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오브 더 씨 포스터

▲ 하트 오브 더 씨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메사추세츠주 코드 곶에서 남쪽으로 50km를 내려가면 고래모양의 섬 하나가 나온다. 지금은 과거의 추억을 팔아먹고 사는 퇴락한 촌락이지만 한 때는 포경업의 본고장이었던 낸터킷이 바로 여기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해에도 수천 마리의 고래를 사냥해댄 낸터킷 사내들을 그저 어부라고 표현하는 건 부적절할 듯 싶다. 그저 생계를 위해 가까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달리 낸터킷 사내들은 세상의 모든 바다를 돌며 고래를 잡아 그 기름을 짜냈으니까. 그렇게 얻은 기름은 대륙으로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낸터킷은 갈수록 번성해갔다.

가난했던 어촌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섬으로 떠올랐던 그 두 세기의 시간은 고래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미국 국적의 포경선 수백 척이 고래를, 정확히는 그 고래가 내어줄 기름을 쫓아 대서양과 태평양 각지로 진격한 것이다. 18세기부터 본격화한 포경산업은 300년 만에 급기야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수천년 간 번성해온 고래의 씨를 말릴 지경이었다.

19세기 중엽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서양 포경선의 동해 출현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서양 포경선이 고래를 쫓다가 한반도까지 와야 했을 만큼 고래의 개체수가 급감했다는 증거다. 올 3월 발표된 '해양 어장 리뷰(Marine Fisheries Review)'에 따르면 1900년부터 1999년까지 상업적 포경으로 죽은 고래는 무려 2백 9십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단일 종으로 가장 많은 사냥을 당한 향고래는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300년 동안 약 100만 마리 이상 작살을 맞았다. 최근까지도 포획된 고래의 정확한 수치를 집계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고래의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300년 동안 사냥당한 향고래의 절반, 약 50만 마리다.

원작보다 소설 <백경>에 기대다

하트 오브 더 씨 표류하는 선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고래

▲ 하트 오브 더 씨 표류하는 선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고래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낸터킷은 18, 19세기 미국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다. 한 해에 출항하는 포경선만 해도 백 척에 가까웠다니 미국을 넘어 전 세계 포경업의 본고장이라 할 만한 섬이었다. 그런 낸터킷도 고래기름의 성능과 비용을 압도하는 석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자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들뜬 분위기는 이내 사라졌고 낸터킷은 풍요와 번영 이전의 조용한 섬으로 돌아갔다.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는 낸터킷이 몰락의 전조를 보이던 19세기 초엽의 실화를 다뤘다. 1819년 여름 낸터킷에서 출항한 에식스호가 이듬해 겨울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하고 살아남은 21명의 선원들이 최장 94일 동안 7200여km를 표류한 끝에 그중 일부가 구조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의 원작은 2000년 출간돼 논픽션 부문 상을 휩쓴 내서니얼 필브릭의 <바다 한 가운데서>다.

연출을 맡은 론 하워드는 처절한 논픽션 조난기였던 원작을 할리우드식 해양재난액션 블록버스터로 버무리기 위해 고심한 듯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논픽션 <바다 한 가운데서>에 허먼 멜빌의 <백경>을 첨가하는 것이었다. 득실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대자연과 마주선 인간의 욕망이라는 <백경>의 주제의식이 삽입된 대신 원작의 디테일과 표류과정에서의 딜레마적 상황이 상당부분 깎여나갔다.

영화는 원작보다 오히려 <백경>에 더욱 가까운 주제의식을 내보인다. 복수심에 불타 흰 고래 모비딕을 끈질기게 추적했던 에이헵 선장의 캐릭터가 오언 체이스와 조지 폴라드 등 주요 캐릭터에 투영됐음은 물론, 첫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에서 심연 속으로 줄을 끌고 사라지는 고래의 모습은 모비딕에 대한 오마주로 보아도 될 정도다. 고래로 상징되는 대자연을 상대로 인간이 벌이는 사투,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이 그 스스로의 욕망에 사로잡혀 파멸하는 모습 등은 <백경>을 고스란히 옮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백경>의 작가 허먼 멜빌을 극중 인물로 등장시킨 부분이 눈에 띈다. 허먼 멜빌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액자 기법'을 수행하는 핵심인물이다. 이 인물은 감춰진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그가 에식스호의 생존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니커슨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다. 영화는 니커슨이 에식스호의 출항부터 침몰, 표류까지의 사연을 멜빌에게 들려주게끔 하고 관객 모두가 곁에서 그와 함께 이야기를 듣는 구도를 만들어 낸다. 영화의 끝에서 허먼 멜빌이 '나는 이쉬마엘이다(Call me Ishmael)'로 시작되는 <백경>의 유명한 첫 문장을 쓰게되는 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다.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

