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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2일 남상범 선생의 성지순례 완주 및 국토 13바퀴 완주 축하 현수막 앞에서 기념 촬영.
▲ 성지순례 완주 기념촬영 2015년 9월 12일 남상범 선생의 성지순례 완주 및 국토 13바퀴 완주 축하 현수막 앞에서 기념 촬영.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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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국토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면 사람들이 '이제 연세 생각하셔서 그만 걸으세요' 하더군요. 그럴 때마다 씩 웃고 말았지요. 힘이 차고 넘치니 귓전으로 들었어요. 근데 이번에 마친 천주교 성지 111곳 순례를 끝으로 더는 걷지 못할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암에 걸렸어요, 허허."

남상범 선생은 걷기에 관해 전설적인 인물이다. 11년에 걸쳐 대한민국을 13바퀴, 3만2500km를 두 발로 걸어 여행했다. 그런 그가 몹쓸 병에 걸렸다. 지난 12월 초 병실에서 만난 선생은 암 투병 사실을 털어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선생은 지난 9월 13바퀴 째 도보여행으로 천주교성지 111곳 순례를 마쳤다. 6개월이 걸렸고 거리는 3157km에 이른다. 길고 고된 순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날 새벽, 토사를 게워내고 정신을 잃었다.

의사로부터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현재 선생은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10년간 우리국토 13바퀴를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필생의 역저이자 우리 국토를 웅변하는 서사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신의 숨결 좇은 3157km 순례길

선생은 2015년 3월 21일부터 9월 12일까지 국내 천주교 성지 111곳을 걸어 순례했다. 벚꽃 피는 춘삼월 집을 나서 오곡백과 무르익던 가을 무렵 돌아왔다. 총 3157km를 걸었다.

국내 천주교 성지 111곳은 한국 주교회의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가 전국 16개 교구로부터 추천을 받아 지난 2011년 지정했다. 이들 성지는 동서남북 우리땅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하나같이 초기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 내리면서 피 흘린 박해의 현장이다. 현재 국내 성지 순례 완주자들은 800명이 넘었다. 하지만 다들 차량을 이용하거나 주말 답사 형태를 띠고 있다. 그에 반해 오롯이 두 발로 연이어 걸어 순례한 완주자는 선생이 유일하다.

봇짐에 지팡이 하나 들고 산과 들을 넘나든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그리고 강렬했다. 지난해 방한한 프란시스코 교황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황의 진실된 모습에서 선생은 "한국 가톨릭이 나아갈 길을 보았다"고 말한다.

"순교자의 성지를 찾은 교황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한국 가톨릭은 사제보다 평신도가, 특권층보다 평민이,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주도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걷는 고통을 통해 순교자의 고통과 절대자를 향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순교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혹독했다. 서슬 퍼런 피의 박해를 피해 숨어든 산골 오지는 지금도 사람의 발길을 좀체 내주지 않으려 했다. 길도 이정표도 없어 산을 넘고 들판을 건너야 했다. 폭우 속에서 논두렁길을 미로처럼 헤맸고 먹을 곳, 잘 곳을 찾지 못해 황망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온 몸이 타들어갔지만 냉수 한 잔, 빵 한 조각 내주지 않는 야박한 교회 인심에 낙담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구도의 길이자 신의 숨결을 밟아가는 천로역정이었다. 점으로만 존재하던 성지 111곳은 176일 동안 그의 걸음을 통해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남상범 선생이 옥현진 주교와 함께 자신이 걸은 성지 111곳을 표시한 60만분의 1지도를 펼쳐보이고 있다.
▲ 성지순례 남상범 선생이 옥현진 주교와 함께 자신이 걸은 성지 111곳을 표시한 60만분의 1지도를 펼쳐보이고 있다.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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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가 없는 선생의 여정에 카톨릭 교단 측도 주목했다.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 옥현진 위원장(광주교구 보좌 주교)이 순례 기간 내내 그의 여정을 챙겼다. 순례 마지막 날인 지난 9월 12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위치한 CBCK(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옥 주교는 한 시간 가까이 선생을 위한 축복 미사를 집전하고 완주 축복패를 전달했다.

성지 완주자들에게 통상 종이 형태의 간단한 축복장만 전달하고 끝내는 것과 달리 이날은 그의 선지자적 도전에 걸맞는 예우를 한 것이다. 최근 위원회는 선생의 성지 도보 완주 소식과 함께 선생이 행적을 표시한 60만분의 1의 지도를 로마 바티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정식 보고하기도 했다.

