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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가 서울 광장에 열릴 예정이다. 경찰은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체포조를 투입하여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단순히 연행을 많이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했다. 복면을 쓰고 폭력 행위를 하려고 할 경우 유색 물감을 뿌려서 체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집회 참석 전부터 범죄자 취급을 받으니 마음이 무겁다.

순식간에 달려든 경찰 수십 명, 무서웠던 '체포조'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장면(왼쪽 필자)
▲ 2009년 용산참사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장면(왼쪽 필자)
ⓒ 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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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2009년 용산참가 추모대회에 참석해 연행된 적이 있다. 용산참사는 철거민들의 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강력한 경찰 진압 지시를 내려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사람이 죽자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 날 서울에 모여 추모대회를 열었다. 나는 부산에 거주했지만 용산참사에 분개하며 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 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추모대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참석자를 엄벌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철거민들의 폭력 투쟁으로 경찰까지 희생된 사건이라고 홍보하며 철거민을 추모하는 행위 모두 반국가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집회 참가를 위해 서울에 올라 갈 때 살짝 두려웠다. 반국가적인 불법 집회로 규정된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다치거나 연행당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올라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예상대로 평화 행진은 경찰이 차벽으로 막아 보장받지 못했다. 대신 많은 참가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시민들과 만나 우리의 목소리를 알려나갔다. 나도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이동해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에게 박수도 받고 추모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는 이명박 정부를 함께 욕하기도 했다.

기쁜 순간은 잠시, 행진을 하는 중에 뒤따라오던 경찰이 내 등에 유색 물감을 뿌렸다. 그 후 간부로 보이는 경찰 한 명이 "저 새X 잡아"라고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당황한 나도 행진 대오에 벗어나 도망치려했다. 하지만 수십 명의 경찰이 나에게 달려들어 내 머리에 곤봉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던 찰나에 다른 경찰 몇몇이 내 팔을 끌어당겨 연행되었다. 그 후 2박 3일 동안 조사를 받다가 나왔다.

그 뒤로 경찰의 유색물감과 체포조는 나에게 공포였다. 유색 물감이 내 등에 묻는 순간 수십 명의 경찰이 나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난 폭력 행위를 하지 않았고 단지 인도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구호를 외쳤을 뿐인데 검거되었다. 이후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 날이 떠올라 움찔하거나 집회 대오 가장 앞에서 경찰들에 맞서는 것이 두려웠다. 또 경찰들이 나만 노리고 달려들 것 같아서 집회 참석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경찰의 강제해산 장면 본 후배는 '공황 상태'

명동에 깔린 경찰 병력
▲ 2009년 메이데이 명동에 깔린 경찰 병력
ⓒ 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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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2009년 5월, 다시 서울에서 열리는 메이데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용산참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당시 노동문제도 심각하여 도저히 부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길 내내 경찰의 체포조가 생각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상대로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에서 경찰의 반응은 격렬했다.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리긴 했지만 이날도 평화행진이 보장되지 않아 시위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시민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생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서울광장을 통과하여 지하철을 타려 하는데 경찰 수백 명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단체 깃발을 들고 있는 활동가의 깃발을 뺏으며 방패로 밀쳤다. 다행히 깃발을 든 활동가는 깃발을 지키려다 실랑이가 벌어진 정도였고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시민들을 만나러 명동에 갔는데 그 당시 현장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집회 대오들은 명동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자들을 강제로 해산하기 위해서 방패로 위협했고, 결국 시위자들 대부분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시위자들을 강제 해산 시키는 과정에서 체포조가 등장을 했고 그들을 겁박하며 체포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후배는 충격을 받아서 정신적 공황 상태가 왔다. 시위대는 울부짖으며 집회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알려내고 정당한 행위이고,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후배는 이런 현장을 보니 너무 무섭다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집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가는 내내 후배는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선배로서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중총궐기에 참가하는 이유

지난 11월 14일 오후 5시 10분께, 경찰이 '11.14 민중 총궐기' 대회 참가자를 향해 파란색 색소탄이 섞인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지난 11월 14일 오후 5시 10분께, 경찰이 '11.14 민중 총궐기' 대회 참가자를 향해 파란색 색소탄이 섞인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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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를 통해서 경찰이 두려워진 나와 메이데이 때 경찰 폭력을 보고 공황이 왔던 후배 모두 공포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해 나와 후배는 부산에서 열리는 용산참사 집회에 꾸준히 참가했고,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도 갔다. 그 때 후배에게 물었다.

"경찰만 보면 무섭니?"
"솔직히 무섭긴 하죠. 집회 때 앞에 서는 건 이제 좀 힘들어요. 근데 그때 받은 모욕감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끈질기게 참가해서 내가 받은 모욕감을 어떻게든 풀어버리고 싶어요."

후배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매번 1980년 5월 27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시민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지금 이순간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그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은 격렬한 민주화 투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들도 도청을 사수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80년 5월 26일 군부는 도청에서 나가지 않으면 모두 발포한다고 선언했었다.

투사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은 '지는 싸움'에서도 총을 들고 끝까지 도청을 지켰다. 광주항쟁 당시 주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거나 군부의 폭력 앞에 굴복당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을 것이다. 도청을 끝까지 지켜 군부에 맞서는 것이 자신과 친구들이 겪은 모멸감에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폭력으로 부상을 당했다. 60대 농민 백남기씨는 집회 당시 물대포에 직사로 맞아 지금까지 서울대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물대포를 맞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우리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노동개악과 세월호 진상규명,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등의 구호를 정부와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을 뿐이다. 정부가 폭력적 대응으로 집회 참가자 모두에게 모멸감을 줬다.

난 여전히 물대포 직사와 90년대 백골단과 같은 체포조가 등장한다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지난 11월 14일 집회 현장에서 느꼈던 모멸감을 12월 5일에서 해소하고 싶다. 어쩌면 5일 집회 또한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아수라장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80년 광주항쟁에서 시민들이 끝까지 도청을 지켰듯이 나도 노동의 정당한 권리(노동개악 저지), 교육 주권(교과서 국정화 반대), 세월호 진상 규명 등을 위해, 두렵지만 참석하려고 한다.


태그:#민중총궐기, #민주노총, #연행, #체포조, #서울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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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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