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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통역을 좀 해줘야겠다."

외국인과 문화 교류 수업에서 봉사 활동 경험 정도 밖에 없는 나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통역을 맡게 될 토론회의 주제는 무려 "버마 총선과 아시아 각국 민주주의의 과제". 이름만 들어도 엄중하게 느껴지는 임무였다.

성공회대학교에서 토론회가 열린 12월 11일 금요일은 버마(미얀마)민주화 활동가이자 이번 버마 총선에서 승리한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지부장이었던 내툰나잉씨가 고인이 된 9월 4일부터 딱 99일째 되는 날이다.

토론회는 특히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가 졸업한 성공회대학원 아시아비정비구기학과(MAINS, 메인즈)와 국제민주연대가 공동으로 주관해 개최되었다. 메인즈는 아시아 각국 활동가들이 한국의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1년 6개월 동안 각국의 시민사회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며, 공동의 가치로 추구해야 할 과제를 집중적으로 모색하는 석사과정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메인즈 학생들
▲ 아시아비정부기구학과(MAINS)의 마리 로즈(좌), 아자르 일판샤(우)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메인즈 학생들
ⓒ 메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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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자유 선거를 위한 피와 땀

기실 내가 국제민주연대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메인즈는 물론이요 버마 혹은 대부분 사람들에겐 미얀마로 더욱 익숙히 알려진 이 국가의 상황 역시도 전혀 관심 밖의 것이었을테다. 작년, 아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아웅산 수지 여사에 대한 얄팍한 지식 뿐이었으니.

하지만 자원활동을 시작한 이후 버마의 자유 선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 없이 피와 땀을 쏟는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곳은 내게 단순한 여행 위험 지역 혹은 분쟁 지역 이상으로 다가왔다. 특히 내툰나잉씨의 작고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애도를 표하는 모습을 보니, 비록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그가 버마를 위해 쏟은 노력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는 데는 충분했다.

이번 토론회에는 메인즈 학생들과 박은홍 주임 교수, 버마 총선 국제시민사회 감시단에 참여했던 국제민주연대의 최미경 활동가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의 이영아 활동가, NLD 한국지부 텟 나잉 (Thet Naing) 총무 등이 참여, 지난 11월 역사적인 버마 총선의 의미와 각국 민주주의 과제를 고민한 결과를 나누었다.

성공회대학교의 박은홍 교수는 인사말을 통해 내툰나잉씨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회상하고, 애도의 뜻을 전하며 토론회의 문을 열었다. 첫 발제를 맡은 인도네시아 출신의 아자르 일판샤(Azhar Irfansyah Ikhwanudin)가 화면에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툰나잉씨와 만남을 가졌을 당시 찍은 사진을 띄우자 삽시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어서 그는 NLD의 승리가 아시아 민주주의에 새롭게 활력을 불어 넣으리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는 한편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예로 들어 지난 해와 올해 상황을 비교했을 때, 민주화가 후퇴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음 역시 경고했다. 필리핀 출신의 마리 로즈(Mary Rose Sarturio)는 이번 선거가 필리핀에 끼칠 직접적인 영향은 적을 것으로 내다 보았으나, 민주주의 열망이 아시아 각국에 전반적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점에서 갖게 될 역사적 의미를 지적했다.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메인즈 학생들
▲ 당 띠 휘엔 짱(좌), 브렌자르갈 봄비시(우)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메인즈 학생들
ⓒ 메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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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상황에 맞는 민주화에 대한 고려 있어야

몽골의 브렌자르갈 봄비시(Burenjargal Bombish)는 버마 민주화 투쟁과 이번 선거 승리의 주역인 아웅산 수지가 앞으로 정치적 대변인일 뿐 아니라 롤 모델로서 버마와 아시아 사회에 갖게 될 영향력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발표한 베트남의 당 띠 휘엔 짱(Dang Thi Huyen Trang)은 여전히 공산당 독재 체제인 베트남의 상황을 들어 이번 총선이 베트남에게 진정한 민주적 승리를 위해서는 비폭력주의와 장기전을 벌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밝혔다.

필리핀 출신의 로즈비 모지카 성(Rosevi Samiento Mojica-Sung)은 민주화 이후 버마의 개방화에 초점을 맞추어, OECD 국가의 공적개발원조(ODA) 유입, 버마와 각국 시민 사회 협력, 노동자 및 유학생들의 국제적 교류 활성화 등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조망했다. 강대국의 압력 속에 버마가 추후 겪게 될 문제가 작지 않을 것이며 버마의 상황에 적합한 민주화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선행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토론회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의미가 깊었지만, 내가 보다 감명 받은 부분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활동가들이 마음 속 깊이 공유하고 있는 결속력이었다. 단순히 자국의 이익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의 울타리 내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총선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작고한 내툰나잉씨를 추모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은 툭하면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국제적 연대라는 피상적 이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다.

토론회에서 토론하는 텟나잉 총무
▲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총무 텟 나잉 토론회에서 토론하는 텟나잉 총무
ⓒ 메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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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2부 토론은 현재 NLD 한국지부 총무로 있는 텟 나잉(Thet Naing)의 발제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번 선거가 커다란 승리임은 이것이 결코 완전한 형태는 아님을 지적했다. 여전히 군 최고사령관은 국회 의석의 25%에 친군부 세력을 앉히거나 국방부 예산을 자유롭게 안배할 수 있는 등 강력한 권한을 누리고 있는 등 걸림돌이 많다. 그는 NLD가 앞으로 '법치주의의 완성', '내부 평화의 유지', '헌법 개정'의 큰 세 가지 방향에서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야 함을 역설했다.

참여연대 이영아 활동가는 총선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승리할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 버마 국민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꼽았다. 그러나 역시 아웅산 수지와 NLD에게 여전한 군부의 영향력,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부정부패 및 양극화와 같은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언급하면서 시민 사회의 끊임없는 감시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론회는 이어 메인즈 학생들의 추가적 지정 토론 및 질의 응답과 토의 순서로 활발히 진행되어 나갔다. 토론회 참관자들 역시 자유롭게 현 버마와 아시아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수가 이번 총선의 승리의 기쁨에는 공감했으나 현재 및 미래에 대한 현실적 우려도 제기되었다. 진정한 변화는 결국 시민이 이끌어나가는 것이며, 현재 버마 정치 개혁이 지나치게 아웅산 수지 혹은 그 정당의 행보에만 맞추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개방과 더불어 진행될 경제 변화 속에서 버마가 흔들림 없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안정적 재정 확보의 문제점 등이 언급되었다.    

비록 나는 소통을 위해 타인의 말을 형태만 바꾸어 전달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소통과 연대의 언어를 내 입을 거쳐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벅찬 경험이었다. 버마의 민주주의는 이제 막 싹을 틔웠다. 전세계적으로 기후 변화도 횡행한 요즈음 이제 막 봄을 맞이한 버마는 끊임없이 분투해야 할 것이며 많은 시련과 변화가 있을 것이다.

버마 뿐 아니라 역행의 수준이 실로 걱정스러운 수준에 달한 한국을 비롯,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실질적인 민주화란 풀리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나는 토론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연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다. 아시아 민주화를 위한 이 같은 단결과 협력이 있는 한, 완연한 봄은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제민주연대 이정윤 자원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



태그:#성공회대 메인즈, #버마총선, #내툰나잉, #국제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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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는 2000년 창립이래로 인권과 평화에 기반을 둔 국제연대 사업을 통해 해외한국기업감시 및 민주주의와 인권연대활동,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감시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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