하트 오브 더 씨 복수심에 불타 총에 화약을 장전하는 오언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 분)

▲ 하트 오브 더 씨 복수심에 불타 총에 화약을 장전하는 오언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 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을 유지하기 위해 <바다 한 가운데서>의 후반부를 상당부분 덜어낸 건 주요한 선택이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처절한 논픽션 조난기보다 고래와의 사투라는 해양재난액션극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죽어가는 동료를 외면하고 심지어는 동료의 살점을 뜯어먹어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은 <백경>의 주제의식이 버무려지며 상당부분 옅어졌다. 영화는 그 처절함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몇몇 사건만을 의무적으로 훑어 보여줄 뿐이다.

대신 강조되는 건 자연과 인간의 대립, 그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양면성이다. 각자의 꿈을 품고 바다로 나간 이들이 바다 위에서는 무법자며 학살자일 뿐임을 알게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선원들이 고래를 둘러싸고 그 등에 작살을 꽂아대는 광경을 부감샷(상공에서 아래를 내리찍는 촬영기법)으로 찍어내던 그 순간, 화면은 거대한 고래와 맞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인간이 고래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풍경으로 객관화된다. 고래가 공중으로 피를 뿜고 환호하는 선원들의 얼굴로 붉은 피가 쏟아지는 장면 등은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런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비춘다.

이 장면부터 영화의 관심은 거친 바다, 거대한 동물에 맞선 인간의 강인함에서 탐욕에 눈이 멀어 고래 등에 작살을 꽂아대는 잔혹함,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서 표류하며 서로의 살을 뜯는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맨 얼굴을 마주하다

하트 오브 더 씨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 오언 체이스를 연기한 현직 히어로 크리스 헴스워스

▲ 하트 오브 더 씨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 오언 체이스를 연기한 현직 히어로 크리스 헴스워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포경선이 고래의 공격에 침몰한다는 설정은 비극을 구성하는 객관적인 외형이다. 포경선 선원들이 배를 침몰시킨 고래의 집요한 추격으로 정신적인 외상을 입고 두려움에 떤다는 설정이 이 비극을 더욱 처절하게 꾸민다. 선장 조지 폴라드와 일등 항해사 오언 체이스만이 고래에 대한 복수를 꿈꾸지만 결정적 순간, 오언은 고래에게 작살을 던지지 않는다.

감독은 오언 체이스의 변화를 통해 자연과 마주해 적개심과 정복욕을 내보이던 인간이 공존과 화해를 도모하게 되기까지의 성장을 그리려 한 듯하다. 여기에 원작 캐릭터를 바꿔가면서까지 시종일관 오언과 갈등하게 만든 선장 조지의 변화가 이어지며 주제는 더욱 명확해진다. <백경>이 그린 불타는 정복욕과 허망한 패배가 <하트 오브 더 씨>에서는 성장과 화해의 드라마로 변화한 것이다. 론 하워드가 스티븐 스필버그로 대변되는 인간중심적 할리우드 세계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공존의 드라마를 써낸 것은 새롭지는 않더라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지난 2002년 <뷰티풀 마인드>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 론 하워드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안정된 블록버스터와 명확한 주제의식을 구현해냈다. 태평양까지 나아간 포경선이 마침내 침몰하고 그 망망대해에서 자신이 그토록 쫓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그 순간, 오언 체이스가 얼굴 위로 드러낸 표정이야말로 <하트 오브 더 씨>가 말하고자 한 주제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 꼭 망망대해에서의 표류와 거대한 고래의 습격이 필요한 건 아닐 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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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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