담도암 선고... 시간과의 사투

50년 지기인 명지병원 이건욱 교수(간외과)와 함께 기념촬영.
▲ 50년 지기 주치의와 기념촬영 50년 지기인 명지병원 이건욱 교수(간외과)와 함께 기념촬영.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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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그를 시험대에 서게 한 것일까. 사달은 하필 순례를 마친 그날 일어났다. 성지 완주의 흥분과 기쁨으로 교단 측이 마련해 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집에 와서 허기를 달래려 버섯을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은 게 화근이었다.

새벽녘 토사를 쏟아내며 화장실 바닥에 혼절했다. 몸을 너무 혹사해 그러려니 했다. 그새 몸무게가 10kg이 빠졌다. 40여 년 전 담낭절제술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았다. 고심 끝에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았고 주치의로부터 담도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조직검사 등 정밀진단 결과 여명 2~3년이 예견됐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간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루 40~50km 걸었고, 많게는 하루 80km를 질주하고도 다음날이면 멀쩡했다. 평생 감기 한 번, 몸살 한 번 앓은 적 없고 온 나라를 들쑤신 메르스 사태 때도 마스크도 없이 마을과 도시를 넘나들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공원 산책에도 진땀을 흘린다. 굵고 차돌 같던 허벅지와 종아리는 근력이 빠지면서 가늘고 흐물흐물해졌다.

"걷기 대왕인 내가 이젠 동네 할멈들한테도 뒤처져요, 허허."

선생은 현재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극심한 통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진짜 상대는 암세포가 아니라 시간이다. 주어진 시간은 2~3년. 그 안에 필생의 역저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란 후회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삶입니다. 17년간의 객지생활과 10년 유랑을 통해 저는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다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펴 우리 민족과 하나님의 제전에 받치고 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길에서 만난 민초들이 내 삶의 스승

이번 성지순례를 포함해 선생은 지난 2005년 11월부터 정확히 11년간 대한민국을 총 13바퀴를 걸어 여행했다. 거리로 환산하면 3만2500km에 달한다. 서울을 기점으로 동에서 서로, 다음엔 서에서 동으로 국토 맨 외곽을 마름질 따듯 걸었다.

때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국토를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는가 하면 홍도, 흑산도, 제주도 등 50여 개 낙도로 철선을 타고 건너가 미답의 해안길을 샅샅히 훓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찍은 사진만 100만장에 이르고 매일 기록한 일지는 키보다 높게 쌓였다. 

걷기 여행은 일반인의 예상과 돈이 많이 필요한 비싼 여행이다. 혹독한 환경을 장기간 견딜 장비부터, 먹고 자는 비용으로 하루 10만 원 꼴이 소요된다. 국토 한 바퀴를 걸어 여행하는데 대략 3000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 천문학적인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을까.

놀랍게도 2005년 11월 첫 바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껏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지원해줬다. 독립자금을 대는 심정이라며 수억 원을 쾌척한 젊은 독지가가 있었는가 하면 식당에서 말 없이 밥값을 내고 가는 아주머니, 주머니에 만원 지폐 한 장을 찔러주고 얼굴을 붉히며 달아나는 아기 엄마 등 수많은 사람들이 대가없이 그를 후원했다. 성지순례 비용도 이들의 소리 없는 후원으로 가능했다.

그렇다고 선생이 사람들로부터 받기만 한 건 아니다. 길에서 만난 병마에 시달리는 시골 촌부들에게 다가가 서울대병원의 분야별 최고 선임의사를 일일이 주선했다. 선생의 직함은 서울의대 명예홍보대사이다.

"돌이켜보면 있는 자, 가진 자들한테 대접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들 사는 게 고만고만한 민초들었어요. 저는 세상이란 명강의장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감했고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그 분들이 저의 스승이고 재산입니다." 

서울대병원을 마다하고 선생이 멀리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은 것은 주치의인 이건욱 박사와 영상의학과 박재형 박사 때문이다. 둘 다 서울의대를 정년 퇴임해, 명지병원으로 옮겨 이곳 간센터를 이끄는 최고 명의들이다. 동시에 선생과는 오랜 지기이다.

기적 같은 나눔은 입원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거액의 병원비도 선생의 투병 소식을 접한 전국의 지인들이 힘을 보탰다. 여기에 명지병원 재단 측도 선생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로 병원비 상당 부분을 덜어주고 있다. 선생은 좀체 믿기 어려운 나눔을 두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로 파송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지갑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행을 위해 여벌옷, 신발,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마태 10,9-10).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테니 옳은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이지요. 저는 10년간 우리 땅을 걸으면서 성서의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보답하는 길은 책을 집필해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암 따위에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태그:#남상범, #성지순례, #국토13바퀴, #암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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