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강원제주

포토뉴스

경포습지의 일출 경포가시연습지에 아침해가 떠오르면 습지의 생명들도 기지개를 편다. ⓒ 김현경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곳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사막을 관통하는 큰 강줄기의 하구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하구에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이 흐르는 이집트 문명, 황허강을 끼고 있는 황허 문명, 인더스강을 두고 있는 인더스 문명들은 생존을 위해 물이 있는 땅을 일군 자들이 만들어낸 기술과 문화의 집약체였다.

대륙을 따라 흐르는 강줄기는 물과 함께 흙 속의 영양분을 운반해 하구에 쏟아냈다. 비옥한 땅으로 거듭난 일대에는 식물이 자라고 동물들이 찾아들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풍요를 바탕으로 관개 농업을 시작하고, 도시 문화를 싹틔웠다. 이는 사람들이 '습지' 생태계를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이 흐르는 바닷가 마을의 생태 문화
경포호와 경포대 경포석호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좌측위로 경포대가 보인다. ⓒ 김현경
여명이 뒤덮고 있는 경포호숫가에 발을 내딛고 나서야 간신히 지난밤 잠자리의 온기를 떨쳐냈다. 부윰하고 축축한 호숫가의 새벽, 차량과 인적 드믄 이 시간에 날짐승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수백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은 새소리를 따라 갈대밭 쪽으로 이동하니 경포가시연습지가 나타났다. 경포습지 여행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내륙과 해안에 다양한 습지를 갖춘 비옥한 땅이 많다. 특히 해안가를 살펴보면 서해와 남해안의 경우 갯벌이 발달하고, 동해안은 해수면의 변화와 사구의 발달로 석호가 생겼는데 이는 오랜 세월 지역민들의 삶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갯벌이 있는 곳에서 조개와 같은 해산물을 채취하고, 석호가 있는 곳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읊었다.

이 중 동해안의 석호는 우리나라에 남은 거의 유일한 자연 호수다. 고성의 화진포부터 속초의 영량호, 강릉의 경포호 등이 대표적인 석호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져 바닷가 마을의 독특한 생태환경을 대변하던 이들 석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성장개발론에 가로막혀 물길을 잃고 썩어 들어갔다. 1960년대 자급자족과 식량증산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석호와 그 일대의 습지는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져 버려졌다. 

강릉, 습지의 재발견
경포가시연습지 하늘에서 바라본 경포가시연습지. 경포호의 배후습지로 되살아났다. ⓒ 강릉시
강릉의 경포도 개발론에서 비껴갈 수는 없었다. 습지 일대의 비옥한 땅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량을 내주었고, 이는 습지를 갈아엎는 본격적인 농지개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경포호는 빠르게 매몰되어 1920년대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경포천과 안현천의 물길을 막아 놓았다. 뒤이어 경호교에 보를 설치해 물을 가두었다. 호수의 매몰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이는 곧바로 경포호의 수질 악화로 이어졌다.

주변의 습지를 잃고 바닷물과 민물이 드나들던 고유의 생태계 순환 고리가 끊어지자 물은 썩어가기 시작했다. 악취와 오물로 뒤덮인 경포호에서 물고기들의 떼죽음을 보는 건 흔한 일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썩은 호수 바닥을 긁어내고, 오물을 건져내는 작업을 수년간 반복했지만 호수는 살아나지 않았다. 

결국 경포호 일대에 대한 개발론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꺾이고 만다. 시민과 지역 전문가, 지방 정부 등이 참여해 '경포습지복원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경포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복원을 택한 것이다.  

먼저 호수와 바다를 가로막았던 경호교 보를 뜯어냈다. 호수로 바닷물이 다시 넘나들자 수질 환경이 되살아났다. 민물 유입이 거의 없는 석호지만 바닷물만으로도 경포호에 다시 물고기가 펄떡였고, 악취가 사라졌다. 연이어 강릉은 경포호 주변의 배후 습지를 살리는 데 힘을 쏟는다.

