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방이 되자 일본에 강제동원되었던 조선사람들은 귀향길에 나섰다. 일본 정부 자료에 의하면 1944년 말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의 수가 193만6848명이었고 1947년 9월에는 52만9907명이었다. 귀환 동포의 수는 줄잡아 140만 명이 된다. 지난 11월 28일, 올해 부산 평통사의 마지막 평화발자국은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부산사람들을 주제로 진행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우키시마호의 비극

대부분의 귀환동포들은 이곳 부산항 제1부두로 들어왔다. 이 부두는 유일하게 대한제국이 만든 부두다.
▲ 귀환동포들이 도착했던 부산항 제1부두에서 시작한 평화발자국. 대부분의 귀환동포들은 이곳 부산항 제1부두로 들어왔다. 이 부두는 유일하게 대한제국이 만든 부두다.
ⓒ 박석분

관련사진보기


참가자들은 부산항 1부두에서 귀환동포들의 애환을 되새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우키시마호 이야기를 소개한다.

1945년 8월 22일 밤 10시경, 4730톤짜리 화객선 우키시마호가 아오모리 현 최북단인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쓰가루 해협으로 향했다. 우키시마호는 37년에 건조된 배로,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 해군에 징발됐던, 당시로써는 대포와 각종 무기까지 장착해 군사 작전용으로도 손색이 없던 배였다.

출항하던 날 승선했던 사람은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을 빼고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일본 측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배에 탄 한국인 수는 3750명(7천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배가 닻을 내리도록 예정된 곳은 부산이었다. 우키시마호는 일본 북부 지역에서 강제 노역으로 혹사당한 한국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일본이 마련한 '강제 징용자 송환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배에 오른 한국인 대부분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당초 부산을 향해 출항했던 배가 항로를 바꿔 45년 8월 24일 교토 근해로 들어가더니 그곳 마이즈루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를 당해 침몰한 것이다. 승선자 대부분이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됐다. 550여 명만이 구조대의 손길에 목숨을 건졌고 당시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 '미군이 매설한 기뢰에 부딪혀 일어난 단순 해난 사고'였다.

그러나 한국인 생존자들은 '침몰 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일본 해군이 보트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김종호, 전북 진안)"

"함께 구조됐던 헌병으로부터 배 밑부분까지 전기선이 늘어져 있어 절단하려고 했으나 기구가 없어 절단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폭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주윤창, 전남 여천)"

그들은 한결같이 일본 해군이 일부러 사고를 계획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주장은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도 제기했다. 이들은 연구모임을 만들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의혹을 푸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기둥'이 목격되지 않았다는 점과 45년 12월 한국인 생존자들이 우키시마호 사건을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폭거'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를 진주군(미군) 사령관에게 고발한 문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9년간 방치했던 문제의 배를 54년 갑자기 인양한 뒤 세밀한 조사 없이 해체하여 하루아침에 고철로 처분해 버렸다.

1992년, 일본에 거주하는 유가족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공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회'(대표 송두회)를 구성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총독부 대신 권력을 쥔 미 육군사령부 군정청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 9월 2일 미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후 행정권 인수인계 기간을 거쳐 9월 28일까지 유지되었다. 일본에 대한 승전국 미군은 9월 17일 부산에 들어왔고 부산에서도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최고통치권과 입법권, 행정권을 가진다고 선포하고 주민들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군정만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건설 노력을 무시하고 상해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시민공원 자리에 설치된 미 군정청은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들어서면서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금 부산 시민공원자리에 있던 미 군정청 부산사무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된다.(구 하야리야부대)
▲ 미 군정청 부산사무소 지금 부산 시민공원자리에 있던 미 군정청 부산사무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된다.(구 하야리야부대)
ⓒ 박석분

관련사진보기


경남도지사 미군 대장 하리스.
▲ 당시 미군정 관련 기사 경남도지사 미군 대장 하리스.
ⓒ 박석분

관련사진보기


참가자들은 부산에 온 미군들이 숙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미 문화원이 된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귀환동포들 중에는 피폭자들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한국인 피폭 문제, 특히 2세 환우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고 김형율씨의 생가를 방문했다. 일본에 투하된 2개의 원자폭탄에 피폭된 일본인은 7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7만여 명이 조선사람이었다.

