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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지난 5년 동안 3만6천여 명이고 이 중에서 매년 평균 50여 명이 숨졌다고 한다. 최근엔 조선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생의 지난 3월에 여자친구를 감금 폭행한 사건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가해자는 피해자를 향해 지속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끔찍한 데이트 폭력 사건이 드러나면 '가해자가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을 거냐', '피해자도 잘못이 있는 거 아니냐'라는 측면으로만 여론의 관심이 몰린다. 정작 우리 사회에서 데이트 폭력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발생하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보고 성찰하려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는 폭력이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둔감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배정원(54) 행복한성문화센터 소장을 지난 11일 만났다.

여자는 나쁜남자를 좋아한다?

우리 사회가 일상적 폭력에 둔감한 사회라고 말하는 배 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되면서 자란 아이들은 폭력 민감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 배정원 소장은 국내 1세대 성교육전문가이다. 우리 사회가 일상적 폭력에 둔감한 사회라고 말하는 배 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되면서 자란 아이들은 폭력 민감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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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 폭력이 일반 폭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데이트 폭력은 일반폭력보다 더 복잡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내가 호감을 느끼며 만나는 상대로부터 당하는 폭력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데이트 폭력에는 강간은 물론 원하지 않은데 자꾸 만나자고 괴롭히는 스토킹과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 데이트 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회적으로 정립된 개념이 없다. 그게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맞다. 예를 들어 ​만나는 남성이 다소 거친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카리스마인지 폭력인지 혼동스러워하는 여성도 많다. 무엇보다 폭력에 대한 민감도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 데이트 폭력의 해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남들이 볼 때는 꽤 심각한 수준임에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우 예민한 사람은 남들이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이건 폭력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단정을 짓기 어렵다. 따라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들은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오늘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은데 상대가 요구해서 억지로 한다. '늘 해왔는데, 오늘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걸 폭력이라고 여기고 항의해야 하나?' 설사 그것을 폭력이라고 여겨도 여자는 상대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항의를 못할 수도 있다."

- 여전히 남성의 데이트 폭력에 대해 '여자가 의지가 있으면 방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잘못이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보다 폭력에 더욱 큰 두려움을 느끼지만, 유난히 공포심을 느끼는 여자들도 있다. 폭력적인 가정 환경으로 트라우마를 얻은 여자들이다. 아마 동물을 키워 본 사람들은 경험해봤을 거다. 동물에게 갑자기 극한 스트레스를 가하면 의식이 있어도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도 그런 상태에 빠진다.

의식적으로는 반항을 하고 막아야 하는데 무기력해지는 거다. 폭력에 대한 공포심을 겪어본 여자들은 또다시 같은 상황에 마주쳤을 때 이성적인 행동력이 급속도로 약해진다. 이 점을 남자들이 알아야 한다. 예전에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을 때 여자가 반항을 적극적으로 하면 힘 좋은 남자라도 옷을 못 벗긴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다고 해도 여자가 패닉 상태에 빠지면 순순히 벗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태에 닥치면 여자는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항복하는 것이다. 

한편 미디어가 여성들의 공포심을 강화시키는 점도 있다. 우리는 매일 잔혹한 살인 사건 등을 접하기 때문에 의외로 공황 장애에 걸려 있는 현대 여성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질문이지만, 데이트 폭력의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속설이 남자의 행동을 더욱 거칠 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상식처럼 회자된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건 자기가 나쁜 남자를 구해줄 수 있다는 판타지같은 것이다. 저 남자의 거칠음과 불행함을 나의 사랑으로 감화 시켜서 구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여자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여자들은 뭔가 삐딱한 남자를 좋아한다. 뭔가 우수에 차 있고, 뭔가 시니컬해서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는 듯한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여자의 이런 심리가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시니컬한 남자가 정말 인생에서 무언가를 고뇌해서 그런 것인지, 그냥 폭력적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회성과 현명함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 여자들은 구별해 내기 어렵다. 나쁜 남자가 아니라 못된 남자에게 항상 같은 일을 당하는 여자라면 그걸 구별해 내는 능력이 남에 비해 더욱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겪는 남자들은 다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자라면 바로 그런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톰과제리>도 폭력 만화라고 가르쳐야"

배정원 소장이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 행복한성문화센터 배정원 소장이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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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 폭력이 줄어들지 않는 데에는 물론 법적인 처벌이 약한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폭력에 둔감한 우리 사회의 풍토에도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데?
"물론이다. 우리 사회의 저변이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도 화장실에서 엄마가 어린 자녀를 무섭게 때리는 장면을 봤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가정에서부터 폭력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만화 <톰과 제리>도  폭력 만화라고 구분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자고(폭력 만화라고 규정) 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톰이 제리에게 당하는 폭력은 따지고 보면 '무서운 폭력'이다. 톰이 밀가루 통에 들어가서 납작해지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럴 때 그냥 깔깔 웃을 게 아니라 얼마나 아프겠느냐고 부모가 아이에게 한마디씩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생긴다. 바퀴벌레를 죽이더라도 아이들 보는 데서 잔인하게 죽이지 말아야 한다. 일상 속에서 폭력에 대한 민감도를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

드라마에서도 보면 남녀가 헤어질 때 귀싸대기를 때리거나 물을 끼얹거나 하는 장면이 많다. 그런 걸 보면서 사람들은 '화가 나면 때려도 돼'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폭력에 익숙해지는 '폭력의 사이클'에 들어가면, 폭력이 나를 사랑하는 징표라고 생각하는 여자도 생긴다. 남자가 자기를 툭툭 때리는 건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으면 때리겠느냐?'라고 생각하는 여자도 생기는 거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여성도 만나봤다."

- 데이트 폭력 피해자라면 보통 여자만 생각한다. 하지만 폭력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보면 남성 피해자도 만만치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오로지 여자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여자가 피해자인 경우가 더 많지만, 여자한테 당하는 남자도 적지 않다.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의 언어폭력도 심각하다. 상대 남성을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고, 분위기를 무섭게 만드는 것도 다 폭력이다. 남자가 여자한테 폭력을 당했다고 밝혀봤자 지지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남자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 뿐이다. "

- 물론 데이트 폭력에는 다양한 양상이 있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 폭력이 극단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에는 남자든 여자든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을 안 좋게 보는 문화가 있다. 그것을 일종의 배반자로 여기는 인식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헤어지는 것도 현명한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미디어에서는 연애를 시작하는 모습만 묘사하지, 사랑을 이어가고 가꾸며 아름답게 헤어지는 방법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여담일 수 있지만, 아름답게 헤어지는 방법 한 가지를 가르쳐 주겠다. 우선, 행복한 이별은 없다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이별을 이야기할 때 자칫 감정이 격해져서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선불식 식당에 가라. 주변에 사람이 있고, 북적이는 곳에서 헤어지자고 말을 해야 한다. 절대로 사람이 없는 곳, 으슥한 곳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실연을 당하면 사회 봉사 활동 등을 통해 극복할 것을 권한다. 복수심으로 누구를 만나지 않는 게 좋다. 교과서 같은 말일 수 있지만,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배정원 소장은?
18년 동안 성교육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7년 내일여성센터에서 교육팀장, 성폭력상담소 상담부장을 겸임했다. 경향신문 미디어칸성문화센터 소장, 대한성학회 사무총장과 부회장, 국방부와 육군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 편집ㅣ손지은 기자



태그:#성폭력, #데이트폭력, #의대생 데이트 폭력, #연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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