거 아냐? 아무튼 요즘 박근혜 정부는 그간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의 인식이 문제가 있으면 가신들이라도 바로 잡아줘야 하는데 오히려 더 설치고 있으니…."

"국민의 소리를 들어라", 소통하지 않는 정부는 국민의 소리를 '소요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이다.
▲ 제2차 국민총궐기 "국민의 소리를 들어라", 소통하지 않는 정부는 국민의 소리를 '소요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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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지금의 문제는 비단 대통령 한 사람의 역사인식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말하면, 그 말을 받아서 척척 처리해 주는 이들과 어떤 토도 달지 않고 더 앞서서 기는 이들이 있기에 이 나라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문제도 그렇고, 이번 민주노총에 한상균 위원장에게 소요죄를 적용시키는 것도 그렇고, 그 모든 사단의 발단은 대통령의 입이다.

모두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면서, 그 비위를 맞추겠다는 형국이니 도대체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인 것이다. 임기 3년이 지났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면서 내걸었던 수많은 정책들 가운데 공수표만 남발한 것들이 얼마인가? 말이 좋아 공수표지, 할 능력도 의사도 없으면서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남발했다면 거의 사기행각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으며, 모든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려고 한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 혹은 정책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마치 IS 대하듯 하는 대통령, 심기불편한 눈으로 국민을 바라보는 듯한 대통령, 마치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했던 프랑스의 전제군주 루이 14세를 보는 듯하다.

우리는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에서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조차도 '소요죄'로 몰아부치는 세상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런 강요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 50대 중반의 수다꾼들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퇴행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정말, 헬조선이다. 그래도 힘내자. 소요죄까지 등장한 것을 보니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

이 말로 위로를 받으며 '소요죄'에 대한 대화는 막을 내렸다. 이런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 시대인가?


태그:#소요죄, #민주주의, #한상균, #5.3인천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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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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