당시 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벌이며 부족해진 본토의 노동력을 조선인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기계제작소','히로시마 조선소','나가사키 조선소','나가사키 제강소'등에서 고되고 위험한 일을 했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밀집해 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거주 조선인들은 강제로 동원된 것도 모자라,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체 피폭자의 대략 3분의 1 정도가 사망했는데, 조선인의 경우 7만여 명의 피폭자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피폭 1세인 이곡지 여사의 아들 김형율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면역글로브린결핍증'이라는 희귀증세로 고통당하다가 10년 전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피폭 2세임을 세상에 알리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의 해결을 미국과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을 혼신을 다해 전개하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 김형율의 삶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됐다가 얻은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2세에게도 대물림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른 것으로서 원천무효다. 불법적인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에 면죄부를 주고 위안부 성노예, 강제 징용, 징병, 원폭 피해 문제 등에 대한 배상을 외면한 한일협정은 폐기되어야 한다. 

지난 2012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 및 배상 회피를 한국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적이고 반인도적인 것으로 판결함으로써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에 조종을 고한 만큼 일본으로 하여금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만이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한일관계를 바로잡는 첩경이다. 

참가자들은 고 김형율씨의 아버님 김봉대 선생으로부터 원폭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평통사와 함께 올해 5월에 NPT 회의에 참가하여 유엔본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와 미국,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연설을 했다는 말씀도 들었다.

참가자들은 앞으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겠다고 김봉대 선생에게 약속했다.

조국에 돌아왔지만 갈 곳은 소막 뿐

당시 소막을 개축한 주택. 소막 환풍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 소막사에서 산 귀환동포들 당시 소막을 개축한 주택. 소막 환풍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 박석분

관련사진보기


우암동(우암포)은 소의 얼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개항 후 일본에 소를 대량수출하게 되면서 이곳에 소 막사와 검역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검역을 마친 소는 배편으로 일본, 철도로 만주 등지로 반출되었다.

해방 후 소 막사는 오갈 데 없는 귀환동포의 주거지가 되었다. 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는 갑자기 밀어닥친 피난민을 수용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 이북 피란민이 수용된 이곳은 부산에서 가장 큰 구호시설로서 적기(붉은언덕) 수용소라 불렸다. 피란민의 애환이 스민 우암동 디아스 포라(Diaspora)마을이 된 것이다.

귀환동포들은 부두 창고에서 가마니나 널빤지로 칸막이를 만들어서 살다가 부산시 이주계획에 따라 우암동으로 이주하여 소막에 살게 되었다. 100마리의 소를 키우던 소막 한 동에 평균 100여 명이 살았으며 그나마도 터가 없어 심지어 닭과 돼지를 키우던 곳에 칸을 나누어 생활을 할 정도였다. 죽음을 넘어 귀향한 동포들에게는 가족도, 갈 곳도 없었다. 다만 가난이 앞을 막을 뿐이었다.

도시코가 이용수가 될 때까지

"세상을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끌려간 곳은 일제가 점령한 대만의 신주 가미카제 공군부대입니다. 그 부대에서 21살 일본 군인이 도시코(年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치욕의 성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부대 내에서 비행기 청소일 등을 하는 대만 노무자가 담 너머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알려주었어요. 그 후 수용소를 거쳐서 1946년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마지막 일정으로 수영에 있는 민족과여성역사관을 방문하여 귀환한 위안부들의 기록을 돌아봤다. 

참가자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킨 것은 도시코 이용수 할머님의 이야기였다.

"이웃 나라 일본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자라나는 한일 젊은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원한과 원망을 뛰어넘기 위해서 일본은 고개를 숙이고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평화적으로 하여야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하고 우리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힘을 모으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도시코를 이용수로 만드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이리라.

부산 평통사는 내년에 '6.25를 이겨낸 부산사람들'을 주제로 평화발자국을 계속 진행한다. 올해도 평화발자국에 참가하고 성원해주신 회원과 시민들께 감사드리며 해설을 맡아준 최광섭 대표와 권영주, 김욱, 양화니 해설사들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내년에 만나요~ 부산 평통사는 내년에 '6.25를 이겨낸 부산사람들'을 주제로 평화발자국을 계속 진행한다. 올해도 평화발자국에 참가하고 성원해주신 회원과 시민들께 감사드리며 해설을 맡아준 최광섭 대표와 권영주, 김욱, 양화니 해설사들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박석분

관련사진보기




태그:#부산평통사, #평화발자국, #일제, #평화기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