경포호와 맞붙어 있던 양어장을 비롯해 주변의 개간된 농경지를 매입해 경포수질정화습지(2007년), 경포습지생태원(2009년), 경포가시연습지(2012년)를 복원하여 경포 일대의 습지 환경을 자연에 가깝게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간의 욕심과 근시안적인 복구정책에 휘둘려왔던 생명의 땅, 경포습지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경포의 희망으로 솟아오른 가시연꽃
멸종위기종 경포가시연 습지를 복원하자 멸종위기종 2급인 가시연이 원시그대로의 모습으로 경포에 홀연히 나타났다. ⓒ 강릉시
민관이 협력해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쉽게 속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섣불리 인위적으로 건드렸다가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습지 복원은 원형에 가깝게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문헌이나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멸종위기종 가시연이 습지 복원 중에 자연적으로 발아해 꽃을 피워냈다. 농지개간으로 쓸모없이 갈아엎어졌다가 농토 깊이 종자은행을 두고 있던 가시연이 최적의 습지 환경이 마련되자 반세기 만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가시연은 이런 환호를 져버리지 않고 해마다 군락지를 넓혀가며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생명의 땅, 습지에 돌아온 것은 가시연뿐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수습생식물이 자생해 물고기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를 먹잇감으로 삼는 새와 포유동물을 불러들였다.

이들 식물과 동물 중에는 가시연을 비롯해 삵, 수달, 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들도 다수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생물다양성종을 확보하는 습지의 역할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물길 따라 살금살금 습지 여행 
경포 덤불해오라기 경포가시연습지를 찾은 덤불해오라기. ⓒ 강릉시
경포습지가 복원되어 변화된 것은 일대의 생태계 환경뿐이 아니었다. 경포호가 다시 맑아지고, 다양한 동식물이 더불어 살게 되자 습지의 아름다움을 찾아 사람들도 절로 모여들었다. 강릉시는 습지를 복원하면서 조류나 다른 동물들에게 근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습지를 둘러볼 수 있도록 탐방로를 설치했다.

탐방로는 물길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는데 습지 중심으로부터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거리를 두고 습지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새와 동물을 관찰할 수 있다. 새나 동물들도 사람들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보금자리를 지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을 때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결과다.

습지가 복원되어 생태계가 회복되고, 사람들도 다시 찾는 곳으로 거듭나자 경포만의 습지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포습지의 아침은 일출 전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습지에 살고 있는 수만 마리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새벽 운동을 하고, 먹잇감을 낚아채서 힘차게 날아가는 왜가리를 곁에 두고 한낮에 책을 읽는다.

젊은 부부들은 유모차를 밀고 습지 탐방로를 산책하고, 아이들은 노을이 대관령을 물들일 때까지 잔디밭과 탐방로를 오가며 뛰놀고 있다. 습지 자체가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면서 관광객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습지의 생태계와 문화를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마련한 경포습지방문자센터는 2015년 5월 개소한 지 5개월 만에 2만2천명의 탐방객이 거쳐간 것으로 집계됐다.   
경포가시연습지의 한낮 아이들에게 경포습지는 자연이 만들어준 최고의 놀이터다. ⓒ 박소희
강릉에서의 습지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농경지 개간 등으로 사라졌던 순포습지의 복원이 한창인데 2016년 말에는 본래 모습 그대로 석호의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순포라는 지명은 멸종위기종인 순채가 많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습지 파괴와 함께 그 자취를 감추었었다. 그런데 경포와 마찬가지로 복원 진행 중에 휴면 중인 종자가 깊은 땅 속에서 발견됐다. 순포습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경포를 비추는 다섯 개의 달
경포의 철새들 경포습지는 왜가리, 흰뺨검둥오리 등 탐조에 최적인 곳이다. ⓒ 김현경
늦가을의 새벽을 가르며 시작된 경포습지 여행은 며칠에 걸쳐 다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경포호(鏡浦湖)는 예로부터 그 물이 거울같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등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경포호 둘레가 8km 정도로 현재보다 두 배 이상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호수 주변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배후습지들이 숨어있어 경포를 더욱 풍요로운 생태 낙원으로 가꾸어 주었다.

거울같이 투명하고 맑은 호수는 하늘을 한가득 담아 우주의 기운을 품었다. 주변의 습지들은 수많은 생물들이 먹이를 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선조들은 육지의 동쪽 끝에서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나직이 했다. 경포에는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했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 뜬 달은 경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습지는 살아있는 생태계다. 다시 살아난 경포습지는 이제 다시 하늘을 담고 생명을 품고자 한다. 겸손한 여행자의 발걸음으로 이제 다시 달맞이를 할 때다. 물을 머금은 생명의 땅, 경포습지는 그 생명의 기운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다시금 되살아난 경포습지 경포습지가 식물들의 자생 환경과 동물들의 서식 조건이 갖춰진 생태계로 되돌아왔다. ⓒ 김현경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강릉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기획하고 파랑달협동조합이 제작한 여행 책자 <다섯가지 테마로 즐기는 강릉여행, 2015>에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태그:#강릉, #경포, #석호, #철새, #습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